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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이후 시작한 한반도 위기가 몇 달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코리아연구원(knsi.org)과 공동으로 현재의 한반도 위기를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특집을 8회에 걸쳐서 진행하고자 합니다. 코리아연구원은 정책대안과 국가전략 제시를 목적으로 하는 네트워크형 싱크탱크입니다. 이번 특집을 통해서 중국의 대북정책,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환경과 위기해법, 개성공단의 위기와 대안, 군사적 충돌 가능성과 신뢰구축, 남북관계 진단과 방향, 미국의 대북정책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서 현위기의 해법을 찾아가고자 합니다. 독자여러분들의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이번 특집에 참여하는 필진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장환(한신대 교수), 최종건(연세대 교수), 김진향(한반도평화경제연구소 소장),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서보혁(통일평화연구원 HK 연구교수), 송영훈(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 김창수(코리아연구원 연구실장), 김연철(인제대 교수) [편집자말]
원조, 설교, 경제제재, 개입정책보다도 북한의 미래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작고 동그랗고 달콤한 스낵이다. 마시멜로로 채워진 이 스낵은 이미 평양에서 전설적인 지위에 올랐다. 이 스낵은 평양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도구이다. 그것은 한국 번영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이미 눈치챈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개성공단을 통해서 북한에 보급된 초코파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5월 1일자 영국의 가디언 신문이 초코파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좀 부풀려서 말한다면 이솝우화의 햇볕보다 더 빨리 초코파이가 나그네의 옷을 벗겼다고나 할까? 초코파이를 먹은 나그네는 곧 일광욕할 준비를 할 것이다.

5월 1일자 영국의 가디언 신문이 초코파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좀 부풀려서 말한다면 이솝우화의 햇볕보다 더 빨리 초코파이가 나그네의 옷을 벗겼다고나 할까?
 5월 1일자 영국의 가디언 신문이 초코파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좀 부풀려서 말한다면 이솝우화의 햇볕보다 더 빨리 초코파이가 나그네의 옷을 벗겼다고나 할까?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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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도 초코파이도 사라진 남북관계

하지만 북한에 내리쬐든 햇볕도 제공되던 초코파이도 모두 중단되었다. 나그네가 일광욕할 상황은 당분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팽팽한 기 싸움으로 꽁꽁 얼어붙은 한반도에서 외투 자락 쥐어 잡고 전투의지만 높이고 있을 뿐이다.

한반도는 유리그릇이다. 남과 북은 유리그릇 위에서 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내리친다고 하더라도 결국 유리그릇을 깨고 말 것이다. 공멸이다. 남북의 지도자들은 이런 불안정한 한반도의 상황을 잘 알면서 상대방의 포기만을 압박하고 있다. 전형적인 치킨게임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나 협상을 말하면 비겁하거나 겁쟁이로 여겨진다.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고 오래 버티면 자존심을 채우고 승리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기 싸움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강경책이 난무한다. 하지만 유리그릇 위에서 진행되는 기 싸움은 어느누구에게도 승리를 안기지 않는다. 이런 기싸움은 상대방의 강경 대응을 유발시키고 결국은 양쪽 모두 재원만 소진한 채 대결과 긴장만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뿐이다.

기 싸움은 '뇌간'이라고 불리는 상대방의 도마뱀 뇌만을 자극할 뿐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과 감정의 원천인 도마뱀뇌가 자극 받으면 이성과 논리는 사라진다. 오직 체면을 살리기 위한 강한 의지와 강력한 수단만이 요구된다.

남북관계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바라봐야 할 것은 북한은 쉽게 변화하지도 않지만, 쉽게 붕괴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 간의 북핵협상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우리가 북한체제를 전략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이유다.

MD 재조정까지 거론하며 대화를 준비하는 미국

미국은 존케리 국무장관이 4월 12일에 서울을 방문 한 이후 서서히 대화를 위한 군불을 때기 시작했다. 사진은 지난 12일, 박근혜 대통령이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 악수하는 장면.
 미국은 존케리 국무장관이 4월 12일에 서울을 방문 한 이후 서서히 대화를 위한 군불을 때기 시작했다. 사진은 지난 12일, 박근혜 대통령이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 악수하는 장면.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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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초부터 시작한 한미독수리훈련이 4월 30일에 마무리되었다. 미국은 존케리 국무장관이 4월 12일에 서울을 방문한 이후 서서히 대화를 위한 군불을 때기 시작했다. 이어 중국을 방문한 존 케리는 양제츠 외교담당 국무위원을 만난 뒤 "북한의 비핵화가 이뤄지면 전진 배치된 미사일 방어망(MD)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MD체제를 추구하는 공화방의 반발이 빗발치자 이에 대해 중국과 합의한 것은 아니라고 한 발 물러서기도 했다.

미국은 북한과 협상에서 중국을 활용하고 싶어 한다. 미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을 이렇게 방치할 경우 2016년경이면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미국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된다. 그래서 미국정부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능력을 제거할 협상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미국 의회나 여론은 북한과 협상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이므로 미국 정부가 직접 협상에 나설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있다.

북한이 말 폭탄 공세를 멈춘 이유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뽑아든 카드가 중국 역할론이다. 미국은 지구적인 차원에서는 여전히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 문제에서는 중국의 중재가 필요하다. 한국정부는 북한에 대한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중국정부는 많은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정부는 이 같은 고차방정식을 풀어갈 준비를 차근차근하고 있다. 심지어 북한의 국방위원회 정책국이 지난 4월 18일에 ▲모든 도발 중지 및 전면 사죄 ▲핵전쟁 연습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확약 ▲한국과 주변 지역에서의 전쟁수단 전면 철수 등이 대화의 조건이라고 밝혔을 때 이를 긍적적으로 해석하기까지 했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런 북한의 발언을 존 케리 국무장관은 북한이 협상에 대해 처음 언급했다는 것이고, 이는 협상을 위한 첫 번째 수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의 이와 같은 처신은 4월 중순으로 예상했던 북한의 무수단 미사일 발사를 유예시키는 성과를 가져왔다. 4월 중순 이후 북한은 지난 1월 말부터 지속해왔던 말 폭탄 공세를 멈췄다.

미국 국무부의 조셉 윤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대행은 지난 4월 25일 상원 외교위원회 동아태소위 청문회에서 "북한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이 없어지면 괌 미군기지에 배치한 MD 미사일 방어망을 재조정하겠다"고 밝혔다. 4월 13일 베이징에서 한 존케리 국무장관의 발언을 재확인해준 것이다. 미국정부는 MD 재조정 같은 국가전략의 수정을 중국에 대한 머리 숙이기라는 자존심 문제로 바라보지 않고 있다. 미국의 이익의 관점에서 이익을 조정하는 협상전술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도 능수능란하게 고차방정식을 풀어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는 중국에도 고차방정식이기는 마찬가지다. 중국은 국제사회의 규범을 어기는 북한은 언제까지 편들 수만 없다. 경제력이 성장한 만큼 국제사회에서 책임국가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 중국의 국익에 맞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북한을 포기할 경우에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조중 국경지역이 불안해지고 한미 군사동맹이 강화되는 것은 중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 전쟁 반대, 북한 불안정 반대, 북한 핵 반대가 중국의 본질적인 이익이 된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중국은 앞에서는 북한을 나무라고 뒤에서는 북한을 달래는 다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미국과 물밑 협상을 통해서 미국이 북한을 대화로 나오게 하는 조치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북미 사이에서 중재외교를 통해서 중국 앞에 놓인 고차방정식을 풀 해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위기가 고조되자 출범 직후부터 한동안 유지해왔던 차분한 기조에서 이탈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북한의 개성공단 가동중단 조치에 맞서 '중대조치'를 내걸면서 북한에 맞선 것이다. 이는 한반도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이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의 부족이고, 한국이 풀어야 할 고차방정식의 해법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북한에 밀릴 수 없다는 강박관념의 표현일 뿐이다. 남북관계에서 이런 강박관념이 바로 대결의 악순환을 가져오는 원천이다.  

화끈하게 사용한 한국판 벼랑 끝 전술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대북회담을 제안하면서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중대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한 것은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 부재와 부처 간 정책 조정능력의 부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동안 국제사회가 비판했던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의 한국판이다. 북한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벼랑 끝 전술을 한국이 화끈하게 사용한 것이다.

미국 언론들도 북한의 강경조치가 수그러들 때 한국정부가 개성공단 인력철수조치를 취했다고 바라보았다. 특히 중국의 6자회담 대표인 우다웨이가 미국을 방문하여 북미대화의 조건 마련을 위한 협상을 하던 시점이었다. 또 윤병세 외무장관이 4월 24일 중국을 방문하여 북한문제에 대한 한중 협의를 하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4월 25일 정부의 회담제안과 4월 26일 인원철수조치는 국제정세의 흐름과 대북정책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통합적인 정책조정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다.    

1970년 이전의 남북관계는 '대화없는 대결의 시대'였다. 1970년을 거치면서 '대화 있는 대결'를 거쳐서 2000년에 들어와서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발전했던 것이다. 이제 남북관계는 1970년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

냉전시기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은 북한과 대결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대화와 협상을 겁쟁이나 비겁한 행동으로는 여기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대화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대화 없는 대결의 시대'와 '대화 있는 대결의 시대'

1968년과 1969년은 1953년 한국전쟁 정전 이후 북한의 위협과 도발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였다. 1968년에는 북한의 124부대 소속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태가 벌어졌다. 이틀 뒤인 1월 23에는 북한해군함정이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불르호를 나포했다. 또 그 해 10월에는 130여 명의 무장 게릴라들이 울진 삼척을 침투했다. 1969년 4월에는 북한군이 미군 EC 121 정찰기 격추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 들어와서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에 대한 주도권을 잡겠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여 돌연 평화통일제안을 한다. 8·15 평화통일구상에는 "1995년까지 남북한이 서로 반공이니 반동이니 하는 소리하지 말고 서로 평화를 지키면서…"라는 구절이 있다. 마치 1990년대에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이 1995년 통일원년을 내세우면서 통일운동을 활성화시켰을 때를 연상하게 하는 발언이다. 

당시 청와대의 입장은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북한에게 전쟁을 하지 말고 어느 체제가 더 잘 살게 할 수 있는가를 경쟁하자고 던져 주는 것이 전쟁억제를 위해 몇십 배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고등전략"이라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의 요지는 '긴장상태의 완화를 거쳐 평화통일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통일 이전에 긴장완화, 전쟁방지, 평화정착 등의 중간단계 설정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으로서 이후 역대 한국정부 통일정책의 골격이 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본격적으로 대북협상을 준비하였다. 대북협상은 남북한의 안보에 영향을 미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이에 따라서 1971년에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안하였다. 북한이 수락하여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북대화 재개되었다.

남북 적십자회담을 거쳐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선 인도주의 회담 → 후 남북당국자 회담'이라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대화의 패턴은 이미 박정희 시절 그 기초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자존심 경쟁이 아닌 '고등전략'을 사용하기 위해 남북대화를 시작했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박정희가 구상한 대북 고등전략은 김대중 노무현 시절에 꽃을 피웠다. 박근혜 시대에는 오히려 고등전략이 자존심 경쟁이라는 하등전략으로 대체되고 있다.

물론 박정희의 고등전략이란 1969년 '아시아는 아시아의 손'으로 라는 닉슨 독트린과 이후 미중 수교의 국제정세에 기인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대북정책을 독재정권 강화와 민주화세력 탄압으로 악용하였기 때문에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국제정세의 맥락을 읽지 못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와는 분명 달랐다.   

박정희는 본격적으로 대북협상을 준비하였다. 이에 따라서 1971년에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안하였다. 사진은 2010년 11월 1일 금상산 면회소에서 이산가족 1차 상봉자 중 최고령자인 김예정 할머니(96세)와 북측의 딸 우정혜씨와의 아쉬운 작별 장면.
 박정희는 본격적으로 대북협상을 준비하였다. 이에 따라서 1971년에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안하였다. 사진은 2010년 11월 1일 금상산 면회소에서 이산가족 1차 상봉자 중 최고령자인 김예정 할머니(96세)와 북측의 딸 우정혜씨와의 아쉬운 작별 장면.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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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테러 이후에 받은 북한의 수재지원물품

1983년에도 위기가 있었다. 9월에는 소련전투기에 의한 대한항공 격추사건이 발생했다. 10월에는 북한에 의한 아웅산 테러가 자행되었으며, 12월에는 다대포해안 간첩침투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사건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은 이듬해인 1984년에 LA 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 체육회담 개최를 제안한다. 이후 11월에는 남북경제회담 개최를 제안하고, 1985년에는 남북국회회담을 제안한다. 이러한 대화노력은 1985년 9월 최초의 역사적인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으로 이어진다.

전두환 정권 역시 광주에서 만행을 저지르고 권력을 찬탈한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남북대화를 이용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심지어 아웅산 테러 다음 해인 1984년에는 북한으로부터 수재물자 지원도 받는다. 남북관계를 기 싸움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이런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역대정부에 간헐적으로 이어져 온 대북정책에 대한 고등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점은 이명박 정부와 차별적인 것이다. 이명박 정부 내에는 그런 세력이 전무했다.

아직도 박근혜 정부의 신뢰 프로세스가 창조적인 남북관계를 만들어 내기를 희망한다. 창조적인 남북관계는 화해협력을 뛰어넘는 것이다. '대화 없는 대결시대'로 역사적으로 퇴행하는 정책이 되지 말아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 내부에 그런 고등전략을 구사할 역량이 갖추어져 있는지 자꾸만 회의감이 늘어나는 상황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knsi.org)에도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필자는 코리아연구원 연구실장이면서 한반도평화포럼 기획실행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태그:#신뢰프로세스, #대북협상, #박정희 대북정책, #아웅산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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