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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로마가도가 과연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건설되었는지에 대하여 말해야겠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 역시 시오노 나나미 책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현재 이 글을 쓰고 있는 스웨덴 룬드대학 도서관에서 로마가도에 관한 전문서 몇 권을 빌려 보았지만 독자에게 설명하기에는 역시 그녀의 책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했다. 그러니 여기에 큰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그녀의 책 <로마인이야기> 제10권(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을 읽어 보길 바란다. 그녀는 제10권에서 로마인들의 인프라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는데 로마가도는 그 첫 주제였다.

로마가도는 대체로 서로마 제국 시절 건설된 것을 의미한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발견되는 자연발생적 길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가 의도적으로 계획하여 만든 도로로서의 로마가도는 기원 전 312년 재무관이었던 아피우스클라우디우스가 원로원의 승인 아래 착공한 아피아 가도(Via Appia, 이 도로는 로마에서 이태리 반도 남부로 향하는 길인데 처음에는 카푸아까지 가설되었고 로마가 이태리 반도 전역을 영토화하자 브린디시까지 연결된 도로였음)가 처음이다.

그 후 로마는 제국이 멸망하는 기원 후 5세기 말까지 약 800년에 걸쳐 제국 곳곳에 로마가도를 건설하였다. 로마가도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주요 도시를 잇는 간선도로와 그 간선도로로 이어지는 지선이다. 로마제국 시절 로마인들은 간선도로만 무려 8만km를 건설했고, 지선을 포함하면 15만km(어떤 자료에 보면 30만 혹은 40만km라고도 함) 이상의 로마가도를 건설했다.

로마가도는 로마를 중심으로 제국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로마제국 말기를 기준으로 하면 제국의 113개 지역에 총 370여개의 간선도로가 서로 네트워킹 된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간선도로가 인체의 동맥에 해당한다면 거기에서 뻗어 나간 지선들은 실핏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간선도로 8만여km는 대부분 견고한 돌로 포장됐다. 2마리의 마차가 교행 할 수 있을 정도의 노폭(약 4m)에 좌우 각 3m 정도의 길 어깨가 있었다.

상상만 해도 대단하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그 광대한 제국 곳곳이 돌로 포장된 고속도로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니! 쉴 새 없이 박동하는 혈액이 심장을 떠나 신체 곳곳으로 힘차게 흘러가는 것처럼 로마가도는 제국의 핏줄 기능을 했던 것이다.

2천 년 전 조상이 만든 로마가도에 아스팔트만 깔았다?

이런 로마가도는 비단 2천 년 전의 역사적 사실로 끝나지 않았다. 지금 유럽의 주요도로, 특히 이탈리아의 주요 간선도로(고속도로 및 국도)는 대체로 2천 년 전 로마인들이 만든 로마가도에 기초한 것들이다. 현재 1번 국도는 로마에서 북부 제노아까지 이어지는데, 이것은 기원전 241년 착공된 아우렐리아 가도에서 비롯된 것이고, 로마에서 남부의 브린디시를 잇는 7번 국도는 기원전 312년 착공된 로마가도의 원조아피아 가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 로마인들이 한 일이 '2천 년 전 조상들이 만든 로마가도에 아스팔트를 깐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후손 폄하일까.

아피아 가도는 로마가도의 여왕이라 불린다. 사진은 로마 외곽에 위치한 보존된 가도 모습.
 아피아 가도는 로마가도의 여왕이라 불린다. 사진은 로마 외곽에 위치한 보존된 가도 모습.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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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도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견고하고 기술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가도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에도 수백 년 동안 별 관리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건재했다. 6세기 비잔틴 제국(동로마)의 관헌이 아피아 가도를 지났는데 건설된 지 8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수백 년 혹은 2천 년을 버틸 수 있는 로마가도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은 로마인들의 탁월한 도로 건축술에 있었다.

간선도로 중 포장도로(이것을 로마인들은 Via Munita라 불렀다)를 먼저 보자. 로마인들은 이 길을 만들 때 1m 이상을 판 뒤 주먹만 한 자갈을 깔고, 그 위에 작은 크기의 잡석을 넣은 다음, 그 위에 석회석 등을 잘게 부숴 만든 돌가루를 채우고 마지막으로 마름모꼴의 석판을 깔았다. 석판과 석판 사이가 얼마나 정교했는지 머리카락 하나 들어갈 틈도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로마가도의 원형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길이 일부 보존되어 있다. 그 중 하나가 최초의 로마가도, 로마가도의 여왕으로 불린 아피아 가도다.

로마가도 단면도
 로마가도 단면도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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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어쩌면 현재 보존되고 있는 아피아 가도보다 로마가도의 원형을 훨씬 더 잘 볼 수 있는 게 폼페이 유적(후일 폼페이 유적은 따로 다룰 예정이다)일지도 모른다. 서기 79년 화산 폭발로 땅 속으로 사라진 나폴리 근처의 도시 폼페이. 일시에 땅 속으로 사라졌지만 두꺼운 화산재가 도시 건축물을 2천년 동안 보호해준 것은 인류에겐 또 다른 행운이다.

2천 년 로마제국의 도시가 어떠했는지를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줬으니 말이다. 아래 사진을 보시라. 얼마 전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이다. 비록 도시 내의 도로지만 로마가도 중 돌로 포장한 비아무니타의 모습도 바로 이와 같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니, 독자들은 지금 로마 가도의 정수를 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보도블록... 놀라움 그 자체

폼페이 유적의 가도, 2천년 전의 마름모 돌들이 아직도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폼페이 유적의 가도, 2천년 전의 마름모 돌들이 아직도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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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가끔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도블록 까는 현장을 지나칠 때면 위의 로마가도가 생각나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공사현장을 살펴본다. 그런데 기술자가 아닌 내 눈에도 우리의 보도블록 까는 방법은 놀라움 그 자체다.

그 방법은 대체로 이렇다. 우선 땅을 그냥 대충 다진다. 그런 다음 그 위에 모래를 뿌린다. 그리고 그것을 펴고 그 위에 블록을 적당히 얹어 놓는다. 그게 끝이다. 초등학생도 의아하게 생각할 만한 그런 방법이 대한민국 보도블록의 현실이다.

서울 서초구 삼풍아파트 주변의 보도블록. 2012년 여름 필자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촬영한 것이다.
 서울 서초구 삼풍아파트 주변의 보도블록. 2012년 여름 필자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촬영한 것이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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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비만 한 번 내려도 내려앉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 수도 서울 이곳저곳의 보도블록들이 대체로 이런 방법으로 깔렸을 것이다. 1년에 수 백 억 원을 보도블록에 투자하면서도 그 공법은 로마인이 보면 기겁할 수준이다.

그런데 이 같은 부실공사는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로마인의 후예라고 하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발견되니 말이다. 내가 지금 체류하고 있는 룬드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고, 과거 중세시절 이곳을 지배한 덴마크의 가장 중요한 종교 도시였다. 아직도 천 년 역사를 지닌 룬드 대성당(종교개혁 이후에는 루터교회가 되었음)이 도시 한 가운데에 우뚝 서 있고, 도시 곳곳에 중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있다. 나는 지난 1년간 이곳 룬드 시내 한 가운데 살면서 시내 산책을 거의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다. 룬드는 내가 보아 온 어떤 유럽 도시보다 아름다운 역사도시다.

아직도 중세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룬드 시내 도로는 폼페이에서 본 듯한 돌 포장길이다. 룬드의 밤거리를 지나다 보면 중세 도시를 걷고 있는 듯 한 착각을 하게 된다. 멀리서 다가오는 달가닥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듣다 보면, 마치 내가 1천 년 전 중세 어느 도시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럼, 이런 룬드의 돌 포장길의 수준은 어떨까. 나는 이런 의문을 품고 가끔 룬드의 돌 포장 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여기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로마인들이 보았더라면 서울이나 여기나 오십보백보 수준이다. 돌과 돌 사이는 손가락이 아니라 발가락이 빠질 정도로 틈이 벌어져 있고, 변변한 배수시설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룬드에서는 여인들이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자칫 그런 신발 신고 멋을 내다가는 필시 돌 틈에 굽이 껴 넘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포장 공사를 하기에 유심히 지켜보았더니 여기도 그저 모래 끼얹고 간단히 다진 다음 그 위에 돌을 올려놓는 것이 전부였다. 로마인들이 이런 공사방법을 보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룬드 시내의 돌 포장 거리. 아름다운 거리이지만 자세히 보라. 돌과 돌 사이 틈이 얼마나 벌어져 있는지...
 룬드 시내의 돌 포장 거리. 아름다운 거리이지만 자세히 보라. 돌과 돌 사이 틈이 얼마나 벌어져 있는지...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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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로마가도, #세계문명기행, #로마, #로마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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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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