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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군단', 사막을 움직이다

천둥 번개 할 때는 천하 사람이 한마음 한뜻이라고 침낭 안에서도 저마다 내뿜는 고뇌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번개의 빈도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숨을 길게 내뿜는 소리, 뒤척이는 소리, 점액처럼 끈적거리는 공포가 텐트 안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선배 몇 시야?"

이윽고 경숙이 입을 열었다. 초저녁부터 누웠지만 모두가 뜬 눈임을 그녀도 느낀 듯했다.  어둠 속에서 야광 시침을 살폈다.

"열두 시."

날을 꼬박 샜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열두 시(어디 기준시인지도 모른 채 그저 손목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였다. 번개는 여전했다. 대체 이러다 밤을 새는 건 아닐까 고민하다 까뭇 잠이 들었다.

어느새 아침. 모진 게 사람의 잠인가? 경숙에게 시간을 일러주고 나서 꽤 잔 셈이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차로 자리를 옮기지 않은 건 온전히 이 잠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누워 있고 싶었다. 잠들고 싶었다. 잠의 대가가 죽음이라 해도, 확률 때문이라면 그냥 그 확률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그 집착이 공포 속에서도 기어이 깊은 잠에 빠지게 했다.

아내는 간밤에, 집에 두고 온 통장과 보험증서들에 대해 생각했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동생에게라도 자세한 얘길 해두고 올 걸 하고.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이룬 것 없는 지난 삶과 그다지 이룰 것 같지 않은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못 이루더라도 좋으니 그냥 좀 더 세상을 살았으면 하는 소망과 함께.

염려가 무색하게 어느덧 날은 개어 있었고 별 방법 없이 누워만 있었던 탓에 피로까지 풀려 마음이 개운했다. 하지만 눈을 뜬 최 감독은 고통을 호소했다. 하루를 기다려보겠다던 약속을 지킬 수 없다 했다. 여길 하루라도 빨리 나가야겠다고, 자기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고립의 상황을 심리적으로 견뎌낼 수 없으니 어서 구조를 요청하자 했다.

찢어진 타이어에 옷가지와 잡동사니를 채워 공기를 대신하게 했다. 디엔비엔프 전투에서 베트남 자전거 보급대 '철마군단'이 했던 방법을 흉내냈다.
▲ 조난으로부터의 탈출 찢어진 타이어에 옷가지와 잡동사니를 채워 공기를 대신하게 했다. 디엔비엔프 전투에서 베트남 자전거 보급대 '철마군단'이 했던 방법을 흉내냈다.
ⓒ 오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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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했다. 비도 그쳤고 이제 느긋한 마음으로 지나가는 차를 기다려 보려 했는데 밤을 지내며 최 감독의 인내도 바닥난 듯했다. 그래도 아직 구조요청을 하기엔 일렀다. 아니 이르다기보단 이 상황을 '조난'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았다. 쓸 타이어가 없어 자의로 움직일 수 없으니 조난이 맞긴 맞지만 이곳을 지나는 단 한 대의 차만 만나도 해결될 상황이었다. 그냥 여정 중 사막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문제' 일 뿐이었다. 그런데 아무 대책도 없는 나약한 존재처럼 누군가에 구조를 요청하며 백기를 들고 싶지 않았다.

해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찢어진 타이어를 쇠막대로 벌리고 그 속에 옷가지를 채웠다. 1954년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당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군의 '철마군단' 전술을 모방한 것이다. 프랑스군 주둔지 '디엔비엔프'를 포위한 호치민군에게 보급품을 전달한 수단은 자전거였다. 그러나 산악지대에서 자꾸 펑크가 나는 바람에 진행이 원활하지 않았고, 병사들이 튜브에 자기 옷을 찢어 넣어 공기를 대신함으로써 무사히 보급을 진행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자동차에도 적용 가능할지 모른다 생각했다.

당장 입고 있는 옷을 제외하고 가용한 옷을 죄다 꺼내 타이어 안에 집어넣었다. 누구도 어리석다거나 실현가능성이 없다거나 하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만큼 서로의 마음이 절박했으리라. 겨우 네 사람의 옷만으로 타이어를 채우는데 한계가 있어 텐트 덮개부터 밀짚모자까지 당장 급하지 않은 모든 것을 넣어 완충재로 썼으나 타이어를 다 채울 수는 없었다.

옷을 넣은 타이어로 절뚝거리면서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간다. 드디와 고립과 이별하다.
▲ 고립과 이별 옷을 넣은 타이어로 절뚝거리면서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간다. 드디와 고립과 이별하다.
ⓒ 오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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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시동을 걸고 차를 움직였다. 바퀴가 절뚝거리며 땅에 깊은 궤적을 남기긴 했지만 더디게 이동이 가능했다. 실제 이런 상태로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싶은데, 이동 상태와 무관하게 차가 움직이는 순간 최 감독의 표정은 환하게 바뀌었다. 언제 고통을 호소했냐는 듯 세상 근심을 잊은 해맑은 표정이다. 덕분에 내 마음도 맑아졌다.

차체가 불안정하게 방아를 찧고 타이어 안에서 옷 타는 연기가 나고 있어 오래 가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당장의 문제는 해결했고 그 자체로 모두가 안정을 찾았다. 얼마나 갈 수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원할 때 가고 원할 때 설 수 있다는 것, 상황이 우리의 통제 아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아내와 경숙은 무게를 덜겠다며 도보로 이동하면서 조난 덕분에 사막을 제대로 느낄 수 있어 좋다고 희희낙락이다.

절뚝거리는 차의 무게를 덜어주겠다며 아내는 도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속 10Km나 될까말까한 자동차 속도였지만 그래도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아내를 계속 기다려야 했다.
▲ 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의 도보 횡단자? 절뚝거리는 차의 무게를 덜어주겠다며 아내는 도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속 10Km나 될까말까한 자동차 속도였지만 그래도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아내를 계속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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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과부는 넘어져도 꼭 가지밭에 엎어진다던가. 좋은 일은 꼭 쌍으로 다니는 것인지 어제 하루 종일 연결이 되지 않던 '일쿠르카(Ilkurlka) 로드하우스와 통화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은 혼자 로드하우스를 지키고 있으며 동종의 타이어 사이즈는 고사하고 자기 휠마저도 6홀이 아닌 5홀짜리여서 전혀 맞지 않는다 했다. 그래서 에어컴프레서만이라도 가져오도록 요청했는데 찾아본 후 기꺼이 그리 하겠다 한다.

일쿠르카 로드하우스에서 에어컴프레서를 가지고 출발한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기에 차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밥 끓여 꽁치김치 먹고, 지도 보며 향후 일정도 논의하고 낮잠도 잤다. 뭐가 되었든 조난 상황은 끝났다는 낙관이 우릴 편안케 했다. 오후 3시 30분. 통화가 된지 4시간이 되어가지만 일쿠르카에서 출발한 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다리는 것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일쿠르카 로드하우스와 위성전화로 연결이 되었다. 에어컴프레서를 가지고 우리에게 와 준다 하니 무리한 진행보다는 기다림을 택했다. 시간은 그렇게 낮게 머물다 천천히 흘러간다. 지루할 만큼.
▲ 다시 기다리기 일쿠르카 로드하우스와 위성전화로 연결이 되었다. 에어컴프레서를 가지고 우리에게 와 준다 하니 무리한 진행보다는 기다림을 택했다. 시간은 그렇게 낮게 머물다 천천히 흘러간다. 지루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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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에러컴프레서가 없어서 못 오는 것 아냐?' 하는 걱정이 일었다. '오늘도 그냥 여기서 야영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였다.

'우우우우~.'

어디서 기계 우는 소리가 났다. 분명 자동차 소리였다. 30시간 동안 간절히 기다리던 그 소리가 맞다.

"어느 방향이야 어디?"

모두가 뛰어나오며 자동차 지붕 위에 있는 최 감독에게 물었다.

"이쪽, 우리가 오던 방향!"

견시수처럼 뚫어지게 일쿠르카 방향을 응시하던 그가 반대쪽을 보며 외쳤다. 정말 차 두 대가 우리가 왔던 방향에서 올라오고 있다. 아, 나무둥치 하나에 의존해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구조선을 만났을 때의 심정이 이러하랴. 뛸 듯이 반가웠지만 냉정을 유지하며 점잖게 세워달라는 손짓을 했다. 반가운 나머지 사람들이 우루루 달려들기라도 하면 그들이 놀라 우릴 피해 달아날 수도 있다. 인적 없는 사막에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자기 차를 세우려드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구원군은 의외의 방향에서 나타났다. 일쿠르카에서 출발하겠다는 차량은 오지 않았고 우리가 지나온 길에서, 이틀 동안 구경할 수 없었던 다른 횡단자가 다가온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던 이가 배를 만났을 때의 심정이 이렇겠구나 싶었다.
▲ 구원군 구원군은 의외의 방향에서 나타났다. 일쿠르카에서 출발하겠다는 차량은 오지 않았고 우리가 지나온 길에서, 이틀 동안 구경할 수 없었던 다른 횡단자가 다가온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던 이가 배를 만났을 때의 심정이 이렇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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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에 대하여

멈춰선 픽업트럭 두 대에서 각각 노부부가 내렸다. 70대의 존(John)과 샘(Sam)은 친구끼리 부부동반으로 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을 횡단 중이란다. 맘씨 좋아 보이는 그들이 우리 상황을 이해하고 도왔다. 존 할아버지가 컴프레서와 타이어 수리키트를 꺼내 구멍 난 부위를 때웠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공기를 채우고 나니 때운 자리에서 미세하게 바람이 샜다. 오늘 하루야 어찌어찌 간다 해도 내일은 또 어쩔 것인가? 샘 할아버지가 다시 시도했지만 새는 건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나 역시 실패했다. 낭패다.

1시간 가까이 타이어 수리에 매달리다 샘 할아버지가 자기 차 타이어에 쓰는 튜브를 들고 나왔다. 우리 차는 튜브리스타이어지만 안에 튜브를 이식하고 공기를 채운다면 튜브타이어처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멋진 생각이었다.

'그런데 장비 없이 어떻게 저걸 집어넣는담' 하는데 이미 그들은 장비를 꺼내 림에서 타이어 분리를 시작했다. 해머를 내리쳤을 때 격자쇠가 튀어 얼굴을 다칠 뻔 하면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튜브를 넣으려 애썼다. 기어이 타이어를 벌리고 튜브를 넣는 데 성공했다.

타이어 펑크를 수리하는 일엔 실패했다. 손상부위가 커 공기가 미세하게 계속 샌다. 화물차용 타이어 튜브를 이식하기 위해 타이어를 림에서 분리하는 중.
▲ 고군분투 타이어 펑크를 수리하는 일엔 실패했다. 손상부위가 커 공기가 미세하게 계속 샌다. 화물차용 타이어 튜브를 이식하기 위해 타이어를 림에서 분리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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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나도록 고맙다. 외형적으로 그들이 내게 베푼 은혜라야 자신의 튜브를 하나 내 준 것과 길에서 흘린 두 시간 정도의 땀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낯모르는 인연에게 그들이 준 것은 생명과 꺾이지 않는 희망이었다.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만났더라도 튜브를 넣어 바퀴를 만들어 낼 경륜이 없었다면 우리의 여정은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아웃백에서 노년 캠퍼들을 접하면서 느낀 바였지만 오늘 우릴 도운 이들을 통해 더욱 강렬하게 삶의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오지탐험은 젊고 힘 있을 때가 아니면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지구의 깊은 곳을 다 돌아봐야 한다는 조바심 같은 게 있었다. 이제 이럴 수 있는 나이도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그런데 이곳 호주에서, '늙는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오지에서 마주친 캠퍼들 중 상당수는 노년층이었다. 그들은 늙고 힘없는 존재가 아니라 더 이상 바쁜 일상에 구애받지 않는 나이 많은 사람일 뿐이었다.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쓰며, 남이 아닌 자신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인생의 특수한 지층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었다. 활동적이고 자부심 강한 이 시기를 '핫 에이지(Hot Age)', '제3기 인생(The Third Age)'이라 부르기도 한다는데 그 말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무엇이라 부르든 나 또한 이 특수한 삶의 시기를 잘 누릴 용기를 얻었다. 낯 선 공간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을 나이 탓으로 돌리기도 했지만 실은 익숙지 않은 공간,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 자체가 문제였을 뿐이다. 나를 움찔거리게 하는 건 나이가 아니라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마음과 경험 없음이다. 젊은 시절 사막을 지나 본 이는 70이 넘어서도 사막을 넘을 것이다. 그러다 어려움에 처한 젊은이를 보면 도움을 주기도 하겠지.

이들과 같다면 지금으로부터 30년 뒤의 나도 사륜구동에 몸을 얹고 지구 어느 사막인가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삶에 진지하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겠지. 나이를 이유로 갑자기 좋아지거나 망가지지 않은 채. 늙는다는 것, 두렵고 긴장되는 과정이긴 해도 그게 모든 것의 끝은 아닐 것 같다.

호주 아웃백을 여행하며, 특히 이들을 보며 늙음에 대한 내 조급함이 다소 풀렸다. 30년 뒤의 나도 여전히 사막을 지나는 사륜구동의 운전석에 앉아 있을 것이다. 우측에서 두 번째 사람은 일쿠르카로부터 늦게 합류한 그래엄.
▲ 잊지 못할 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의 한 때를 위하여 호주 아웃백을 여행하며, 특히 이들을 보며 늙음에 대한 내 조급함이 다소 풀렸다. 30년 뒤의 나도 여전히 사막을 지나는 사륜구동의 운전석에 앉아 있을 것이다. 우측에서 두 번째 사람은 일쿠르카로부터 늦게 합류한 그래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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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가 훨씬 넘어 수리가 끝나갈 무렵 일쿠르카에서 출발한 차가 도착했다. 오로지 우릴 돕기 위해 에어컴프레서 하나 들고 사막길 130Km를 달려왔다. 수치상으로는 서울-대전 거리도 안 되는 거리지만 패이고 깎인 비포장에선 여간한 의지 없이 어려운 길이다. 가슴에서 뜨겁고 아릿한 무엇인가가 울컥했다.

사막에서 느끼는 동지애랄까. 이역만리 타향에서 느끼는 인류애랄까. 나라도 이런 상황이었으면 그 길을 달려갔을 것이다. 인생의 어느 한 때 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에서 뜨거운 동지애를 느꼈던 사람끼리 단체 사진을 한 장 박았다. 샘과 존 부부, 로드하우스를 지켰던 그래엄(Graham), 큰 도움을 받은 우리, 이 모두에게 오늘 이 장면은 삶을 마칠 때까지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샘과 존 부부와 일쿠르카에서 야영을 하며 더 긴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그들은 해가 지기 전 이 근처에서 야영하겠단다.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그래엄을 따라 일쿠르카로 향하는 내내 최 감독 얼굴에 희색이 가득하다. 만약 일쿠르카와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거나 지나가는 차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쨌을 것 같냐 물었다.

"날이 개고 차가 움직이는 순간 고통과 공포는 사라졌어요. 하루에 단 10Km씩만 움직일 수 있다 해도 걱정은 없었을 겁니다."

그도 나처럼 자유의지의 속박을 고통스러워 하나보다. 효율과 이익의 정도를 떠나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두렵다. 

사막의 오아시스 '일쿠르카'

늦은 저녁 일쿠르카 로드하우스에 도착했다. 쿠버피디를 떠나면서부터 입에서 그 이름이 떠나지 않았던 곳이고 조난 때에도 그토록 간절히 그리워했던 곳인데 너른 캠핑그라운드에 컨테이너 같은 오두막이 전부다. 엄밀히는 조촐한 가게와 빗물을 받아놓은 물통. 주유기 하나가 더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1300Km가 넘는 사막 구간에서 물과 기름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에 그 존재감은 오아시스도시 그 이상이다.

캠핑그라운드와 아주 작은 가게, 주유기를 갖춘 로드하우스이지만 인적 없는 1300Km 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 횡단 루트에서 유일하게 기름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3개월 단위로 자원봉사자 한 명이 돌아가며 상주한다. 어둠 속에 도착했을 땐 이렇게 작은 줄 몰랐다.
▲ 사막의 오아시스 '일쿠르카' 로드하우스 캠핑그라운드와 아주 작은 가게, 주유기를 갖춘 로드하우스이지만 인적 없는 1300Km 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 횡단 루트에서 유일하게 기름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3개월 단위로 자원봉사자 한 명이 돌아가며 상주한다. 어둠 속에 도착했을 땐 이렇게 작은 줄 몰랐다.
ⓒ 오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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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 커뮤니티에서 2004년에 문을 연 이곳은 3개월 단위로 근무하는 자원봉사자에 의해  운영된다. 그래엄도 그 중 하나로 가공식품 약간과 애보리진 그림들을 판매하고 연료를 제공(월~금 8시부터 5시까지)하며 혼자 이곳을 지키고 있다. 조난 때 그토록 전화연결이 되지 않았던 것도 혼자였기 때문이다.

시설 관리를 하노라면 옥외에 있는 시간이 많을 것이고 어차피 인적이 없는 곳이니 전화기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것이다. 쿠버피디에서 출발하기 전 일쿠르카에 연료재고를 문의하려 했지만 그 때도 통화가 되지 않아 그냥 길을 나섰던 것인데 대량의 연료가 필요한 그룹횡단의 경우는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엄과 대화를 나누고 캔음료를 구입했다. 그리고 꼭 필요한 에어컴프레서를 사려는데 보이질 않았다. 그도 재고유무를 몰라 창고를 한참 뒤진 후에야 하나 남은 에어컴프레서를 들고 나왔다. 다행이다. 아직도 갈 길이 구만 리인데 예비타이어 없는 차가 에어컴프레서도 없이 움직이는 것은 조난을 예약하는 꼴이니 에어컴프레서 구입은 그저 '다행'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사였다.

약간의 사막 횡단 필수품과 애보리진(원주민) 그림을 판매한다. 친절한 그래엄. 실질적인 도움은 아니었더라도 일쿠르카의 존재가, 그리고 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가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 일쿠르카 로드하우스의 내부 약간의 사막 횡단 필수품과 애보리진(원주민) 그림을 판매한다. 친절한 그래엄. 실질적인 도움은 아니었더라도 일쿠르카의 존재가, 그리고 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가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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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고마운 사람이다. 도울 수 있는 뾰족한 방법도 없으면서 그 먼 길을 달려와 주었고 내 일처럼 걱정하며 에어컴프레서를 찾아냈다. 우릴 찾으러 와준 것에 대한 답례로 수고비를 주려 하였으나 한사코 사양하며 자기가 움직인 연료비만 달란다. 십만 원어치. 만약 그렇게까지 수고비를 줘야한다면 천만 원을 주고, 그게 싫다면 십만 원이어야 한다며 단호하다. 게다가 새벽에 떠날지 모르는 우리 일정 때문에 한밤중에 발전기를 돌려 주유까지 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분명 5시까지가 주유 가능시간이라 쓰여 있음에도.

주유를 하며 계산해보니 쿠버피디에서 일쿠르카 로드하우스까지 800Km를 이동하는데 124리터의 경유를 사용했다. 험지치고 그나마 괜찮은 연비다. 로드하우스가 아니었다면 남은 40리터의 연료로는 나머지 구간 570여 Km를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쿠버피디에서 리터당 1.35달러였던 기름이 여기선 2.45달러로 두 배 가까이 비싸지만 제리캔 5개 분량의 연료를 지고 오는 무게와 공간을 따져보면 그래도 싼 비용이다. 이 광막한 사막에서 일쿠르카 로드하우스가 차지하고 있는 역할은 결코 작지 않은 셈이다.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가 그리워진다.
▲ 별이 빛나는 밤에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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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그라운드에 텐트를 쳤는데 어쩐지 밤이 푸근하게 느껴졌다, 유독. 어려움이 그쳐서일까? 아니면 저쪽 가까운 곳에 그래엄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일까? 오롯이 외로울 수 있어 행복했던 사막이 더 이상 외롭지 않아 행복하다니. 사막에서 겪은 고립상황이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가 보다. 예비타이어 없이 헤쳐가야 할 길이 남아있지만 당장은 근심걱정 없이 별 아래 누웠다.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 않는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가 그리워지는 별이 빛나는 밤이다. 작은 텐트의 방수포는 타이어 속으로 들어가 있는 터라 텐트 한 동에 네 사람이 같이 누워 있는 그런 밤.


태그:#호주 아웃백, #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 #자동차 여행, #일쿠르카 로드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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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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