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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역설> 표지
 <거대한 역설> 표지
ⓒ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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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전 세계적으로 하루에 22억 잔 정도가 소비되는 세계 최대의 기호 식품이다. 커피는 브라질, 콜롬비아 등의 저개발 국가에서 90퍼센트 이상이 생산되고, 소비의 대부분은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서 이뤄지고 있다. 커피를 팔아서 생기는 수익의 대부분은 스타벅스 같은 다국적 기업이나 커피 유통망을 틀어쥐고 있는 중간 상인들에게 돌아간다. 커피 재배 농가에 돌아가는 수익은 전체의 0.5퍼센트에 불과하다.

가령 우리가 4000원짜리 커피를 한 잔 마시면 커피 재배 농가에는 고작 20원의 수익이 돌아간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주요 커피 생산국인 에티오피아의 커피 재배 농가가 1년 동안 벌어들이는 수입은 60달러(우리 돈 약 6만5000원)에 불과하다. 1년 간 뼈 빠지게 일해도 4천 원짜리 커피 16잔밖에 사 먹지 못하는 수준이다(좋은기업센터가 기획한 책 <고장난 거대기업> 인용).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버젓이 일어날 수 있게 되었을까. 커피 한 잔에 숨어 있는 이런 진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커피 한 잔을 마시는 행위는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하나에 불과할 뿐인데, 그것이 왜 문제냐고 반문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거대한 역설>의 옮긴이 조효제 교수는 우리가 무심코 소비하는 빵 한 쪽이나 커피 한 잔에도 자원 추출형 개발, 상업형 영농, 도시 편향의 산업 생산, 잉여 농산물 원조와 식량 레짐 등의 전 지구적인 문제들이 집약되어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커피를 마시는 행위가 단순한 기호나 취향의 범주에만 있지 않은, 대단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행위는, 에티오피아의 커피 농장에서 힘겹게 일하는 아동 노동자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전 세계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제는 필수품이 되다시피 한 휴대전화를 예로 더 들어보자. 휴대전화에는 콜탄(coltan)이라는 희소한 광물질이 들어간다. 이 물질은 주로 아프리카의 콩고에서 나오는데, 그 희소성 때문에 일찍부터 자원 전쟁의 빌미가 되었다. <거대한 역설>의 저자 필립 맥마이클 교수는 콜탄을 둘러싼 전쟁으로 지금까지 400만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그 채굴 과정에서 엄청난 환경 파괴와 훼손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이 정도면 우리 손에 들린 이 편리한 휴대 전화를 '피로 물든 기계'로 표현해도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극심한 부의 불균형... 보이지 않는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것

커피와 마찬가지로 휴대전화 또한 전 지구적인 메커니즘 속에서 돌고 돈다. 저자에 따르면, 2007년 한 해에만 12억 대가 팔린 휴대전화의 폐기물은 미국 연방 정부가 규정한 폐기물 유해 물질 방출 기준을 17배나 초과했다. 그런데 폐휴대전화와 같은 전자 제품에는 은, 동, 플라티늄, 금 등의 귀한 광물질이 포함되어 있어서 폐기물 시장에서 인기가 높다.

실제 매년 2억에서 3억 대가량의 재활용 휴대 전화가 중국에서 인도, 몽골, 베트남의 딜러들을 통해 라오스, 캄보디아 등으로 흘러들어 간다. 이밖에도 수많은 유해 폐기물이, 제대로 된 규제조차 받지 않은 채로 재활용 시장을 통해 전 지구적 북반구('선진-개발' 국가들로 이루어진 지역을 지칭하는 저자의 용어)로부터 전 지구적 남반구('저-개발' 국가들로 이루어진 지역을 지칭하는 저자의 용어)로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소비 행위가 많은 사람에게 아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현상처럼 비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소비하는 것은 대부분 전 지구적 기원을 지니고 있다. (중략) 이는 이 책의 독자들이 아직 세계 시민이 되지는 못했을 수 있지만, 이미 우리는 모두 세계 소비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세계 소비자 역시 아직은 소수에 속한다.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3이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 소비자의 이미지를 접할 수 있지만, 실제로 소비할 수 있는 현금이나 신용을 보유한 사람은 그중 절반에 불과하다. 텔레비전 광고는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이 전 지구적 생산품을 소비하는 것같이 묘사하지만 그것은 한낱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전 세계 인구 중 상위 20퍼센트가 전 세계 상품과 용역의 86퍼센트를 소비하고 하위 20퍼센트 인구는 1.3퍼센트만을 소비할 뿐이다.(55쪽)

인류는 산업화 이후 200여 년 동안 '지구촌'을 향해서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화'와 같은 말이 널리 쓰이게 된 배경이다. 하지만 '지구화'를 통한 '지구촌' 형성은 지극히 일부 계층의 사람에게만 해당한다. 이는 '지구화'가 지구라는 별의 자연스러운 역사적 변화가 아니라 일부의 의도적인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음을 함축한다.

저자가 '지구화'라는 말 대신에 '지구화 프로젝트'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구화 프로젝트'라는 용어는 지구화를 둘러싼 정치를 강조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저자가, 지구화로 인한 물질적 혜택은 전 세계 인구의 5분의 2만이 누리고, 나머지 5분의 3은 대단히 착취적인 노동 조건에서 뼈 빠지게 일하며 발버둥치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부의 극심한 불균형은 결국 '지구화 프로젝트' 뒤에 숨은 보이지 않는 의도들의 결과물인 셈이다.

경제성장과 빈곤을 동시에... '개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저자 자신의 개괄적인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지난 200년 동안 전 지구적인 사회 변동의 매개가 되어 온 개발 담론의 등장과 그것의 역사적인 변화 과정을 밝히고 있는 안내서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개발에 관한 정치·사회사로 보아도 된다. 책의 전체 체제도 개발에 따른 전 지구의 변천상을 통시적으로 훑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개발 프로젝트' 시대(1부)와 198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지구화 프로젝트' 시대(2부), 그리고 2000년대부터 현재에까지 걸쳐 있는 '지속 가능성 프로젝트' 시대(3부) 들을 개괄함으로써 개발의 역사가 보여주는 겉과 속을 낱낱이 살필 수 있다.

당신은 '개발'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개발은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요소인가. 개발에는 종착점이 있을 수 있을까. 언뜻 보면 개발은 우리에게 많은 물질적 혜택과 풍요로운 생활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개발이 경제 성장과 빈곤을 동시에 가져오는 역설 현상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저자는 세계 인구 중 상위 10퍼센트의 부유층이 전 세계 소득의 50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사실과, 1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성 영양 실조 상태에서 신음하게 만드는 먹을거리 위기 상황 등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를 '개발의 역설(development paradox)'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렇게나 모순적인 개발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시장은 자연스러운 현상도 아니고 자유로운 현상도 아니다. 시장은 제도적으로 만들어진 구성물이며, 국제금융기구, 은행, 기업, 국가, 심지어 비정부기구(NGO)들까지 가세한 권력의 관리를 받는다. 지구화 프로젝트의 특징은 개발 프로젝트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정치적으로 개입을 단행했다는 점이다. (중략) 과거에는 개발이 국가적으로 관리된 경제 성장을 뜻했지만, 세계은행의 <세계 개발 보고서 1980(World Development Report 1980)>에서는 개발을 '세계 시장 참여'라는 식으로 재규정했따. 이런 식의 개념 변화는 경제 민족주의를 탈피하고 지구화를 수용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이제 국가 경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경제가 개발의 단위로 등장하기 시작했다.(205, 206쪽)

여전히 '개발'을 외치는 국가... 멕시코는 우리의 미래일까

저자는 오늘날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이 협력하여 특정 국가를 구조조정 하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개입이 아니라 일종의 통치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1997년 우리나라가 그들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받아들인 여러 조치들, 가령 공공 예산의 대폭 삭감이나 공기업의 민영화 조치, 외국 투자자를 끌어들이고 수출 가격을 낮추기 위한 임금 삭감 등은 극빈층과 사회 취약 계층에게는 살인적인 직격탄이 되었다.

"우리가 정부에 대항해 봉기했을 때 정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알고 보니 우리는 멕시코 정부가 아니라, 대금융 자본과 투기와 투자-멕시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를 비롯하여 모든 곳에서 주요 결정을 내리고 있던-에 반대하여 봉기한 것이었다."(216쪽)

북미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될 당시, 그것이 지구화 프로젝트의 속임수임을 암시하면서 멕시코 치아파스 주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킨 사파티스타 반군의 부사령관이자 대변인인 마르코스의 말이다. 1997년 당시에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된 수많은 가장들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리나라에서라고 시민 봉기가 일어나지 말란 법이 있을까.

오늘날 전 세계는 여전히 신자유주의의 사슬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 브라질 사회학자인 에미르 사데르의 말처럼, 그것은 시장이 국가를 대체하고, 소비자가 노동자와 시민을 대체하고, 경쟁이 권리를 대체하고, 신용카드가 노동자증명서와 선거인명부를 대체하고, 쇼핑 센터가 대중 광장을 대체하고, 텔레비전이 인간적인 유대를 대체하고, 사기업체의 후생 복지가 사회 정책을 대체하고, 전 지구적인 것이 일국적인 것을 대체하고, 사회적 배제가 사회적 통합을 대체하고, 소비자주의가 휴머니즘을 대체하고, NGO와 자발 조직이 정당과 사회 운동을 대체한 것과 다름없다.

이 가공할 신자유주의 시대에,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개발과 발전을 외치고 있다. 멀쩡한 4대강을 파헤치고, 수많은 도시 마을 공동체를 순식간에 때려 부순 이명박 정부 하의 5년은 개발과 발전의 욕망에 사로잡혔던 우리 모두에게 아픈 역사로 기억될 것이다. 그런데 그 이명박 정권을 이어받은 박근혜 정부는 '개발'이나 '발전'에 대해 과연 어떤 정신이나 철학을 가지고 있을까. 창조경제니 뭐니 하는 말들을 내뱉지만, 그 진짜 속내를 도대체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는 못내 불안할 뿐이다.

덧붙이는 글 | * <거대한 역설> 필립 맥마이클 씀, 조효제 옮김, 교양인 펴냄, 2013년 4월, 599쪽, 2만3000원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역설 - 왜 개발할수록 불평등해지는가

필립 맥마이클 지음, 조효제 옮김, 교양인(2013)


태그:#필립 맥마이클, #<거대한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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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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