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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탄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1928년 신의주 학생의거 주역이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 비서실장을 지냈다가 지난 8일 별세한 구익균 선생(향년 105새)이 국립묘지에 안장 되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경향신문>등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국가보훈처 안장심의위원회에서 심의를 열어 국립묘지법 및 국립묘지안장대상심의위원회 운영규정 등에 따라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국가보훈처는 10일 공식트위터(@hun2day)를 통해 "독립운동가 고 구익균 선생님의 명복을 기원합니다"면서 "국립묘지안장대상심의위원회는 최근사례, 안장심의기준, 구제기준 등을 면밀하게 검토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안장 비대상으로 결정할 수 밖에 없었음을 알려드립니다"고했습니다.

구 선생은 지난 1972년 사문서위조 및 동행사 혐의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1973년 조세범처벌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판결받았습니다. 참고로, 지난 해 2월 17일 개정된 국립묘지법 제79조 1항 1호부터 4호에 보면 '한국 국적을 상실한 자', '탄핵이나 징계처분에 따라 파면 또는 해임된 자', 안장대상심의위원회가 '국립묘지의 영예를 훼손한다'고 인정한 자' 등은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수 없습니다.

구 선생은 1908년 2월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습니다. 1928년 신의주고보 재학중 항일지 '신우'를 펴냈고, 그해 신의주학생의거를 주도했다가 상하이로 망명합니다. 1929년 김구 선생 한국독립당과 도산 안창호 선생 흥사단 운동에 참여하면서 29년부터 32년까지 도산 비서실장으로 활동합니다. 독립 후 1947년 귀국해 김구 선생 등과 통일독립촉진회 운영, 1952년 진보당 비공식 재정위원, 1961년 5.16군사반란때 '용공인사'로 체포되어 1년간 옥살이를 합니다. 67년 통일사회당을 재창당합니다.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습니다.

이런 분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것입니다. 선조들이 통곡할 일입니다. 구익균 선생 막내딸인 구혜란씨는 10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아버님의 평생을 한국의 독립으로부터 시작을 하여 한국이 어떻게 평화통일까지 항상 염원하고 계시는 저희 아버님의 돌아가신, 그 몸은 어디 갈 곳이 없다"면서 "대한민국이 그렇게 작은 데인지 몰랐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묻힐 곳이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민변 이재화 변호사(@jhohmylaw)는 "구익균 선생에 대한 국립현충원 묘지 안장 거부는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것이자 독립운동가 유족에 대한 모욕이다"고 분노했습니다. 누리꾼들도 분노했습니다.

@eco는 "독립운동가 구익균 선생의 국립묘지 안장 거부. 친일 독재 세력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입증. 민주화도, 공공성도, 시민권도 모두 취약한 상태"라며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허상을 버리고 공고한 민주화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bul****** 역시 "쿠데타 주역 안현태에겐 '국립묘지' 주고, 독립유공자 구익균 선생은 내치는 정부 - 대통령이 역사 거꾸로 돌리기를 하니 모든 걸 거꾸로 세우려나"고 탄식했습니다.

누리꾼들이 특히 분노한 이유는 독립운동가는 전과자란 이유로 안장을 거부하면서 친일파와 쿠데타 주역들은 안장됐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1년 9월, '5.18단체'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등재자 중 국립묘지 안장자는 무려 76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일본군 또는 만주군 장교를 지냈던 이들이 50명, 반민족행위자 14명,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서훈이 취소된 10명도 국립현충원에 안장 됐습니다.

이들 중 김창룡과 안현태가 있습니다. 김창룡은 일본 헌병 오장(伍長) 출신으로 독재자 이승만 '앞잡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창룡은 1940년 관동군 소속 헌병보조원으로 훈련받아 헌병으로 활동하면서 조선독립군을 체포한 악질 친일파입니다. 해방 정국에서 군부내 좌익색출에도 활약합니다. 1949년 6월 김구 선생 암살 배후로도 지목받고 있습니다.

특무대장으로 활동할 때는 '동해안 반란사건'(1955년), '국가원수 암살미수사건' 등 각종 정치사건을 조작하거나 과대포장했습니다. 심지어 국방부장관과 참모총장까지 제거하려다가 1956년 1월 31일 허태영 대령 등이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이승만은 이런 자를 끝까지 생각했습니다. 김구 선생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김창룡 장례식에는 참석한 것입니다.

전두환 경호실장이었던 안현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전두환 경호실장만이었다면 국립현충원에 묻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회 출신이자, 육사 17기로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 반란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경호실장으로 있으면서 비자금 조성과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1997년 대법원에서 징역 2년6월 실형을 살았습니다.

뇌물죄를 받고 실형을 살았지만, 국가보훈처는 그가 지난 2011년 6월 숨지자 국립묘지에 안장시켰습니다. 뇌물죄 받은 쿠데타 세력은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구익균 선생은 사문서위조죄로 옥살이를 했다며 안장을 거부했습니다. 이게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입니다.

구익균 선생은 살았을 적인 지난 2010년 <주간조선>(2010.04.19 2101호)와 인터뷰에서 이승만 정권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이승만이 오라고 했을 때 내가 갔더라면 그 흔한 장관도 주고 했을 거지만. (내가) 이승만을 좋아하지 않아 안 갔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에 대한 평가 역시 "잘한 것보다 잘못한 게 더 많다"고 했습니다. 독립운동가로서 독재자와 함께 할 수 없었던 그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친일세력들과 쿠데타 세력은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구익균 선생 거부되는 모습은 아직 우리가 친일청산과 독재 청산을 완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방증입니다. 국가보훈처는 재심의를 했어라도 구익균 선생을 국립묘지에 안장해야 합니다.


태그:#구익균, #국립묘지, #친일파, #김창룡, #안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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