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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땅 이야기> 겉표지
 <십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땅 이야기> 겉표지
ⓒ 갈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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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4월 29일), 불에 탄 지 5년 만에 <서울 숭례문>(국보 제1호)이 복원, 이번 주말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될 거란 뉴스를 접하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숭례문 화재 당시 무척 안타까워했던 주변의 몇몇 사람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랬더니 그중 누가 "그럼 우리 돌아오는 주말에 남대문이나 보러 갈까? 모처럼 남대문 시장에도 가보고"라며 되묻는다. 그에게 "남대문이 아니고 숭례문이라니까!" 라고 되받았더니 "남대문이나 숭례문이나! 그게 그거잖아!"라며 은근 짜증을 냈다.

그런데 "남대문이나 숭례문이나! 그게 그거잖아!"는 아니다. 숭례문은 이젠 더 이상 남대문으로 불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는 '예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뜻을 가진 '숭례문'인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우리의 정기를 훼손하고 우리의 유산을 폄하하고자 단순히 방향을 지칭하는 남대문이란 이름으로 바꾼, 즉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그런 이름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우리 민족이 일왕의 신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 지명을 한자 동의어나 비슷한 말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원래 왕(王)이었던 것을 왕(旺)이나 황(皇)으로 변경한 것입니다. 그들은 속리산 천왕봉(天王峰)을 천황봉(天皇峰)으로, 가리왕산(加理王山)을 가리왕산(加理旺山)으로, 설악산 토왕성(土王成)폭포를 토왕성(土旺成)폭포....원래 왕은 임금 또는 군주, 여럿 중의 으뜸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제가 강제로 바꾼 '황'은 '일본의 천황'을 일컬으며, 왕(旺)은 '일(日)'에 '왕(王)'을 더한 것으로 일본 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의왕면의 경우 1936년 일제에 의해 아예 '일왕면(日旺面)'이라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일제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서 행정편의를 위해 자명을 쓰기 쉬운 한자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거북 '구(龜)'를 아홉 '구(九)'로, 닭 '계(鷄)'를 시내 '계(溪)"로, 풍성할 '풍(豊)"을 바람 '풍(風)'으로 바꾼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로 인해 마을에 유래하는 전설이나 마을 특유의 지형지물(地形地物)을 따서 지은 지명들은 본래의 뜻을 잃은 채 엉뚱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십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땅 이야기>에서

황국신민화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 고유의 성명제도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를 따르도록 제도화하여 강제 단행한 '창씨개명'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졌다. 그리고 창씨개명 당했던 그 이름을 쓰는 사람들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을 깎아내림과 동시에 행정편의를 위해 고유의 지명을 맘대로 바꿔버린, 창지개명 당한 우리 땅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의식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것 같다. 방송에서 숭례문이라고 해도 한사코 남대문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것을 보면.  그리고 일부 언론조차 '남대문'이라 쓰는 것을 보면 말이다.

'우리의 전통 지명중에는 '골', '말' 등 마을을 뜻하는 우리 고유의 말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 이름만으로도 그 지역의 특징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갖가지 핑계를 대며 어색한 한자식 명칭으로 지명을 바꾸는 바람에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뜻의 지명을 갖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솔나무가 많다'해서 '솔안말'로 불렸던 마을은 '송내(松內)'로, 깎아지른 듯 우뚝 서있는 바위가 있어 '선바위'로 불렸던 마을은 '입암리(立岩里)로...새로운 마을을 뜻하는 '새말'은 '신리(新里)로 불렸습니다. 그밖에 인천 '늘목마을'은 을왕리(乙旺里)로, 수원 '배나무골'은 '이목동(梨木洞)으로, '밤밭골'은 '율전동(栗田洞)으로, 군포의 '산밑'은 '산본(山本)'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십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땅 이야기>에서

내가 자란 고향마을 이름은 새장터(전북 김제) 혹은 신장이다. 내가 자라던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사람들은 새장터, 어떤 사람들은 신장마을이라 부른다. 이름 그대로를 풀면 '새로운 장터'란 뜻인데,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일제초창기 무렵까지 장을 막 벗어난 곳에 형성되었던 주막들로 이뤄진 곳이었던지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동네 가운데로 옛 선비들이 목포에서 한양을 가던 길이라는 1번 국도가 지나고, 걸어서 몇 분 거리에 조선시대 8대장으로 손꼽힐 정도로 규모가 컸다는 원평장(독립만세 운동이 벌어졌던 곳이고 동학농민군들이 집결했던 곳이기도)이 30여 년 전까지 제법 큰 규모로 열렸기 때문에 마을의 이런 유래는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여하간 청소년기에 잠깐 신장과 새장터란 이름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한 적이 있다. 난 새장터란 이름이 왠지 정겨워 좋았는데, 학교에서 신장이라 불렀고 아버지 또한 신장마을이라고 쓰라고 했던지라. 당시만 해도 이런 창지개명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아마도 한자식 이름이거니 지레짐작 결론짓고 말았고, 신장마을이라 대수롭지 않게 썼고 그리고 잊고 말았다.

우리 땅 곳곳에 얽혀있는 사연들을 들려주는 <십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땅 이야기>(갈매나무 펴냄) ''창지개명' 당한 땅을 찾아라'란 글에서 '새말'을 '신리'란 불렀다는 이 부분을 읽기 전까지.

책을 통해 만나는 창지개명 당한 지역 이름들은 좀 더 광범위하다. 모두 소개하고 싶은데, 지면상 모두 소개할 수 없음이 아쉬울 정도로. 그런데 내고향 마을처럼 저자들이 말하지 않는 곳들까지 염두에 두면, 우리가 일제의 잔재 혹은 만행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고칠 생각은커녕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지명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지명은 단순히 어떤 토지나 장소를 부르는 이름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이름도 아니다. 내고향 마을 새장터에 얽혀있는 이야기처럼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불리는 그 지역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의 삶과 영혼과 지혜, 마음 등이 담겨 있다. 이런지라 그 지역의 자연 특성과 역사, 문화, 풍습, 전통 등을 알려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니 이젠 더 이상 우리 스스로 숭례문을 남대문이라 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얼과 정신이 깃든, 수많은 사람이 불렀던 원래의 이름으로 불러줘야 하고 그리고 기억해줘야 할 것이다. 숭례문이 많은 세월을 지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2013년 이제부터라도 말이다.

사실 그동안 남대문의 이름에 얽힌 이와 같은 이야기나 개명당한 여러 지명에 대해선 관련 책들이나 언론 매체들을 통해 꾸준히 알려져 왔었다. 특히 남대문의 이름에 대한 사연은 특히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올해로 광복 68주년이 되는데도 여전히 남대문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왜일까? 아울러 수많은 역사 전문가들이 있는데도 개명 당했다는 그 사실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고 그 이름이 아무렇지 않게 널리 불리고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 모두의 관심과 의식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국가와 해당 지자체, 역사가들의 노력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정체성과 자존감에 관한 글이 대부분인 이 책의 존재가 더욱 귀하고 반갑게만 느껴진다.

내가 이 책의 존재를 반가워하는 또 다른 이유는 참으로 많은 어른이 어른 노릇은커녕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문제를 청소년들에게만 돌린다거나 "요즘 청소년들 참 무서워. 못마땅해도 그냥 모른 척 지나가는 것이 상책이야"라며 지나치고마는 어른들이 많은 요즘, 청소년들이 정체성과 자존감을 갖길 바라는 어른 다섯 명이 뜻을 모아 쓴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 5명은 현직 지리교사들이다. 우리 땅에 얽힌 역사와 문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한 풍습과 전통,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다양한 유산, 경제를 좌지우지한 우리 땅 이야기 등, 청소년들은 물론 상식적인 어른이길 원한다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외에도 ▲일본과의 독도분쟁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중국과의 이어도 분쟁 ▲<태백산맥>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보성 벌교(전남)의 아픈 역사 ▲우리나라의 위치는 좋은 편일까? 나쁜 편일까?▲제주도에서는 제사상에 빵을 올린다? ▲하천이 거꾸로도 흐를 수 있을까? ▲무엇이 도시의 흥망성쇠를 좌우할까? ▲우리나라의 인구정책은 왜 실패했을까? ▲남해안에는 왜 동백나무가 많을까? ▲우리나라에도 '할리우드'가 있다? ▲파도는 지형을 어떻게 바꿀까? 등을 들려준다.

덧붙이는 글 | <십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땅 이야기>l 마경묵·이강준·박선희·이진웅·조성호 공저| 갈매나무 | 2013-03-11| 정가 13,000원



십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땅 이야기 - 지리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통합교과적 국토 여행

마경묵.이강준.박선희 외 지음, 갈매나무(2013)


태그:#숭례문, #남대문, #국보 제1호, #창지개명,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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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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