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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중환 경희대 교수는 리처드 도킨스가 유전자 결정론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전중환 경희대 교수는 리처드 도킨스가 유전자 결정론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 허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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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기적 유전자>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제목만으로 숱한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이기적 유전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유전자가 이기적이기 때문에 나는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바람을 피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런 비극적이고 암울한 유전자 결정론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진화심리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책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해명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전 교수는 서울대 생물학과 3학년 때 '도덕을 생물학적으로 연구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 끝에 스승인 최재천 교수(현 이화여대 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그 후 행동생태학으로 서울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미국 텍사스대에서 진화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전자를 알면 편견이 깨진다

전 교수는 <이기적 유전자>가 은유적 제목이라 설명했고, 도킨스 역시 <이기적 유전자> 30주년 기념판 서문에 "책 제목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방점을 제대로 찍는 것"이며 "'이기적'에 방점을 찍으면 이기성에 대한 책이라고 오해할지 모른다"고 적은 바 있다. 오히려 제목에서 강조할 단어는 '유전자'라는 게 도킨스와 전 교수의 설명이다.

도킨스가 주장한 이론은 '유전자 선택론'이다. 이는 진화의 단위가 유전자이며 유전자의 선택에 따라 생명체가 진화한다는 이론이다. 이와 달리 '유전자 결정론'은 오직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관점이다.

도킨스는 '유전자의 목적은 자신의 복제본을 좀 더 넓게, 좀 더 오래 전파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유전자는 때로는 이 목적을 위해 유전자 자신을 담고 있는 운반자(생물)가 다른 개체를 위해 희생하도록 이타적 행동을 명령하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전 교수는 도킨스가 책 제목으로 '이기적 유전자' 대신 '협동적 유전자'나 '이타적 탈것'이라는 제목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 대신 '협동적 유전자'나 '이타적 탈것'이라는 제목도 고려했다 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 대신 '협동적 유전자'나 '이타적 탈것'이라는 제목도 고려했다 한다.
ⓒ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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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가치관이 깨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용감한 행동은 좋고 비겁한 행동은 나쁘다는 선입견을 품고 있죠. 하지만 비겁한 유전자를 가진 토끼는 용감한 유전자를 가진 토끼보다 자손을 남길 확률이 높습니다. 포식자가 나타나면 깊은 굴로 숨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비겁한 형질이 용감한 형질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 있죠. 유전자가 설사 이기적이라고 해도 '나쁘다'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은 도킨스를 비롯한 진화생물학자들을 '유전자 결정론 신봉자'라 매도한다. 전 교수는 '현재 유전자 결정론에 동의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유전자 선택론을 지지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대중이 도킨스를 여전히 유전자 결정론자로 생각하고 그의 진정한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 교수는 말했다. 그렇다면 유전자가 진화의 단위라는 이론은 과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뱀 얼굴 무늬가 있는 벌레가 생기는 과정

"우리는 <종의 기원>이라고 하면 찰스 다윈을 먼저 떠올리지만, 하마터면 알프레드 월리스라는 젊은 과학자의 이름이 더 오래 기억될 뻔했습니다. 다윈은 1859년 비글호를 타고 항해한 뒤 '종이 변한다, 종이 진화한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다윈은 수십 년간 생업을 정리하고 <자연 선택>이라는 대작을 쓸 계획이었는데 월리스가 자신과 같은 논문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공동논문을 발표한 뒤 쓴 책이 바로 <종의 기원>입니다."

전 교수는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두 가지 물음을 던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첫 번째는 '생명계는 왜 이렇게 복잡하고 정교한가'이고 두 번째는 이렇게 복잡한 자연계에서 어떻게 생명체가 '복잡하고 다양한 적응 양식을 만들어 냈는가'이다. 인간의 눈만 하더라도 명암을 구분하는 간상세포, 색을 구분하는 원추세포 등 고유한 기능을 가진 수많은 부분이 정교하게 통합돼 있다.

다윈 등장 이전에 사람들은 지적이고 절대적인 창조자가 생명계를 작동하는 원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도 범신론적 개념을 들며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자연의 섭리가 복잡한 생물학적 적응들을 만들었다고 믿었다.

"아이폰은 스티브 잡스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식빵은 빵을 만든 요리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자연신학자 윌리엄 페일리도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각자가 처한 환경에 놀랍게 적응한 생물들을 보면 지적인 설계자의 존재를 가늠할 수 있다고요."

하지만 페일리의 주장과 반대로, 다윈은 자연계의 복잡한 설계가 단순 '자연선택'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다윈이 '자연 선택'의 과정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가정은 세 가지다. 먼저 생명체에 변이가 일어나야 한다. 다음으로 발생한 변이가 다음 세대에 전해질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변이가 생명체의 생존과 번식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렇게 되면 신과 같은 '선택자'가 없어도 생존력이 떨어지는 개체는 자연히 도태된다. 진화는 '자연 선택'으로 일어나고 생명체는 그 과정을 맹목적∙기계적으로 따를 뿐이라는 이야기다. 다윈은 진화가 변이, 유전, 차별적 성공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논증이라고 말했다.

자연선택을 거친 애벌레의 뱀 얼굴무늬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해진다.
 자연선택을 거친 애벌레의 뱀 얼굴무늬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해진다.
ⓒ 전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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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뱀 얼굴 무늬가 있는 벌레는 아무 무늬가 없는 벌레보다 적에게 먹힐 확률이 낮습니다. 보호무늬라는 변이는 벌레의 생존율에 영향을 미치고 이 벌레는 살아남아 후손을 남기죠. 무늬가 실제 뱀 얼굴과 비슷할수록 벌레가 살아남을 확률은 높아집니다. 이러한 '자연 선택' 과정을 거쳐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보호 무늬를 지닌 벌레가 나타나게 됩니다."

전 교수는 '자연 선택'을 통해 사람의 안구 같은 복잡한 기관의 진화과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원시적인 생명체의 눈은 아마 평면에 시신경이 붙어 있는 형태였을 것이다. 그러다 눈의 신경이 오목하게 들어가는 형태로 진화하면서, 시신경이 빛이 들어오는 각도를 인식하여 물체의 방향을 알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태는 바늘구멍 사진기 같아서 상이 뒤집히는 단점이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눈 내부에 렌즈 구실을 하는 수정체가 생기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전 교수는 "우리가 긴 세월에 걸쳐 일어나는 진화 과정을 모두 볼 수는 없지만 귀납적 추론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양한 형태의 눈들을 조사하면 눈이 진화하는 과정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구상에는 명암만 구분하는 원시적 눈을 가진 지렁이부터 고도로 발달한 눈을 가진 맹금류까지 다양한 생명체가 있다.

일개미는 시집도 안 가고 일만 할까?

"일개미 암컷은 혼자서도 자식을 낳을 수 있습니다. 대신 아들밖에 낳을 수 없지요. 하지만 교미하지 않아도 번식이 가능한 암컷 일개미는 여왕개미가 낳은 동생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합니다. 임신을 하지 않는 이타적인 일꾼입니다."

그동안 자연선택이 자신의 유전자를 많이 남기는 쪽으로만 진화한다고 주장해왔던 다윈은 난관에 부딪힌다. 암컷 일개미나 일벌의 이타적인 행동을 진화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윈의 이론에 의하면 개미와 벌의 이타적 유전자는 이미 제거됐어야 했다.

1930~50년대 학자들은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구집단 선택론'을 들고 나온다. 개체에 도움이 되는 행동만큼 집단에 도움이 되는 형질도 쉽게 선택된다는 논리였다. '구집단 선택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사자의 사냥법을 예로 든다. 사자가 젊은 사슴 대신 늙고 힘없는 사슴을 잡아먹는 것은 전체 사슴군의 활력을 높이기 위해서고, 인간이 나이가 들어 노화가 진행되는 것도 종 전체에 도움이 되어서라고 설명한다. 협력을 원하는 개체와 이기적인 개체가 섞여 있으면 협력적인 개체가 많은 쪽이 더 번성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집단 전체가 자연선택의 단위가 된다는 '구집단 선택론'에는 치명적 오류가 있다. 협력을 원하는 개체가 다수를 차지한 집단 안에 한둘의 이기적인 개체가 들어오면 이 집단은 곧 이기적인 개체에 점령당한다. 다른 집단에서 건너온 돌연변이나 이기주의자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쉽게 착취해 가장 큰 이득을 보기 때문이다. 결국, 자연선택은 집단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개체 단위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이타적 행동도 진화의 결과

윌리엄 해밀턴은 사회적 행동인 '협력'을 다윈의 진화론에 처음 적용한 사람이다. 생물학적 유전은 유전자의 형질을 보면 몇 세대 후에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예측가능하다. 그러나 '협력'은 어떤 상대를 만나느냐에 따라 나의 이익과 손해가 달라진다. 내 유전자가 이타적인지 이기적인지 안다 해도 상대 유전자의 특성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밀턴은 내가 타인에게 받은 이익이나 피해 외에 내가 상대에게 주는 이익과 피해까지 모두 따져보아야 협력이 가능한지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내 동생이 아파 신장이 필요하다고 해봅시다. 동생이 살 수 있다면 내 신장을 주겠죠. 나는 수술 받느라 며칠 고생하겠지만, 동생을 살리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럼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고종사촌이 아프다면 어떨까요? 아마 좀 더 오래 고민할 겁니다. 왜냐하면 유전적으로 나는 동생과 더 가깝고 고종사촌과는 상대적으로 멀거든요."

전중환 교수가 유전자의 이타적 행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중환 교수가 유전자의 이타적 행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허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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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교수는 유전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안이 지금 유전자가 들어있는 개체가 살아남느냐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내 유전자가 자신의 복제품을 후대에 얼마나 많이 남기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나와 유전적으로 더 가까운 복제품의 경우 내 유전자가 들어있을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나와 동생은 부모님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니 형제는 50%만큼 나와 같다. 나의 또 다른 복제품을 더 오래 살게 하는 것은 유전자의 눈으로 봤을 때 분명히 이익이다.

"부모님이 대신 내주신 대학 등록금을 여러분이 갚을 필요는 없습니다. 농담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도 유전자의 관점에서 이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일은 일반적이고 자발적입니다. 다만 부모자식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는 자식들이 부모가 줄 만하다고 생각하는 범위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부모는 '내가 얻는 유전적인 이득보다 손해가 크다'는 생각이 들어 자식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유전자 복제품의 증감은 자연이 선택한다. 그래서 남이 내게 주는 효과는 배제하고 내가 남과 유전자를 공유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따져 행동하는 것을 '포괄적합도'라고 부른다. 존 메이나드는 이 개념에 '혈연선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가 그랬듯 '혈연선택'이라는 이름은 많은 오해를 낳았다. 유전자는 친족이 아니어도 타인을 돕는 사회적인 행동을 하게 할 수 있는데 이 단어만 보면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은 친족관계에서만 일어난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 교수는 유전자의 협력 중 '혈연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도킨스가 상상한 '녹색수염 유전자'를 예로 들었다.

도킨스는 혈연 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녹색수염 유전자'를 상상했다.
 도킨스는 혈연 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녹색수염 유전자'를 상상했다.
ⓒ 전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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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전자에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시다. 이 유전자는 녹색수염을 자라게 하고, 녹색수염을 지닌 다른 개체를 돕게 합니다. 이 유전자를 가진 A가 길에서 우연히 B를 만났습니다.  이때 B에게 녹색수염이 나 있다면 설령 B가 A의 친족이 아니라도 녹색수염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A는 B에게 호감을 느껴 이타적 행동을 하게 됩니다. A와 B는 모두 녹색수염 유전자를 가져 넓은 의미의 혈연관계이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많은 학자가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 사이에서 '녹색수염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진화론 덕분에 신의 섭리를 빌리지 않고도 생태계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다윈의 후학들은 유전자를 통해 진화론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고, 협동이나 희생 같은 복잡한 행동양식을 설명해냈다. 최근에는 사랑이나 도덕 같은 고차원적 개념을 진화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진화심리학'의 시대가 온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기적 유전자, #전중환, #진화심리학, #리처드 도킨스, #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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