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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묘하게도 나는 어디론가 운전하며 드라이브하는 꿈을 자주 꾸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참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계를 특별히 좋아하거나 차를 갖고 싶은 '뜨거운' 욕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도 자주 운전과 관련된 꿈을 꾸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처럼 꿈도 꿀 정도 였다면 실제 운전도 빨리했을 것 같은데 그 역시 아니었다. 처음 면허를 딴 때가 1993년이었는데 사실 그 역시도 당시 대학 동기가 운전학원 강사로 있어, 그 친구의 '꼼수' 덕분에 '코스 시험'을 통과했음을 이제와서 고백한다. 하지만 그렇게 1종 보통면허를 따고도 나는 막상 차 운전이 두려워 또 몇 년 동안 '장롱 면허'로 그냥 보냈다. 어려서부터 손으로 뭔가를 하는 재주가 없었던 내가 사고를 낼까 두려워 차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내가 결국 10년이나 된 큰 형님의 낡은 차를 넘겨받아 처음 운전을 시작한 것은 둘째 아이가 돌을 맞이하던 1999년 12월의 일이었다. 아이 하나는 어찌해 보겠는데 아이를 둘씩이나 데리고 강원도 처가까지 가는 것은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아내와 내가 각각 아이를 하나씩 데리고 가면서 또 어깨와 손에는 한 보따리 짐을 들고 메고 다니니 그 불편과 노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번 그렇게 힘든 여행을 다녀오면 평소엔 그렇게 '순한 양'이었던 아내가 "운전도 못 하는 뚜벅이 신세"를 한탄하며 남편인 나를 노려보면, '참담한 심경'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더구나 '밀레니엄' 운운하며 떠들썩한 2000년대를 앞둔 상황에서 '면허증은 있되, 운전은 못 해' 구박당하며 사는 것은 내가 생각해봐도 아닌 듯했다.

때마침 그런 상황에서 큰 형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차를 바꾸려고 하는데 이왕이면 동생을 주고 싶다"며 "필요하면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말해 무엇하랴. 반가운 마음에 덥석 받은 것은 물론이다. 마침내 어려서부터 꿈속에서 그려온 '운전하는 남자'가 된 것이다.

초보가 할 수 있는 개그 모음, 다했다

시동을 걸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인지조차 가물했다. 오래된 것도 있었고, 낯선 차라서 더욱 그랬다. '낮엔 초보, 밤엔 The 초보'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초보운전 차.
 시동을 걸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인지조차 가물했다. 오래된 것도 있었고, 낯선 차라서 더욱 그랬다. '낮엔 초보, 밤엔 The 초보'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초보운전 차.
ⓒ 조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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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인수하러 간 날, 큰 형님은 연신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며 말했다. "너 정말 운전할 줄 아냐?" 면허 딴 날 마지막으로 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그로부터 6년 만에 운전을 하는 것인데 솔직히 말했다가는 아무래도 차를 다시 뺏어갈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무작정 "취미가 운전인데 그동안 차가 없어 사실은 렌터카 빌려서 탔다"고 말해 버렸다. 그제야 큰 형님은 불안감을 떨치고 나에게 키를 넘겨줬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시동을 걸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인지조차 가물했다. 오래된 것도 있었고, 낯선 차라서 더욱 그랬다. 그런 당황스러움을 느꼈는지 큰 형님이 다가서며 다시 나의 행동거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거 어쩌지' 하며 불안해하던 순간, 천만다행인 상황이 벌어졌다. 사업하는 큰 형님의 휴대폰 벨이 울린 것이다. 그러더니 지금은 무슨 일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미안하다고 하면서 "빨리 회사로 들어가 봐야겠다"고 한 후 황급히 떠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고마울 때가. 누가 전화한 것인지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그 후 어찌 어찌하여 시동을 건 후 성남에서부터 당시 살던 안산까지 정신없이 차를 끌고 오면서 내가 흘린 진땀은 정말 '한 바가지' 수준이었다. 특히나 출발하자마자 성남 수진리 고갯길에서 신호에 걸린 순간은 지금도 잊지 못하겠다. 유난히 고갯길이 많은 성남에서 당시 수진리 고개는 그중에서도 으뜸이었다. 그런데 당시 큰 형님이 줬던 차가 자동변속기가 아닌 기어 차량이었는데 아무래도 섰다가 다시 출발하면서 뒤로 '확' 미끄러질 것 같은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아 돌았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 뒷 차는 왜 그렇게 바짝 내 차 꽁무니에 붙어있는지 환장할 뻔했다.

그때 나의 행동을 본 뒤 차 운전자의 황당해하는 모습은, 그래서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기억이다. 뒤를 돌아보고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나는 뒤 차 운전자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손짓으로 뒷 차 운전자에게 뒤로 좀 떨어지라고 했다. 하지만 그 운전자는 그냥 나를 '미친 놈'으로 여긴 듯하다.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하고 "저게 왜 저래"라는 표정, 딱 미치는 줄 알았다. 결국, 이제 살아남을 방법은 하나였다. '절대' 미끄러지지 말고 무조건 앞으로 나가는 방법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머릿속으로 출발 순서를 계속 되풀이했다. 1단 기어 넣고 브레이크에 발을 떼면서 동시에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으면서 클러치를 놓는다. 이러한 순서에 빈틈이 있으면 안 된다. 안 된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앞으로 가라는 녹색 신호등이 들어왔고, 모든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르릉'. 우려했던 악몽과 달리 차는 앞으로 달렸다. 뒤 차와의 충돌은 없었다. 아! 그 행복감. 어쩌면 그날의 그 운전이 내 인생에서 '첫 운전'이었는지 모른다.

한편 사고 없이 천만다행으로 집까지 차를 가져온 이후 나는 자동차 연수를 신청하여 본격적으로 운전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약 5일에 걸쳐 연수를 해보니 조금씩 자신감도 붙었다. 이제 운전이 재미있고 신 나기 시작했다. 마치 당구를 처음 칠 때 방에 누우면 천장이 당구대로 보이는 것처럼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 물론 그러면서  초보가 할 수 있는 모든 '아마추어적' 행동은 다 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연수를 받고 난 얼마 후였다. 그날 비가 왔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자동차 와이퍼를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제야 내가 운전 연수를 받은 날은 모두 비가 오지 않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을 알기 어려웠다. 차 여기저기에 버튼을 눌러봐도 와이퍼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운전 강사에게 전화하여 와이퍼 작동을 물어봤고, 그는 정말 미안해하면서 자신이 알려줘야 할 내용인데 실수였다며 '라이트 켜는 법'은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다행히 그건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웃기는 초보였다.

'4중 추돌사고'... 다짜고짜 화 내던 운전자의 잘못 

이렇게 병아리 '초보' 생활이 3년 지나가던 2002년 어느 날이었다. 마침내 나는 대형 사고를 일으켰고 또 당했다. 이른바 고속도로에서의 '4중 추돌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당시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여 저녁 퇴근 후 급히 차를 몰아 병문안을 가던 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했다. 평소와 다르게 나도 그렇고 주변의 차 흐름 역시 불안한 느낌이 들었던 그날이었다. 그러더니 결국 서울 외곽 고속도로에서 앞서 가던 차가 급정거를 했고, 나 역시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다행히 내 차와 앞 차는 아주 미세한 차이를 두고 간신히 멈췄다. "휴, 다행이다"라고 생각한 바로 그때였다.

'꽝'

뒤 차가 나를 들이받는 파열음이 묵직하게 들렸다. 그러면서 그 충격으로 밀린 내 차가 앞차를 '꽝'. 이게 뭔 일인가 싶었던 그 순간 또 다시 '꽝꽝'. 무려 '4중 추돌 사고'가 일어나던 순간이었다. 솔직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잘 몰랐다. 그리고 이 사고가 누구의 잘못인지에 대해서도 판단이 서지 않은 가운데 그냥 "아, 이거 큰일 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저 다 '내 잘못인 것처럼만' 느껴졌다. 일단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앞차로 조심스레 다가가는데 마침 그 차주도 내리는 것이 보였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난감해하는 순간 고맙게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확실히 봤는데 아저씨가 저를 받은 것이 아니고 저 뒷 차가 아저씨 차를 받으면서 그 충격으로 제 차를 받았거든요. 그러니까 경찰에게도 제가 그렇게 말할 테니까 아저씨도 그렇게 말씀하세요."

걱정했는데 앞차가 그렇게 말해주니 솔직히 고마웠다. 그래서 연신 고맙다고 인사한 후 이번엔 뒤차로 가봤다. 이럴 수가. 뒤차 운전자는 여성인데 어디를 크게 다쳤는지 머리를 핸들에 박은 채 그대로 있는 것 아닌가. 지금은 뒤차가 박으면 내 잘못이 아닌 줄 알지만, 그때는 솔직히 다 내 잘못인 것 같아 막연히 '이거 큰일 났다' 싶었다. 그런데 더 환장할 일은 따로 있었다. 잠시 후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20대 중반의 남자가 잔뜩 흥분하여 뛰어 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는 "내 차를 어떻게 할 거냐"며 마구 화를 내는 것 아닌가. 알고 보니 그는 4중 추돌 사고의 마지막 주인공, 1톤 트럭의 운전자였다. '저 사람 성질을 보니 합의도 어렵겠구나!' 싶어 또 절망했다.

그리고 잠시 후, 경찰차가 도착했다. 결론은 웃겼다. 다 내 잘못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앞에 있던 1차량과 뒤차 충격으로 앞차를 추돌한 나를 제외한 나머지 3차량과 4차량의 잘못으로 처리된 것이다. 이유는 '안전거리 미확보'.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노발대발하며 성질을 부렸던 4차량 트럭 운전사는 3차량에 대한 보상뿐만 아니라 자기 차 역시 자기가 수리해야 하는 완벽하게 잘못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보험도 들지 않은 무면허 운전인 사실이 드러나 불구속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웃기는 운전자였다. 그야말로 괜히 쫄았다.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찌른 경찰관, 왜?

그로부터 며칠 후. 교통경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제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하니 교통 순찰대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방문한 날, 사고 당사자 모두가 모여 이러 저러한 진술서를 쓰고 도장을 찍으며 분주한 그때였다. 갑자기 담당 경찰이 나를 찾더니 "잠깐만 밖에서 좀 보자"는 것이었다. 순간 무슨 일인가 싶어 복도로 따라나간 순간 낯선 느낌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내 옆구리를 경찰관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찌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던진 한마디.

"아이, 선생님. 그냥 가시려고 하면 안 되시죠. 피해 차량으로 끝나셨는데 밥이라도 한 끼 사셔야죠."

황당. 그야말로 '이거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노골적이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요구하는 그 경찰관의 행동거지에 순간 속으로 당황해 하다가 '뭐, 그러시죠'라고 승낙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그럼 뭘 먹을까요"라고 물었고 나 역시 "뭐 저는 이곳을 모르니 아시는 곳으로 가시죠" 라고 답했다. 잠시 후. 그 경찰관이 안내하여 찾아간 곳은 그 동네에서 가장 비싼 한우 등심 집이었다.

속으로 '헐' 소리가 절로 나왔다. 더 웃기는 일은 그가 자신 말고도 또 다른 동료 경찰관을 두 명이나 더 데리고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4명이 앉아 식사를 시키는데 그는 나에게 묻지도 않고 메뉴 중 가장 비싼 '한우 등심'을 5인분이나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비싼 고기를 아주 크게 썰어 맛나게 먹던 그는 이내 없어진 고기를 본 후 "좀 부족 하시죠"라고 운만 한번 뗀 후 다시 제멋대로 3인분을 추가하는 것 아닌가. 그야말로 '억' 소리와 함께 '뭐 세상 살면서 이런 일도 있겠지' 싶었던 처음 마음은 사라지고 서서히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그의 뻔뻔한 행동을 보니 지금 내가 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료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에게 의례적인 투로 권할 뿐 사실상 경찰관 3명이 아주 열심히 '한우 등심'을 먹어 치우는 것을 보니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내가 먼저 말을 할까 어쩔까 싶었던 그때, 입 안 가득 한우 등심을 물고 우물 우물 씹던 그 경찰관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시나요?"

그 질문이 매우 고마웠다. 하지만 나는 아주 의외의 질문을 받았다는 식으로 약간 눈까지 크게 뜨며 '뭐…'라고 뜸까지 조금 들인 것 같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뭐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반부패 국민연대'라는 곳에서 국민신문고 국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순간 그 경찰관의 표정이 싸해졌다. 그러더니 다시 나에게 조심스러운 어투로 "그게 무슨 일을 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네. 뭐 시민으로부터 공직자 중에 부정부패 피해 사례를 받아서 상담한 후에 반부패 특별위원회(현 국민 권익위원회 전신)나 검찰청 특별수사본부 등에 이첩해서 조사하도록 하는 등의 일을 민관 합동으로 담당하는 업무예요. 뭐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죠."

한동안 흐른 정적. 잠시 후 식사를 마친 후 계산대 앞으로 갔을 때 식당 주인은 이미 식사비가 계산되었다고 말했다. 물론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은 좀 전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슬그머니 나가는 경찰관이 '주문표'를 들고 나가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척하며 내 옆구리를 찔렀던 경찰관에게 당황한 척하면서 물었다.

"아니 왜 계산을 하셨어요? 오늘은 제가 밥을 사기로 하고 온 것인데..."

그러자 그 경찰관은 아주 해맑은 표정으로 나를 보며 답했다.

"아니. 저희가 설마 진짜로 선생님에게 밥을 사달라고 하겠어요. 그냥 같이 식사 한번 하시자고 농담으로 말씀드린 것이지."

큰 형에게 물려받았던 그 차는 결국 그 사고로 폐차 처리되었다. 12년이 지난 차 수리비가 더 많아 차라리 보상금을 더 드릴 테니 폐차하자는 상대방 보험회사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렇게 헤어진 나의 첫 번째 애마. 결과적으로 그 '애마'는 나에게 '한우 등심'까지 공짜로 먹게 하는 '짜릿한 추억'을 남긴 후 '아름답게' 작별했다. 사랑한다. 나의 애마. 현대 엘란트라 89년식 스틱 차여!

덧붙이는 글 | 나의 '애마' 때문에 생긴일 응모작



태그:#애마, #경찰관, #부정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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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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