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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30일 오후 3시 6분]

늘씬한 모델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긴 런웨이(패션쇼 무대)를 빼곡히 채운다. 카메라 수십 대가 플래시를 터뜨리는 가운데 디자이너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모델들 앞에 선다.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갈채 속에 디자이너는 고개를 숙인다. 막이 내려온다.

실내는 파장 분위기지만,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들의 쇼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 속에서 '패피'(패션피플의 약자로 잘 차려입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를 향해 렌즈를 대고 셔터를 누르는 그들의 모습은 이제 패션쇼를 묘사할 때 빼서는 안 될 '필수요소' 중 하나다.

인터넷의 발달은 패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더욱 높였다. '런웨이가 아닌 길거리에서 패피들은 어떤 옷을 입을까'라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등장한 이들이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다. 이 직업이 생긴 지는 10여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화려한 거리에서 아름다운 모델을 사진으로 남기는 직업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있다. 이재원(28)씨도 다양한 매체에 작품을 투고하는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이 직업, 보기만큼 화려하지 않단다.

"하루에 셔터를 5000번 정도 누르는 것 같아요. 마음에 드는 사진 5장을 건졌다면 성공한 거예요. 스트리트 사진은 스튜디오 촬영과 달리 모델이 지나가면 그만이니까 최고의 순간을 딱 잡아내야 해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뛰어다니기 일쑤죠. 파리에서는 도로에서 사진 찍다가 차에 치일 뻔한 적도 있어요."

"뛰면서 시차 적응... 늘 준비 상태여야 합니다"

서울패션위크 현장에서 만난 스트리트 포토그래퍼 이재원씨
 서울패션위크 현장에서 만난 스트리트 포토그래퍼 이재원씨
ⓒ 임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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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9일 아침, 2013 춘계 서울패션위크가 열린 여의도 IFC 서울에서 만난 이 작가는 피곤한 얼굴이었다. 패션잡지 '보그걸'에 전달할 사진을 고르기 위해 오전 4시까지 작업했기 때문이다. 영국을 거점으로 유럽에서 활동하다가 비교적 한적한 여의도 거리를 배경으로 색다른 사진이 나올 것 같아 귀국한 지 보름 만에 서울행을 택했다.

"서울 패션위크는 처음이에요. 이쪽 일 하는 사람들은 서울 패션위크를 두고 찍을 게 없다고 해요. 아무래도 4대 패션위크보단 볼거리도 없고 질도 떨어지니 실망할 거란 이야기죠. 그런데 와서 놀랐어요. 생각보다 볼 거 많던데요? 외국인 친구들에게 왜 데려가지 않았냐는 원성을 들었어요. 배경이 예쁘다면서 내년에 꼭 서울 올 거라고 하네요."

흔히 '세계 4대 패션위크'로 런던·밀라노·파리·뉴욕 패션위크를 꼽는다. 그는 이 중 뉴욕을 제외한 세 곳을 방문해 사진을 찍었다. 그는 유럽 패션위크를 "해가 지지 않은 쇼"라며 힘들지만 즐거웠던 순간을 회고했다.

"오전 9시에 쇼가 시작하면 최소 30분 전에는 도착해야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어요. 오전 7시 반쯤 일어나 간단히 씻기만 하고 현장으로 나갑니다. 쇼가 열리는 곳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뛰어다니죠. 오후 7시에 마지막 쇼가 끝나면 숙소에 돌아와 오전 2시까지 사진을 고르고 보정 작업을 합니다. 그러다가 컴퓨터 앞에서 잠들기도 해요. 전 이 생활을 3주 동안 했는데, 뉴욕 패션위크까지 참가한다면 한 달을 이렇게 생활하게 되는 거죠. 남들은 '뛰면서 시차 적응한다'고 하더군요(웃음)."

TV프로그램이나 사진만으로 패션위크를 접한 사람들은 거리에 패피들이 가득한 줄 알지만, 그는 "기대보다 잘 차려입은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밝혔다.

"항상 새로운 사람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지만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일종의 '믿고 찍는 보험'이라고 할 수 있는 유명 인사를 뺀 '뉴페이스'는 찾기 힘들어요. 그래서 늘 준비돼 있어야 합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 괜찮은 사람이 나올지 모르니까요."

디자이너이면서 패피로 유명한 율리아나 세르진코. 이재원씨가 가장 아끼는 사진 중 하나다.
 디자이너이면서 패피로 유명한 율리아나 세르진코. 이재원씨가 가장 아끼는 사진 중 하나다.
ⓒ 이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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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사진가들은 보통 기존 작가들의 어시스턴트로 시작해 경력을 쌓아간다. 반면 스트리트 패션 사진가는 대개 블로그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일종의 포트폴리오를 공개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씨 역시 개인 블로그를 통해 패션 잡지 <쇼프>(Syoff)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첫 제의를 받았다. 능력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났다. 그는 더 열심히 일했다.

"처음 제안이 왔을 때 '나도 드디어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쇼프는 고맙게도 엉망인 내 사진을 보고 런던 스트리트를 맡겼어요.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제가 봐도 부끄러울 정도라니까요."

이후 그는 국내외 패션 잡지와 누리집에 사진을 송고하고 있다. 지난 런던 패션위크에서는 브라질의 커뮤니티 회사로부터 부탁을 받아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 블로거 헬레나 보르동(Helena Bordon)의 전문사진 작가로 활동했다. 캐나다 잡지 <패션매거진>에서는 그의 사진을 전제하며 "사람들의 독특한 스타일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했다"고 소개했다.

사진 한 장에 끌려 영국으로...

이제는 방송국에서 직접 연락이 올 만큼 이름이 알려졌지만, 이 작가가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간 건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패션에 무심했던 그는 군 복무 시절, 남성지를 보면서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전역 후에도 꾸준히 패션사진을 보다가 우연히 우리나라 1세대 스트리트 포토그래퍼 남현범씨의 블로그에 방문했다.

그러다가 문경원 작가가 찍은 사진, 영국 신사가 애인과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컷 한 장에 강렬하게 끌려 "나도 저런 사진을 찍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마침 캐나다 어학연수를 준비하고 있던 차에 부모님의 권유도 있고 해서 행선지를 영국으로 바꿨다.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 없는 그는 카메라를 들고 런던 거리를 뛰어다니는 사실 자체로도 행복했다. 잘 찍고 못 찍고는 상관없었다. 몇 장을 찍어야겠다는 계획도 없었다. 그냥 열심히 했다. 사진 2000장을 찍었는데 마음에 드는 사진은 2장 정도였지만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동안에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렇게 사진이 쌓여가면서 이씨의 실력도 늘어갔다.

"진혁(스트리트 포토그래퍼 오진혁)이라는 친구를 만났는데, 처음 만났을 때 잘 찍었다고는 안 하고 '이렇게 찍으셨네요'라고만 말하더라고요. 친해지고 나니까 '그때 대놓고 말 못했지만 쓰레기였다'고 하더군요(웃음). 거리에서 피사체를 만나면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저 위치에서 이렇게 찍어야지' 하고 미리 생각해야 하는데 예전엔 무턱대고 찍기만 했으니까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부분인 것 같아요."

이 작가는 1급 스트리트 포토그래퍼들이 촬영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워낙 하루하루가 바쁘다 보니 별도로 모임을 만들기는 힘들지만 "카메라를 들고 나간 것 자체가 커넥션"이라고 그는 밝혔다. 교류를 하면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사진 구매처를 소개받기도 한다. 이 작가 역시 토미 톤(Tommy Ton)을 통해 <패션매거진>에 사진을 송고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다 있더라고요. 경쟁한다기보다 배운다는 마인드로 바라봤죠. 처음에는 촬영하는 모습을 보기만 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모델이 어떤 모습일 때 찍는지, 어디에 포인트를 두는지 도저히 모르겠더군요. 이튿날이면 각자 블로그나 패션 관련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을 실제로 보니 감탄밖에 안 나왔어요."

"스트리트 사진의 매력은 바로 무지 속 아름다움"

그는 여전히 화려한 런웨이보다 거리가 좋다고 말한다. 사진작가들 중에는 패션쇼나 화보 촬영만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는 다르게 생각한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장비나 모델을 구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거리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이 있다고.

지난 서울 패션위크에서 이재원씨가 촬영한 작품. 모델은 이호정.
 지난 서울 패션위크에서 이재원씨가 촬영한 작품. 모델은 이호정.
ⓒ 이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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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란 건 어차피 다 찰나를 잡는 것뿐인데, 그중에서도 스트리트 사진은 다른 평범한 순간보다 더 아름다운 순간을 담아요. 예쁜 사람과 예쁜 공간을 찍으면 누가 어떻게 찍어도 예쁘게 나오죠. 찍히는 사람도 아마 자신과 입고 있는 옷이 예쁘다는 건 알 걸요? 그런데 자기가 처해있는 공간·빛·상황 등 자신을 둘러싼 시공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는 거죠. 그 점까지 사진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스트리트 사진의 매력이에요."

이 작가는 직접 거리로 나오고 싶어 하는 이들을 향해 "정말 좋아한다면 나와라"고 조언했다. 거리에서 촬영하는 사람들을 제지하는 곳은 없다. 최신 디지털카메라로도 휴대전화로도 촬영할 수 있고, 모델들도 신경 쓰지 않는다. 자기 자신도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갔다며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그는 말했다.

"회의감이 없을 수는 없죠. 좋은 작품을 찍어보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파파라치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또 '적절한 사람을 찾아 적절한 장소에서 사진 찍기'라는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처음에 느꼈던 보람이나 성취감이 점점 옅어지기도 합니다. 이것보다 좋은 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업종을 전환하죠. 저 같은 경우에는 이런 회의감을 느끼지 못했어요. 아직까지도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올바른 조언 할 수 있는 아빠 되고 싶어요"

서울 패션위크 후속 작업을 끝낸 뒤에는 영어 공부와 포트폴리오 제작에 전념할 예정이다. 그의 활동에 관심을 보인 업체가 있긴 하지만, 9월 무렵에 시작하는 SS(봄/여름) 컬렉션 참가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사진만으로 밥 먹고 살기 쉽지 않다"는 그는 포토그래퍼로서 활동할 수 있는 물꼬가 트이지 않는다면 전공(화학공학)을 살려 취직할 생각이다.

"제가 4대 독자에 창원시 효자입니다(웃음). 사진 찍겠다고 설득하기 전까지 한 번도 부모님 속 썩인 적 없어요. 하지만 제게 맡겨진 가정의 업보가 너무 커서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돼요. 30살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 후에는 학교 졸업하고 취직하고 싶어요. 물론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긴 하죠."

진지하게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재원씨.
 진지하게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재원씨.
ⓒ 임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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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최종 목표는 '좋은 아빠'다. 자녀들이 조언을 구할 때 최대한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조언을 하고 싶단다. 그래서 그는 다양한 경험을 해왔다고 한다. 그는 스트리트 포토그래퍼를 그만두더라도 후회 없는 경험으로 간직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전 하고 싶은 일은 다 해봐야 하는 성격이에요. 호텔리어도 해봤고, 마케팅에도 관심을 가졌고, 자치 봉사 단체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죠. 나중에 아이들에게 '내가 먼저 해봤더니 이렇더라'라고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 줄 수 있는 아빠가 되고 싶어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스트리트 포토그래퍼, #이재원, #STREETPEACO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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