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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농업노동자들의 모습. 서울시 종로구 광화문광장의 지하 전시장에서 찍은 사진.
 조선시대 농업노동자들의 모습. 서울시 종로구 광화문광장의 지하 전시장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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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에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현대 국가의 권력은 전체 부르주아 계급의 공동 관심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고 규정했다.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의 위원회에 불과하다'는 이 말을 조선시대 노동자들이 들었다면, 그들은 이 말을 '국가권력은 노비주(노비의 주인)의 위원회에 불과하다'는 말로 바꿔서 이해했을 것이다.

학계의 일반적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노비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한 비중은 보통은 40~50%, 적어도 30%는 됐다. 이 정도로, 노비는 매우 흔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노비는 조선시대의 일반인이었다'고 이해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관청에 얽매인 공노비(관노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노비들은 주로 주인의 농토에서 일했다. 주인집에서 집안일을 하는 사노비(개인 소유 노비)들도 있었지만, 사노비의 대부분은 주인의 농토에서 일하고 수확물의 일부를 바치는 사람들이었다.

지주의 입장에서는 양인(자유인)에게 소작을 주기보다는 노비에게 소작을 주는 편이 훨씬 더 유리했다. 그래야 통제가 수월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농토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바로 노비였다. 그러므로 노비는 농업경제 시대의 가장 일반적인 노동자였다.

조선시대 가장 일반적인 노동자는 '노비'

조선시대에도 한문으로는 고공(雇工)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머슴이라고 하는 계약직 노동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숫자는 19세기 이전에는 노비의 숫자를 추월하지 못했다. 적어도 18세기까지는 노비가 가장 대표적인 노동자였다. 적어도 18세기까지는 주인에게 신분적으로 얽매인 노비가 그렇지 않은 머슴보다 많았다.

노비가 가장 대표적인 노동자였기 때문에, 국가권력은 어떻게든 노비를 고분고분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어떻게 하면 대중을 생산현장에 묶어두고 고분고분한 어린양으로 만들 것인가'는 국가권력의 핵심적 고민 중 하나였다. 남의 말에 노예처럼 순종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므로, 그런 고민을 해결하자면 뭔가 인위적인 장치가 필요했다.

그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가 노비에 대한 형법적 차별이었다. 노비와 주인(노비주) 간에 형사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국가는 사실상 일방적으로 주인의 편을 들었다. 노비가 형법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이도록 함으로써 이들을 생산현장에 묶어두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원칙상 노비주의 편이었다. 조선시대 노동자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말을 '국가권력은 노비주의 위원회에 불과하다'는 말로 바꿔서 이해했을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조선시대 노동자의 모습.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의 명성황후 생가에서 찍은 사진.
 조선시대 노동자의 모습.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의 명성황후 생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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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법마저 노비주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대변

국가권력은 왕권과 신권(臣權)의 결합체였다. 만약 국가권력에서 왕권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다면, 노비에 대한 차별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의 입장에서는 전체 백성이 골고루 평등해야 왕권이 극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비주들로 구성된 특권층이 너무 강해지면 왕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권력 내부에서 우위를 차지한 것은 왕권이 아니라 신권이었다. 신권은 지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자 노비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런 신권이 왕권을 제치고 국가권력 내부에서 우위를 차지했기에, 조선의 국가권력은 사실상 노비주의 위원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가권력이 제정한 형법도 노비주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대변했다.

조선시대 형법은 이원적 구조를 띠었다. <경국대전>이나 <대전회통> 같은 종합법전에 포함된 형전(刑典)은 특별법의 성격을 띠었고, 중국 명나라 때의 형법인 대명률은 일반법의 성격을 띠었다. 그래서 형전에 특별히 규정된 경우가 아닌 한, 조선시대 형사 문제는 원칙상 대명률에 따라 처리됐다.

대명률에서 노비를 얼마나 차별했는지는 투구(鬪毆, 싸움과 폭행) 항목에서 잘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주인은 노비를 폭행해도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았다. 다만, 폭행으로 인해 노비가 사망했을 경우에만 주인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노비를 폭행하기 전에 관청에 신고를 했다면, 폭행이 사망으로 연결됐을지라도 주인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관청에 신고를 해야 한다'는 요건은 그리 엄격하게 요구되지 않았다. 신고 없이 노비를 죽여도 처벌을 면하는 사례가 많았다.

예컨대, 서유영이 수집한 실화집 혹은 민담집인 <금계필담>에는 정조 임금 때 한성부판윤(서울시장)·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순조 때에 우의정을 지낸 이서구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루는 이서구의 노비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야! 이서구!"라며 고함을 쳐댔다. 평소에 불만이 쌓여 있었던 모양이다.

이서구는 "쟤 또 술주정이야? 벌써 두 번이나 용서를 했는데"라고 말한 뒤 수노(관리자급 노비)에게 "때려 죽여"라고 지시했다. 수노는 이서구의 명령이 이행했고, 잠시 뒤 형조판서 채제공이 보낸 아전이 이서구의 집을 방문했다. 참고로, 아전은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은 하급 관리였다.

형조(법무부) 아전이 와서 "관청에 알리지 않고 매질해서 죽이는 것은 불법입니다"라고 말하자 이서구는 "만약 신고하게 되면, 우리 입장이 수치스럽지 않겠나. (일을 조용히 처리하려고) 사사로이 죽였네"라고 답했다. 그러자 형조 아전은 두말도 않고 돌아갔다. 채체공도 두 번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채제공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던 정조 시대에 정권의 몸통이었다. 이서구는 몸통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정권에서 주요 지위를 차지했다. 비교적 개혁적인 시대였던 정조 시대의 위정자들도 '신고 없이 노비를 죽여도 무방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 정도면, 수많은 노비들이 주인의 사적인 사형집행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노비는 "노동조건이 왜 이리 부당하냐?"고 따지기에 앞서, 오늘이 자기의 제삿날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각오해야 했다. 이런 분위기는 산업현장에서 '노사분규'를 어느 정도 예방하는 데 기여했다.

노비주는 물론 그 일가친척까지도 보호받았던 형법

조선 후기의 형벌 집행 장면. 경기도 용인시 보라동의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사진.
 조선 후기의 형벌 집행 장면. 경기도 용인시 보라동의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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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대한민국 형법 제17조에서는 "어떤 행위라도 죄의 요소가 되는 위험 발생에 연결되지 아니한 때에는 그 결과로 인하여 벌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A라는 행위와 B라는 결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해야만 A 행위를 처벌할 수 있다는 의미다. 예컨대, 가해자의 폭행 뒤에 피해자가 사망했더라도 그 사망이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되면, 가해자에게 살인죄의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대명률에서는 노비가 주인을 때려죽인 경우에는 폭행과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든 없든 살인죄의 책임을 물은 데 반해, 주인이 노비를 때려죽인 경우에는 폭행과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 경우에만 법적 책임을 물었다.

주인이 노비를 때려죽인 경우에는, 노비의 사망이 주인의 폭행에 의한 것이었는지를 매우 엄밀히 따졌던 것이다. 따라서 관청에 신고한 상태에서 노비를 때려죽이거나, 노비가 자신의 폭행이 아닌 다른 원인에 의해 사망했다는 점이 인정되면 주인은 형사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 주인은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주인은 말 안 듣는 노비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더욱 더 황당한 것은, 이런 특권이 주인뿐만 아니라 주인의 친척에게도 인정됐다는 점이다. 주인의 부모·조부모·외조부모·백부모·숙부모 등이 노비를 때려죽인 경우에도 똑같은 특권이 인정됐다. 그러므로 노비는 '사장님'은 물론이요 '사장님 친척'의 신경도 건드리지 말아야 했다.

반면에, 노비가 주인에게 위해를 가할 경우에는 법적인 응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명률에 따르면, 노비가 주인을 폭행하면 참형이 기본이었다. 목을 베는 형벌이 기본이었던 것이다.

고의로 주인을 살해하면, 사지를 찢는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고의 없이 과실치사로 죽이면 교수형에 처해졌다. 주인의 부모·조부모·외조부모·백부모·조부모를 폭행하거나 살해하거나 과실치사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랬기 때문에 노비는 주인은 물론 그 친척의 몸에도 일절 손을 대지 말아야 했다. 설사 장난으로 툭 쳤다 해도, 까닥하면 폭행죄로 몰려 참형을 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주인에게 대드는 것은 대역죄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주인이 아무리 부당한 노동조건을 부과한다 해도, 웬만하면 그냥 참는 수밖에 없었다. 참을 인(忍)은 노비들을 위해 준비된 글자였다.

이런 법적 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노비는 주인이 부과한 노동조건을 수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인에게 정면으로 대드는 노비들도 있었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지역사회에서 쫓겨날 각오를 했다면 그렇게 해도 무방했다.

노비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가권력은 이런 법적 장치를 통해 노비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그들을 생산현장에 묶어두고자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국가권력은 절대로 '을'의 편이 아니었다. 국가권력은 전체 '갑'의 공동 관심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그:#갑을 관계, #노비, #노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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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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