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봄에 느티나무 세 그루를 오만 원을 주고 샀다. 강화군 불은면 신현리에 있던 그 농원은 천 평도 더 될 정도로 꽤 큰 밭에 온통 느티나무를 키우고 있었는데 최근에 나무를 다 처분했다고 한다. 주인은 밭을 빨리 비우고 싶었는지 자투리 나무들을 싸게 처분한다고 했다. 그래서 찾아갔더니 아닌 게 아니라 밭은 온통 나무를 뽑아낸 구덩이 천지였고 남아 있는 나무들도 굴삭기로 캐다가 말았는지 한 쪽으로 비스듬하게 넘어가 있었다.
주인은 나무를 많이 팔아 몫 돈을 만져서 그랬는지 인심이 후했다. 전화로 밭 위치를 가르쳐주며 가져가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다 가져가라고 했다. 하지만 욕심을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나무들 무게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장정이 서너 명 달려들어야 겨우 한 그루를 옮길 수 있었으니, 많이 가져가고 싶어도 가져갈 수가 없었다.
느티나무와 꽃사과나무느티나무 세 그루를 끙끙대며 차에 옮겨 싣더니 더 이상은 힘들다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장정들을 채근해서 라일락과 목련, 그리고 꽃사과나무 두 그루를 차에 더 실었다. 어떻게든 싣기만 하면 나무는 내 것이 된다. 그래서 남편의 눈총을 무시하고 욕심을 부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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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백나무와 세력 다툼을 하느라 잘 자라지 못했던 느티나무가 어느새 이렇게 키가 컸다. |
ⓒ 이승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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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목을 심을 때면 어디가 좋을지 늘 고심을 하며 자리를 잡아주지만 다음 해에 보면 그 자리가 아닌 듯해서 옮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멀리 서서 바라보기도 하고 또 가까이에서도 살펴보며 이 자리가 제 자리인지 가늠해보지만 확신이 잘 서지 않는다. 그것은 어린 나무를 보고 그 나무가 다 자랐을 때를 예상하는 것이 마치 소경이 코끼리를 더듬는 것이나 매한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옮겨 심은 뒤 두어 해 동안은 몸살을 앓으며 고생을 하지만 곧 제 자리를 잡고 탄력을 받아 자라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바라보면 저 혼자 의젓하게 서있다. 자기가 서있는 그 자리가 본래 제 자리였던 양 나무는 당당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때 가져온 느티나무 세 그루 중 살아남은 건 한 그루 밖에 없다.그 중 잘 생긴 두 그루는 좋은 자리에 심어주고 못나 보이는 한 그루는 대충 자리를 잡아주었다. 그런데 그 나무만 우리 곁에 남았다.
그 나무는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뿐이었을 나무였다. 관심을 못 받아서였을까 나무는 잘 자리지를 않았다. 잎은 성글었고 가지들도 가늘었다. 그것은 아마도 조금 떨어져 있는 측백나무들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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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목을 심을 때면 늘 고심을 하지만 나중에 보면 자리를 잘못 잡아줬을 때도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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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를 잡기까지는 힘이 든다우리 집 들머리에는 측백나무 몇 그루가 힘차게 서있다. 나무들도 세력 다툼을 할 터인데, 이미 세를 이룬 측백나무를 느티나무는 당할 도리가 없었던가 보았다. 그래서 느티나무는 측백나무의 기에 눌려서 어깨를 펴지 못했다.
그런데 잘 자라던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중병에 걸렸는지 둥치 어디쯤에서 진물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어 해를 지나다가 가을도 되기 전에 물이 들더니 잎이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다음해 봄에는 싹을 틔우지 않았다. 이제 느티나무는 한 그루 밖에 남지 않았다.
덤으로 얻어온 라일락과 목련도 제 명대로 살지 못했다. 목련은 어른 팔뚝 정도 굵기의 제법 큰 나무였는데 한 해 꽃을 피우고는 이듬 해 죽어버렸다. 장마가 끝나고 햇살이 무척 뜨거웠던 어느 날 잎이 김을 쏘인 듯 맥을 못 추고 축 늘어지더니 다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배수(排水)를 잘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나무에 따라서 물을 좋아하는 것도 있고 또 반대로 마른 땅에서 잘 자라는 종류도 있다. 사과나무는 물기가 있는 땅에서 자라야 열매가 튼실해지지만 감나무는 비가 많이 오면 열매를 떨어뜨려서 몸을 가볍게 한다. 이처럼 나무들도 좋아하는 환경이 각자 다르다.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 아무 곳에나 심으면 나무는 생고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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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중순이면 활짝 피어서 집을 환히 밝혀주는 꽃사과나무. 혼자 보기에 아까워서 이웃들을 부르기도 한다. |
ⓒ 이승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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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옮겨 심을 때는 잔가지를 쳐주어서 나무가 힘들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제자리에서 잘 자라고 있는 나무를 다른 곳에 옮겨 심으면 한동안 나무는 몸살을 앓는다. 뿌리가 안착을 하지 못해 부실한데 많은 가지에 물과 영양분을 보내려면 벅찰 것이다. 몸이 가벼워야 뛸 수 있듯이 꼭 필요한 가지들만 남기고 잘라줘야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다. 우선은 아깝겠지만 그리 해야 하는데도 빨리 꽃을 많이 볼 욕심에 가지를 쳐주지 않고 그냥 심었더니 목련나무는 힘에 버거웠는지 이듬해 여름에 죽고 말았다.
공존하는 법을 배운 나무들지금 우리 집에 있는 나무들은 그런 시행착오 끝에 얻은 것들이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주느라 뿌리를 내리기까지 고생을 한 나무도 있고 물이 빠지는 길을 만들어주지 않아서 장마철에 여러 날 동안 물을 머금고 있느라 고생을 한 나무들도 여럿 있다. 그래도 이제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만큼 제자리를 잡았으니, 나무들을 볼 때마다 대견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측백나무에 치여서 잘 자라지 못하던 느티나무가 이제는 오히려 측백나무를 내려다보고 있다. 사방으로 가지를 뻗었지만 팔을 훌쩍 들어올린 것처럼 측백나무 위로 가지를 뻗었다. 그들은 치열하게 세력 다툼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둘 다 잘 사는 길을 찾았나보다. 느티나무는 측백나무를 존중했고 또 측백나무는 느티나무를 무시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 공존하는 법을 깨달았나 보다.
세상이 온통 연둣빛이다. 느티나무도 새 옷이 마음에 드는 지 바람을 따라 연신 손짓을 한다. 하늘거리는 잎사귀들 사이로 푸른 하늘이 열려 있다. 언젠가 인연이 다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나무는 남아서 우리를 기억해주겠지. 그리 생각하며 다시 바라보니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느티나무는 묵묵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