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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조사가 시작된 지 30분만인 오전 11시 20분경 수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혐의사실을 추궁하자 갑자기 "억"하며 책상 위로 쓰러졌다.'

전날 술을 마셔 갈증이 난다고 했을 때 냉수까지 가져다 준 친절한 경찰 조사관. 그가 박종철을 앞에 앉히고 조사를 하면서 책상을 턱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했다. 고문치사 하루 만에 나온 치안본부(현 경찰청) 사인규명 발표였다. 그러나 그 말을 곧이 믿는 사람은 없었다. 야당뿐만 아니라 보수 일간지마저도 경찰 발표 내용을 믿을 수 없다고 성토했다.

수세에 몰린 경찰 당국은 턱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수사 발표 며칠 뒤 수사관이었던 조아무개씨 등 2명을 구속하면서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숨진 사실을 시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진실은폐였다.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는 새로운 진실이 밝혀진다. 박종철 고문치사는 박처원 치안본부 5차장의 주도 아래 5명이 가담한 사건이며 구속된 2명의 수사관은 거액의 돈과 협박으로 죄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은 그렇게 세상에 드러났다.

앞뒤 맞지 않는 국정원 여직원 댓글 수사 발표

이광석 서울 수서경찰서장이 18일 오후 지난해 대선기간 발생한 국정원 직원 선거개입 의혹 사건 수사 결과 국정원 직원과 공범인 일반인을 국가정보원법 위반(정치개입) 혐의로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했다고 밝혔다.
▲ 경찰, 대선기간 '국정원 정치개입' 확인 이광석 서울 수서경찰서장이 18일 오후 지난해 대선기간 발생한 국정원 직원 선거개입 의혹 사건 수사 결과 국정원 직원과 공범인 일반인을 국가정보원법 위반(정치개입) 혐의로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했다고 밝혔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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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개입은 했지만 대선 개입은 아니다."

지난 18일 수서경찰서가 국정원 여직원 댓글 의혹 사건에 대해 국정원 직원 2명과 일반인 1명을 국정원법 위반 협의로 검찰에 기소하면서 밝힌 수사 내용이다. 비록 대선기간에 정치관련 글을 올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대선에 영향을 준 '공직선거법 위반'은 아니라고 본다는 게 경찰 측 설명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누리꾼들은 "'술은 마셨지만 음주 운전은 아니다'라는 우스갯소리와 다른 게 뭐냐"며 조롱에 가까운 반응을 쏟아내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조사발표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사건이 발생하고 5일, 대선을 불과 3일을 남겨 놓은 지난해 12월 16일 경찰 측은 "국정원 여직원 김씨의 노트북 등을 분석한 결과 대선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전무하다"는 수사 발표를 대선후보 마지막 TV토론회가 끝난 직후인 밤11시에 긴급하게 발표했다. 국민적 관심이 높은 사건이기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지체 없이 발표했다는 게 당시 경찰 측 해명이었지만, 숱한 의혹을 덮은 채 일방적으로 내놓은 수사 발표는 편파성을 의심받기에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대선 직전인 12월 16일 밤 11시에 이루어진 수사 발표는 또 다른 선거 개입이었고, 진실은폐와 왜곡이었던 셈이다.

정치 개입은 맞지만 대선 개입은 아니라는 경찰의 조사 발표. 이번에도 그래서 미덥지 못하다. 최소한 이번 발표가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얻으려면 두 번의 발표가 왜 서로 다른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대선 직전에 이루어진 졸속 발표에 대해 사과라도 있어야 마땅하다. 또한 수사 외압과 관련된 의구심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해야 마땅하다.

이런 해명이나 사과 없이 처음 발표 때는 무혐의에 가까운 발표를 하고 이제와 정치 개입은 맞지만 대선 개입은 아니라는 수사 발표는 또 다른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꼼수라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턱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궤변을 덮기 위해 수사관 2명에게만 죄를 미루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그 때를 떠올리면서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 수사 발표를 믿지 못하는 건 과연 필자만의 생각일까? 

특히,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으로 수사를 총괄했던 권은희 현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서울경찰청은 물론 경찰청까지 동원돼 수사 내내 부당한 개입이 이뤄졌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밝힌 내용만으로도 경찰의 수사 발표 내용은 용도 폐기해야 마땅하다.  대선 관련 78개 키워드를 발견했는데도 4개 키워드만 줄여 조사하도록 지시한 서울경찰청. 더욱이 국정원 여직원 김씨의 불법 선거운동을 떠올리게 하는 용어를 언론에 흘리지 말라고 주의를 전달했던 경찰 고위 관계자들의 행위는 변명의 여지없는 압력이고 명백한 범죄행위다.

대선을 며칠 앞둔 2012년 12월 11일 오후 국정원 직원이 인터넷 불법선거운동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서울 역삼동 한 오피스텔에서 국정원 직원이 문을 걸어 잠근 가운데 수서경찰서 권은희 수사과장이 브리핑을 하고 있다.
▲ 국정원 직원 오피스텔앞 권은희 수사과장 대선을 며칠 앞둔 2012년 12월 11일 오후 국정원 직원이 인터넷 불법선거운동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서울 역삼동 한 오피스텔에서 국정원 직원이 문을 걸어 잠근 가운데 수서경찰서 권은희 수사과장이 브리핑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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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합당 진선미 의원이 지난달 18일 폭로한 이른바 원세훈 원장의 '핵심적 지시 강조 사항'은 국정원 내부 게시판을 통해 전달된 광범위한 정치 개입·선거 개입 행위였다. 국정원이 여론 조작, 주요 국내 정치 현안에 적극 개입,  MB정부 국정운영 홍보, 4대강 사업에 실질적 개입을 진행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만들었다. 국정원 최고 권력자의 이런 정치개입과 선거 개입 행위와 말단 여직원의 댓글 사건을 과연 따로 놓고 볼 수 있을까?

국정원 여직원 개인이나 한 부서의 계획된 음모가 이 사건의 본질이 아니다. 또한 원세훈 국정원장의 지시사항이 단지 개인의 빗나간 충정의 발로만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정치 개입은 맞지만 선거 개입은 아니라는 경찰의 수사 발표는 국민들에게 의혹과 반감을 키울 뿐이다.

박종철을 물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던 전두환 정권. 광주민주화운동의 폭력진압자로 지목된 당시 내무부장관 정호용은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때릴 수 있느냐"며 고문을 부인했었다. 이는 진상규명과 책임지는 자세는 뒷전으로 미룬 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얄팍한 언변에 불과했다.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새누리당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70년대, 80년대에나 있을 법한 이런 이야기가 진행이 될 수 있느냐"며 진실이 드러날 경우 야당이 책임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은 새누리당 대선 캠프 박선규 대변인이었다.

아무 말이 없는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났다. 정보 최고책임자가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공공연하게 국내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여론을 호도했다는 사실이 경찰 발표로 드러났다. 선거 개입은 아니라고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부당한 개입의 흔적은 너무나 많다. 70~80년대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야당을 몰아붙이던 새누리당, 이제 결단이 필요하다. 드러난 일부의 진실만으로 이 사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다.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이틀 앞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2012년 12월 17일 오전 충남 천안 서북구 이마트 앞 유세에서 유권자와 지지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이틀 앞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2012년 12월 17일 오전 충남 천안 서북구 이마트 앞 유세에서 유권자와 지지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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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쌍한 여직원 결국 무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주당은 사과 한 마디 안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먼저라고 하더니 사람이 먼저가 아닌가 봐요. 인권유린에는 말이 없습니다."

지난 대선 직전인 12월 17일  박근혜 후보가 경찰 발표를 근거로 이 사건을 불법감금과 인권유린, 야당의 선거 공작으로 규정하며 발언했던 천안 유세의 일부분이다. 그 '불쌍한 여직원' 이 결국 정치 개입을 한 혐의로 국정원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국민들의 의혹에 대해 제대로 답해야 한다. 국정원 여직원과 국정원장 원세훈, 국정원장 원세훈과 이명박 대통령 사이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국민 눈높이에 맞춰 명명백백하게 가려내야 한다.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칼을 빼들지 않으면 안 될 위기다. 서둘러 덮고자 하는 사건은 결국 더 크게 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26년 전 역사가 가르쳐 준 교훈이다. 


태그:#국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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