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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에 있는 임시정부 요인 묘소.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 소재
 효창공원에 있는 임시정부 요인 묘소.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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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임시정부(이하 임정) 수립일이다. 그런데 4월 13일이 임정 수립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임시정부 문서 등에 따르면, 실제로는 1919년 4월 11일에 수립됐다는 주장이다.

어느 주장이 맞든 간에, 만약 덕수궁 함녕전의 전화기가 3일만 늦게 인천감옥과 연결됐다면, 임정이 해방의 순간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주제다.

임정의 역사는 상당부분은 백범 김구의 역사다. 일제의 방해와 재정적 곤란을 참아내지 못했다면, 임정은 8·15 해방 이전에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임정을 끝까지 지켜낸 주역은 임정 문지기(경무국장)로 시작해서 임정 주석까지 오른 김구였다.

김구의 회고록인 <백범일지>에 따르면, 1935년 10월 당시에 임정은 국무위원 7명 중에서 2명만 남은 상태라서 국무회의조차 열 수 없었다. 이때 김구는 중국 가흥(자싱)의 남호라는 호수에 놀잇배를 띄워놓고 거기서 선상(船上)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국무위원 세 명이 추가돼 임정 국무회의는 가까스로 되살아났다.

이렇게 김구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인 임정의 명맥을 유지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해방 직후에 남북분단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추진했다. 이 정도면, 임정의 역사가 상당부분은 김구의 역사라는 말이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김구의 목숨을 건지고 그가 훗날 임정으로 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덕수궁 함녕전의 전화기였다. 따라서 함녕전의 전화기가 아니었다면 임정이 그렇게 오래 유지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만난 일본인을 죽인 스물한 살 김구

덕수궁 함녕전과 고종황제(대역)의 모습. 사진은 서울문화재단 주최로 함녕전 앞에서 열린 역사 연극의 한 장면. 서울시 중구 정동 소재.
 덕수궁 함녕전과 고종황제(대역)의 모습. 사진은 서울문화재단 주최로 함녕전 앞에서 열린 역사 연극의 한 장면. 서울시 중구 정동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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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일본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청일전쟁을 벌여,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조선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고종 임금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그러자 일본은 1895년에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을 압박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격분해서, 황해도 안악군에서 우연히 만난 쓰치다 조스케라는 일본인을 죽였다. 이때가 1896년이었다.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김구는 상대방이 일본군 정보장교일 거라 판단하고 죽였다. 참고로, 일본측은 쓰치다 조스케가 군인이 아니라 상인이라고 항변했다. 그냥 스쳤으면 좋았을 걸, 김구와 부딪힌 게 쓰치다 조스케의 불운이었다.

일본인을 죽인 김구는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거사를 벌였다'는 대자보를 붙인 뒤 성명과 주소까지 적어 놓고 유유히 현장을 떠났다. 그는 3개월 뒤 체포됐고, 배를 타고 인천으로 끌려갔다.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동행했다.

배에 탑승한 곽낙원은 "얘야. 네가 이제 가면 왜놈의 손에 죽을 터이니, 차라리 맑고 맑은 물에 너와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라도 모자가 같이 다니자"며 아들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동반자살을 권유한 것이다.

그러자 김구는 "어머니는 제가 이번에 가서 죽을 줄 아십니까? 결코 안 죽습니다. 제가 나라를 위하여 사무친 정성으로 한 일이니 하늘이 도우실 것입니다. 분명히 안 죽습니다"라며 손목을 뺐다.

곽낙원은 또다시 손목을 끌어당겼지만, "자식의 말을 왜 안 믿으십니까?"란 말을 듣고 동반자살을 포기했다. 그 길로 김구는 인천감옥에 투옥되어 재판을 받았고, 사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참고로, 인천감옥은 월미도 가는 길인 지금의 인천시 중구 내동에 있었다.

"그가 인천감옥에 들어온 다음부터 감옥이 아닌 학교가 됐다"

괴로울 때 술이 아닌 책을 '마시는' 것은 김구의 행동패턴이었다. 사형을 기다리는 그는 자아계발에 뛰어들었다. 사형 당할 사람이 자아계발에 나섰다는 게 어째 좀 이상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자기 자신을 훈련했다.

우선, 김구는 평소에 읽지 않던 서양학 서적을 열심히 탐독했다. 또 동료 죄수들을 돕는 일도 열심히 했다. 그들에게 글도 가르치고 소송서류도 대필해주었다. <황성신문>에서 "김창수(김구의 두 번째 이름)가 인천감옥에 들어온 다음부터는 감옥이 아니라 학교(가 됐다)"라고 보도할 정도였다.

평양을 방문한 김구의 모습. 서울시 종로구 평동의 경교장에서 찍은 사진.
 평양을 방문한 김구의 모습. 서울시 종로구 평동의 경교장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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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던 김구는 1897년 7월 결국 사형집행일을 맞이했다. 스물두 살의 김구는 담담한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기적이 발생했다. 사형집행이 정지된 것이다.

사형이 집행되기 좀 전에, 한양 덕수궁에서는 고종의 비서가 사형수 명단을 훑어봤다. 그는 그 명단에서 김구란 이름에 주목했다. 김구의 행위 동기(범행 동기)가 특이했기 때문이다. '국모의 복수를 위해 일본인을 죽였다'는 행위 동기에 그의 시선이 집중됐다.

비서는 고종에게 급히 보고했고, 고종은 긴급 어전회의를 열어 사형집행정지를 결정했다. 사형이 집행되기 조금 전의 일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결정은 사형집행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전처럼 파발을 통해 왕명을 전달했다면, 고종의 특명은 김구가 죽은 뒤에나 인천감옥에 전달됐을 것이다. 

전화선이 3일만 늦게 개통됐어도, 그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

<백범일지>에 따르면, 다행히도 사형집행 3일 전에 서울-인천 전화선이 개통됐다. 그래서 고종의 집무실인 덕수궁 함녕전에 설치된 전화기가 인천감옥의 전화기와 연결될 수 있었다. 이 덕분에 고종의 특명은 인천감옥에 신속히 전달될 수 있었다.

그 당시로서는 드라마 같은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나라를 위하여 사무친 정성으로 한 일이므로 하늘이 도우실 것'이라더니,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서울-인천 전화선이 3일만 늦게 개통됐어도, 김구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기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김구는 스물두 살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고, 그랬다면 임정이 해방의 순간까지 그렇게 끈기 있게 버티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덕수궁 함녕전의 전화기가 인천감옥과 연결된 일은 훗날 임정의 존립에 영향을 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형집행정지 이후의 뒷이야기는 이러하다. 사형집행정지는 말 그대로 정지였지, 사면은 아니었다. 그래서 김구는 그 뒤에도 계속해서 사형을 기다려야 했다. 김구의 사면을 성사시키기 위한 운동이 있었지만, 일본 측의 훼방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보다 못한 김구는 간수와 죄수들에게 술과 고기를 푸짐하게 대접한 뒤, 모두 잠든 틈을 타서 감옥 마룻바닥을 뚫고 탈옥했다. "어머니, 저는 결코 안 죽습니다"란 그의 예언은 그렇게 성취됐다.

그 뒤 김구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다가 중국 상해(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가담했다. 경무국장 즉 임정 문지기로 시작한 그는 은근과 끈기로 임정을 지켜내다가 8·15 해방의 순간을 맞이했다. 해방 공간에서 그는 '하나의 한반도'를 위해 열심히 뛰다가, 자기를 살린 덕수궁 근처에 있는 경교장에서 미군 첩보요원 안두희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태그:#임시정부수립일, #김구, #덕수궁 함녕전, #대한민국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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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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