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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16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약 이행으로 울산국립대 설립이 확정되자 울산시청 정문에 환영 설치문이 달렸다
 2005년 9월 16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약 이행으로 울산국립대 설립이 확정되자 울산시청 정문에 환영 설치문이 달렸다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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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울산으로 이사온 해가 1995년이었으니, 18년이나 됐다. 내가 울산에 와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왜 대학이 이렇게 모자라나?'였다.

이사 올 당시 울산의 인구가 100만명이 넘었으나 4년제 대학은 울산대학교 한 곳 뿐이었다. 당시 매년 1만3000명 이상이 대학에 진학했으니, 전문대학을 포함해 울산에 있는 대학에서 수용할 수 있는 정원은 절반도 채 안됐다. 높은 대학진학율에 타지로 유학을 보내야 하는 학부모들의 교육비 부담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인구가 30만명 규모인 인근 경주와 진주에도 4년제 대학이 4~5곳 있는 것과 비교하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인구가 110만명을 넘어선 2000년대 들어서도 대학설립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앞서 그 어떤 정부나 지자체도 이같은 비이상적인 울산의 교육 여견을 해결하지 못했다.

16대 대선이 있던 2002년 봄날,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울산으로 와서 "울산에 꼭 국립대를 설립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또 "KTX 울산역도 반드시 성사하겠다"고 공언했다. 그의 이같은 공약 배경에는 지방분권이라는 복안이 있었는데, 내가 당시에 느낀 것은 '과연 공약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하는 회의가 생겼다.

반신반의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울산 국립대 설립 공약

사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잘 몰랐다. 부산에서 살던 시절에도 '5공 비리 청문회' 기억만 날 뿐, 선거에 몇 번 나와 떨어진 변호사 정도로만 생각했다. 이후 울산으로 와서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2002년 대선 기간에, 울산에도 노란 풍선을 든 그의 지지자들이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가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에도 '설마 공약을 성사할 수 있을까'라는 반신반의했고, 실제로 많은 시민들이 이같은 의구심을 품었다. 그동안 말로만 일했던 정치인들을 통해 얻은 학습효과 탓이 컸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 후 그는 공약 추진에 놀랄 정도의 집착을 보였다. 나는 당시 울산의 대다수 구성원이 모여 결성된 '울산국립대 설립 범시민추진단' 사무국장을 맡았는데, 울산시청의 담당 공무원과 함께 노 대통령의 공약 추진을 쭉 스크린 했었다.

특히 당시 교육부가 전국의 넘쳐나는 대학을 구조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국립대 설립은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또 서울과 부산을 최대한 가까운 직선으로 연결하는 경부선 구조상 직선에서 꽤 비켜난 울산에 KTX를 정차시킨다는 것도 어려운 문제였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인 2003년 1월 29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 토론회에서 "울산의 국립대학은 이전이든 신규 설립이든 교육에 불편이 없도록 협의하겠다"고 했다. 또 취임후인 그해 4월 11일 울산을 방문해 "울산 대학문제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고, 그해 9월 열린 부산 울산 경남지역 언론사 합동인터뷰와 12월에 열린 전국 시도의회의장 초청 오찬에서도 배석한 참모들에게 "적극적이고 설립가능한 방향으로 (울산국립대 설립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전국 각시도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였다.

당시 나는 울산국립대 추진단 사무국장으로서, 청와대와 정부여당의 울산국립대 공약 이행 여부를 체크하기 위해 민주당 당직자와 수시로 연락하며 그쪽 분위기를 들었다. 하지만 민주당 당직자는 "관료들의 반대가 심하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전하곤 했다.

'울산 국립대 설립' 공약 끝내 이행한 노무현 전 대통령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1월 29일 지방분권 및 국가균형발전시대 선포식에서 "교육부 장관은 국립대 설립 불허방침에 따라 울산 대학설립을 절대 불허한다고 하지만 대통령은 울산에 국립대를 설립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교육부의 반대가 심함을 본인 입으로 직접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교육부 반대로 국립대 설립이 어려울 것이란 생각은 우리의 기우였다. 2004년 봄날 노 전 대통령은 울산지역 민주당 당직에게 "농촌이 폐교한다고 도시에 학교를 새로 안 지을 수 있나? 110만도시 울산에는 국립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을 시민에게 알려도 좋다"고 약속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7월 열린 인천지역혁신발전 5개년 토론회에서도 "(교육부 관료가) '전국적으로 대학생 수가 줄어 정원이 축소되고 있는 데 어떻게 대학을 늘리느냐'고 하길래 '지역마다 수요가 다른 데 국가라는 한 통속에 넣고 지역사정을 무시할 수 있느냐'고 했다"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이같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들은 현재 울산시청 기획관실에 문서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5년 9월 16일 교육부와 울산시는 '울산국립대설립을 위한 양해 각서(MOU)'를 체결했고, 마침내 울산국립대 신설이 확정됐다. 노 전 대통령은 교육부 관료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경부선에서 비켜나 어려울 것 같았던 KTX 울산역도 마찬가지였다.

울산국립대 설립이 확정되던 날 울산시청 정문에는 '노무현 대통령님 고맙습니다'란 크다란 아치가 걸렸다. 울산 전역 곳곳에는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각계각층의 현수막이 내걸렸다. 울산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 누구도 못한 일을, 대학구조조정이란 난관과 반대 속에서도 노 전 대통령은 해낸 것이다.

하지만 그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역의 분위기는 차츰 싸늘해졌다. 누구 입에서 먼저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칭송 받던 노무현은 어느날부터 비토의 대상이 됐다. '넘어져도 노무현을 탓한다'는 통설을 그대로 보여줬다. 특히 대선이 있던 2007년 노무현 비토는 극에 달하는 느낌이었다.

당시 취재로는 이발소와 재래시장에서도 "경기가 너무 나빠 죽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물어본 10명이면 7~8명은 "참여정부와 노무현 대통령 때문"이라고 했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도 울산의 1인당 GDRP가 3200만 원이었고, 4년간 약 20%가 늘어났다는 통계가 있음에도 사람들은 '대통령 때문에 죽겠다'고 했다. 왜 서민들까지 나서 노무현을 탓하고 나선 것일까?

칭송 받던 노무현을 욕하는 자는 누구였나?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말 한 마디 잘못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할 터지에 놓였다. 하지만 국민들은 노 전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탄핵을 추진한 한나라당은 역풍을 맞았고, 그해 총선에서 참패했다.

수년 간 침울했던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를 구심적으로 절치부심했다. 나는 2006년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울산 남구 종하체육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울산시당 필승대회를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 한나라당을 짊어진 박근혜 대표와 이재오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가 거의 참석한 이날 대회는, 마치 대통령 선거와 울산시장 선거를 동시에 하는 선거 유세장과 같은 열띤 분위기였다.

1500여명의 한나라당 당원들이 참여한 종하체육관에는 박맹우와 박근혜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든 당원들이 이름을 연호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박근혜 대표는 울산지역 공천자들에게 공천장을 수여한 후 인사말에서 "노무현 정권이 지난 3년간 한 일이 뭐냐"며 "이 정권만 보면 피가 끓어오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선거에서 박맹우 후보를 울산시장에 당선시켜 이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고 밝혔다.(관련기사: <박근혜 "노무현 정권 보면 피가 끓어 올라">)

또한 당시 이재오 원내대표도 "지난 3년간 정권을 맡긴 결과, 국민은 빈곤에 시달리고 나라빚만 늘었다"며 "썩어가는 태화강에 연어가 돌아오게 한 박맹우 후보를 당선시켜 이 나라와 울산을 태화강처럼 정화시키자"고 거들었다. 참석자들은 환호했다.

나는 이날 대회가 국립대를 설립해 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울산 시민들이 오히려 그를 비토하고 나선 하나의 분기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 주민 돕자고 나섰던 사람들이 퍼주기 했다고 욕해

지난 2007년 3월 울산에서 지원한 국수공장 기공식에 참석차 북한을 방문한 지역 인사들. 보수, 진보가 따로 없었다
 지난 2007년 3월 울산에서 지원한 국수공장 기공식에 참석차 북한을 방문한 지역 인사들. 보수, 진보가 따로 없었다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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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초, 울산에서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을 돕자는 붐이 일었다. 우리겨레하나되기 울산운동본부가 주축이 됐지만, 울산지역 기관·단체, 시민 등 누구나 할 것 없이 나섰다. 시비 1억 원과 시민성금 1억 원이 모아졌다. "남북민간교류를 활성화시키자"며 평양에 국수공장이 설립되도록 지원했다. 그해 3월 27명은 평양에서 열린 국수공장 준공식에도 참석했다. 평양에 간 사람들은 진보·보수 구분이 없었다.

하지만 이후 보수층 지도층에서 보여준 이중 행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궁지로 모는 데 일조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가 없다.

2007년 현대차노조의 정치파업이 이어지자 울산상공회의소를 주축으로 보수성향의 지역 140개 시민사회경제단체로 구성된 '행복도시 울산 만들기 범시민협의회'가 결성됐다. 이들은 수시로 기자회견을 열고 현대차 울산공장을 방문하며 파업 철회를 요구했다.

2007년 7월, 행울협은 울산시청에서 '파업으로 지역 경제가 파산난다'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나는 당시 기자회견을 취재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울산시청 바로 위 대형식당에서 참석자들의 점심식사가 있었다. 나는 행울협의 한 회원이던 선배의 권유에 못 이겨 식사 자리에 참석했다.

1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식당, 한 테이블에 10명 가량 앉았다. 내 주변에는 OOO 봉사단체 회장, OOO 여성단체 회장 등 평소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앉았다. 이들은 주로 지역에서 지도층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다.

놀란 건 자리에 앉자 마자다. 밥을 기다리던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비하하기 시작했다. 비난의 주 소재는 '북한에 돈을 퍼줬다' '경제를 망쳤다' 였는데, 노 전 대통령이 울산 관련 공약들을 이행한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더욱 놀란 건, 평소 중도 내지는 진보성향으로 알고 있던 한 여성단체의 회장의 입에서도 기업인, 보수정치인과 똑 같은 노무현 비난 발언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옆자리에 앉은 선배가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냥 듣고만 있고 입을 다물라'는 신호였다. 노무현 비토는 밥을 먹는 내내 이어졌다.

"울산 국립대를 설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한 그들이지만, 평양을 돕자며 십시일반 돈을 모아 국수공장을 차려주고, 평양을 방문한 그들이지만, 그들 입에서는 '노무현이 북한에 퍼줘서 안보가 엉망이다' '노무현이 경제를 망쳤다'는 소리가 이어진 것이다.

그 후 2년 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날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태그:#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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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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