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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하늘 (2011년)
 길 위의 하늘 (2011년)
ⓒ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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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61) 화가는 제주의 자연, 제주 사람, 그리고 제주4.3항쟁을 그리는 제주의 화가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그 이는 서울에서 이십 년을 보내고 나이 마흔에 귀향하여 올해로 스물 두 해째 살고 있다. 제주가 낳은 화가 강요배, 아마 생소한 이름으로 다가온 사람이 많을 거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마주한 사람들은 누구나 제주도에 빠지듯 그만 푹 빠져들게 된다. 오히려 이 화가에 대해 미처 모르고 그의 그림들과 마주해도 좋을 것 같다. 제주도를 처음 여행할 때의 마음으로 한껏 가슴 두근거리며 서울 소격동 학고재 미술관엘 가보아도 좋겠다.

"하루 중 해 뜰 녘 무렵의 어스름한 풍경을 좋아합니다. 시골이라 이 때 보는 빛의 파장이 아주 살아있어 보이죠. 나는 관찰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진을 찍듯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머리에 장면들을 저장해 두었다가 느낌이 들면 붓을 듭니다."

그가 제주의 자연을 온 몸으로 느낀 감성은 화폭에 그대로 반영된다. <산책>에서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가장 어두운 숲 그리고 가장 탁하고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도시인들에게는 가장 음산하게 느껴지는 늪을 찾는다. 그곳에는 힘이, 자연의 정수가 존재한다" 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삶을 보더라도 자연은 언제나 인간에게 특히 예술가에겐 사유와 영감을 전해주는 존재인 듯싶다.

샛별 (2010년)
 샛별 (2010년)
ⓒ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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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바다 (2012년)
 명주바다 (2012년)
ⓒ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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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 정말 제주도에 처음 갔을 때처럼 아주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 <명주바다>, <길 위의 하늘>, <월아사>, <바위 틈 문주란>, <물돌>, <샛별>, <적벽>.... 그가 그린 제주의 자연은 이제까지 내가 보아온 제주, 내 머릿속에 있던 제주의 이미지와 너무도 달랐다. 형식 자체도 여느 풍경 화가들의 그것과 달랐다. 1980년대 <현실과 발언>의 멤버로 화가가 활동했던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자생적으로 탄생한 민중미술의 예술적 본질과 진수를 보는 것 같았다.

갤러리 초입부터 그림들이 관람객의 발길과 눈길을 담박에 붙잡는다. 가장 제주다운 풍경이 아닐까 싶은 먹장구름이 아주 인상적인 작품 <길 위의 하늘>이 그것. 짙게 드리워진 새벽의 어둠을 서서히 걷어내며 환하게 동이 터오는 순간, 화가는 이 찰나의 아름다움을 가슴속에 깊게 담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숱한 날들 밤을 지새우며 먼동이 트기를 기다렸을까.

전시회도 화가도 많이 알려지지 않아 관람객이 적었는데 그래서 오롯이 그림 감상에 몰입할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넓은 벽면 한쪽을 다 차지하는 커다란 제주의 자연 <파도와 총석>을 홀로 독대하게 되는 벅찬 순간이 생기기도 한다. 총석은 주상절리를 뜻하는 말로 불의 몸이 바다와 맞붙어서 발끈한 돌기둥이다. 중문해변을 따라 기립한 총석들은 제주가 불의 탄생지요, 신화지라는 것을 상징한다.

파도와 총석 (2011년)
 파도와 총석 (2011년)
ⓒ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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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바다에서 달려온 거친 파도가 거대한 절벽과 부딪치며 산산이 부서지는 물보라, 하얗게 흩뿌려지는 물살의 생동감에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다. 화가의 에너지 넘치는 붓바람에서 탄생한 그림이 더욱 가슴 벅차게 다가올 것이다. 웅장하지만 지나치지 않게 느껴지는 건 지난 20년간 제주의 자연을 담담하게 그려온 작가의 소박한 심성과 닮았다.

"옛날 어른들이 했던 말은 상당히 그 미학적이야. 그러니까 시선이 다르잖아요, 우리하고. 랜드마크를 보는 방법이 달라요. '한라산' 하면은 그 '한'은 '은하수 한' 자거든요? '라'는 '손 벌려서 붙잡는다'는 거고. 은하수를 손으로 이렇~게 잡는 산이라는 거지. 완전히 환타지지. 하하하!"

월아사(月芽沙) - '달의 싹'이란 뜻 (2010년)
 월아사(月芽沙) - '달의 싹'이란 뜻 (2010년)
ⓒ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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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아직 한라산의 환타지를 그려 내지는 못했지만, <월아사(月芽沙)>라는 작품으로 달의 환타지를 구현해냈다. 흰 달무리가 고여서 푸른 물결로 일렁이는 달의 싹을 그린 그림이다. 물에 어리고 물에 그림자지고 물에 잠기고 물에 심어져서 달의 씨앗이 싹트는 풍경. 달의 싹이라는 것은 그 모양새가 씨앗 같은 초승달이기에 상상되어 졌을 것이다.

제목과 그림에서 풍부한 상상력과 순수함이 신비로운 달빛 세상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그런 느낌은 에메랄드빛 혹은 부드러운 쪽빛바다를 그린 <명주바다>에서도 마찬가지. 곱디고운 비단결 같은 잔잔한 바다를 수놓듯 그려놓아 그 푸른빛을 한없이 응시하게 한다. 명주는 빛이 고운 아름다운 구슬이니 명주바다는 빛구슬의 바다이다. 다른 그림들과 달리 오직 맑고 푸른 바다만을 보여준다. 푸르고 푸르러서 시리고 아리다가도 불현 듯 포근해지는 따듯한 바다의 물결. 나도 작가처럼 바다와 나란히 앉아서 또는 나란히 서서 저풍경을 마주하고 싶어졌다. 

이처럼 그림 하나 하나가 육지인의 눈에는 포착되지 않고 제주에 뿌리내리고 사는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제주의 표정들이었고 거기에 사는 제주인의 체취가 느껴졌다. 그것은 제주의 풍광이 아니라 제주의 자연이었다. 제주의 바람과 땅과 하늘이 그림이 되었다.

적벽 (2010년)
 적벽 (2010년)
ⓒ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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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숲 너머로 커다랗고 둥그런 하얀 달이 걸쳐 있는 모습 <적벽>은 화가가 한라산 서북벽 너머로 달이 뜨는 풍경을 관찰하며 그린 그림이라 한다. 우뚝우뚝 솟은 기암절벽을 붉게 물들였던 노을이 가시는 찰나 은은한 빛을 머금은 달이 두둥실 떠오르는 순간... 조용한 미술관이지만 마음껏 소리 내어 감탄하고 싶었다. 묵직하고 느릿하고 야성적인 색채에 제주의 거친 바람이 느껴지는 그림들이 이어진다. 역시 제주는 자연이 가진 질감, 기세, 역동성이 살아있는 곳이다.

작가는 오랜 기다림과 인고 끝에 제주의 자연을 마음의 풍경으로 환치시켜가고 있다.

한때 천착했던 역사성을 접어둔 채 내면으로 눈을 돌려 세파에 시달리는 삶을 어루만지려 한다. 이를테면 자연풍경을 내면세계에 조용히 공명시키는 셈이다.

'제주 남자' 강요배에게 우리 현대사의 비극 4.3항쟁은 떼어 놓을 수 없다. 1992년 제주 4.3항쟁을 다룬 '제주민중항쟁사'연작을 내놓은 그는 민중미술작가로 급부상했다. 제주출신으로 온몸으로 체득한 '제주의 한'을 풀어낸 이 그림은 '제주의 역사화'로 자리매김 되어있다. 지금도 매년 4월 3일이면 제사를 올리는 마음으로 제주항쟁에 대한 그림을 한 점씩 그린다는 그에게 4.3항쟁은 그의 독특한 이름으로 각인된 슬픈 역사다.

"4.3 항쟁당시 토벌대가 이름을 불러서 돌아보면 죽어갔던 사람들을 보며 아버지는 생각했죠. 쉽게 부를수 없는 이름을 짓자. 그래서 형은 거배, 나는 요배라는 이름을 달게 됐지요."

이제는 우리 자연이 곧 민중의 삶의 터전이며 자연을 다루면서도 인간에 대해 무언가 말할 수 있겠다고 한다.

"제 그림은 자연과 인간에 대해 말하는 거예요. 흔히 사람들이 '파도가 춤춘다'고 하죠? 자연을 말할 때 사람을 빌려 표현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자연의 모습으로 인간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위 틈 문주란 (2012년)
 바위 틈 문주란 (2012년)
ⓒ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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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ㅇ 학고재 미술관 : 서울 종로구 소격동 70번지
ㅇ 관람일시 : 4월 21일까지 (오전 10시 ~ 오후 07시)
ㅇ 관람문의 : 02-720-1524~6



태그:#강요배, #제주도,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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