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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012년 12월 5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도리 장준하 공원에서 고인의 사인 규명을 위한 유골 정밀감식을 위해 개묘작업을 해 고인의 두개골을 수습하고 있다. 유골은 이정빈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법의학자들에 의해 정밀감식하게 된다.
 장준하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012년 12월 5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도리 장준하 공원에서 고인의 사인 규명을 위한 유골 정밀감식을 위해 개묘작업을 해 고인의 두개골을 수습하고 있다. 유골은 이정빈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법의학자들에 의해 정밀감식하게 된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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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6일, 백범기념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경악했다. 슬라이드 화면 가득 드러난 장준하 선생의 유골과 그 유골의 상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서울대 이정빈 교수의 감정 결과를 접한 이들이었다. 이날 이정빈 교수는 컴퓨터 단층 촬영(CT)과 3D 동영상 등 첨단기술을 동원한 정밀 감정과 함께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은 두개골을 절개하는 최후 수단까지 마다하지 않은 채 사인에 대한 진실을 추적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 끝에 이정빈 교수팀은 지난 38년간 감춰진 장준하 선생의 법의학적 사인을 명쾌하게 제시했다. 핵심 요지는 "장준하 선생이 머리를 가격 당해 즉사했고, 이후 누군가 벼랑 밑으로 내던졌거나 추락해 엉덩이뼈가 손상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결론이었다.

신문과 방송이 들끓었다. 타살이냐, 추락사냐를 두고 벌어졌던 지난 38년간의 논란에 '새로운 방점'을 찍은 이 감정 결과를 두고 "이제라도 장 선생의 사인 의혹을 제대로 밝혀야 한다"는 여론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비춰보아 나는 이 감정 결과를 비난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 38년간 '상식적' 진실을 부정해온 세력이 늘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조선일보>의 연이은 기사였다. 지난 1일 이정빈 교수를 상대로 한 인터뷰에 이어 <조선일보>는 이틀 뒤인 3일, '주말 뉴스부장' 선우정의 기명 칼럼 '동행자 K씨의 인권'이라는 제목으로 장 선생의 타살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에 대해 비난하는 요지의 글을 보도했다.

지난 2003년부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에서 장 선생 의문사 담당 조사관으로 일했던 내 입장에서 이 칼럼은 매구 큰 관심이 아닐 수 없었다. 맹세컨대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일독했다. 하지만 장 선생의 타살 의혹을 반박하는 그 칼럼을 다 읽고난 나는, 오히려 그 '참담한 수준의' 반격에 대해 허탈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조선일보>의 선우 부장이 정말 장 선생 의문사에 대해 최소한의 정보라도 구해서 제대로 읽어보고 이러한 칼럼을 쓴 것인지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민했다. 선우 부장의 글에 대해 조목 조목 반박하는 것이 정말 가치있는 일인가에 대해서였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조선일보>가 쓰면 사실이라는 말처럼 진실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은 마치 <조선일보>의 글이 사실인양 트위터 공간에서 날아 다녔다. 그리고 이렇게 생명력을 부여받은 왜곡된 진실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었다. 결국 '지겹지만' 이 거짓을 반박하는 글을 또 다시 쓰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조선일보>가 쓴 동행자 K씨를 위한 '변명'

<조선일보> 선우 부장은 자신이 쓴 칼럼 '동행자 K씨의 인권'에서 장 선생의 마지막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K씨'를 일방적으로 변론하는 내용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의아하게 여긴 것이 하나 있었다. 새삼스럽게 장 선생의 사고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에 대해 <조선일보>가 뜬금없이 실명 대신 'K씨'로 언급한 점이었다.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는 93년 장 선생의 사인 의혹을 사회적 이슈로 만든 서울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가 보도된 후와 2004년 2기 '의문사위'가 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마다 <조선일보>와 '사실상' 같은 매체인 <월간 조선>과 장문의 인터뷰를 한 사실이 있다. 한번은 집으로 찾아온 기자와 했고, 마지막엔 스스로 찾아가 인터뷰를 자청했다. 이를 통해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는 "장 선생이 실족 추락사했으며 그것을 내가 분명히 봤는데 뭐가 의문이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2004년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사건이 복잡한 것도 아니고 단 1분, 아니 몇 초만 이야기하면 끝나는 거예요. 내 생각에는 10분이면 조사가 끝나요. 그렇게 길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반복에 반복을 하는 거예요"라고 했으며 "조사를 받으면서 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사관들은 내가 거짓말을 안 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라며 "자기들의 조직 수명 연장을 위해 자꾸 출두를 요구하는 것"이라는 원색적인 비난하기도 했다.

이같은 김용환씨의 인터뷰를 위해 당시 <월간조선>은 적지않은 지면을 할애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의 실명 '김용환' 석자를 수 도 없이 되풀이 썼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또한 이같은 김용환씨의 <월간조선> 인터뷰를 근거로 장 선생의 타살 의혹을 부정하려는 이들이 이 '실명' 인터뷰를 인터넷으로 퍼 나르며 반박에 나섰던 사실은 장 선생 사건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면서 <월간조선> 사장까지 지낸 조갑제씨 역시 자신이 운영하는 '조갑제 닷컴'에 이 실명 인터뷰를 전문 게제하며 반박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의 이름을 <조선일보>가 왜 'K씨'로 언급하며 마치 실명을 쓰는 것이 '인권 침해'인 양 새삼 주장하는 것인지 그 의도가 난감했다. 한마디로 너무 궁색해 보였다. 설마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은 다른 매체'라는 식의 주장은 하지 않으리라 믿고 싶다.

이처럼 문제의 <조선일보> 칼럼을 반박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또한 이런 식으로 반박하다보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다른 것은 제쳐두고 핵심 요지 하나만 지적하려 한다. 먼저 <조선일보> 선우정 주말뉴스 부장이 쓴 칼럼의 핵심을 간결하게 정리해보면 거칠지만 아마도 이런 의미인 듯 하다.

[장준하 선생의 사인 진상을 밝힌다는 명분으로 동행자 K씨의 인권이 무시당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동안 5차례에 걸쳐 조사를 했고 이 과정에서 죄인처럼 끌려다닌 K씨의 주장을 들어보니 그는 "난 절벽에 붙어있는 소나무를 잡고 뛰어 내렸는데 뒤에서 '휙'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뒤에 계셔야 할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장준하 선생의 사인에 의혹을 가진 이들은 정황상 맞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암살범으로 몰아가고 있고 이는 정황만으로 과거 간첩으로 누군가를 몰아간 그들과 닮아 있다. 아버지를 잃은 유족의 눈물에 공감하지만 이를 규명하기 위해 그 모습(유골)까지 공개하는 것이 최선인지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처받는 한 인간의 초라한 권리가 마음에 걸린다.]

김용환씨, 그는 왜 여러차례 재조사를 받았을까

결론부터 말하겠다. 지난 2003년부터 약 1년에 걸쳐 내가 김용환씨를 만나 조사한 횟수는 15회 정도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를 괴롭힐 목적으로  '일부러' 여러차례 조사를 요청한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김용환씨는 스스로가 '장 선생의 최후를 목격한 당사자'라고 자처했다. 장 선생이 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추락하여 실족사했다는 결론이 나온 이유의 '처음과 끝'은 단  한 사람, 바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 때문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유는 이렇다. 이 사건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과 담당 검사를 불러 장 선생을 실족 추락사로 결론내린 이유를 물을 때마다 그들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당시 목격자가 있었는데 그가 장준하 선생이 실족 추락하여 사망한 것을 봤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당시 장준하 선생의 사망 사실을 실족 추락사로 보도한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목격자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렇게 쓴 것"이었다.

문제는 목격자인 김용환씨의 주장처럼 장 선생이 실족 추락사의 '그것처럼' 아무런 의심의 여지없이 판단되었으면 좋았을텐데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용환씨의 목격 주장과 달리 장 선생의 시신은 제멋대로 날카로운 각이 서 있는 14.7미터 높이의 벼랑에서 추락한 사람으로 볼 수 없었다. 나는 조사관으로서 장준하 선생의 시신 사진을 수없이 많이 살펴봤다. 이를 그냥 이해하도록 한마디로 쉽게 표현한다면 '막 목욕을 마치고 나와 잠자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문으로 시작된 여러 의혹에 대해 그렇다면 사람들은 누구에게 제일 처음 진실을 물을 것인가. 당연히 장 선생과 유일하게 혼자 있었고 동시에 추락 실족사하는 것을 봤다고 주장하는 목격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목격자를 자처하는 그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당신이 본 사실이 무엇이냐고"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장준하 선생 사망후 사라졌는데 어디로 갔냐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당신이 사라진 후 당신은 그 사이에 어디에서 누구를 만났느냐."

이상이 바로 이 사건에 '상식적'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목격자를 자처해온 김용환씨에게 물어온 핵심이었다. 문제는 이에 대한 김용환씨의 답이었다. 김용환씨는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납득할 수 없는 언행을 보였다. 그것이 어쩌면 38년에 걸친 장 선생 의문사의 문을 여는 '비극의 시작'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여전히 그의 답변을 이해할 수 없다.

목격자 김용환씨, 정말 당신은 무엇을 보았나요

안타깝지만 김용환씨는 이같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해 많은 이들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하지 못했다. 선우 부장은 칼럼에서 사건 경위를 목격한 김용환씨가 "난 절벽에 붙어있는 소나무를 잡고 뛰어 내렸는데 뒤에서 '휙'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뒤에 계셔야 할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라고 아주 쉽게 그의 말을 믿어줬고 "이것이 그의 전부"라고 변론까지 해 줬다.

미안하지만, 장 선생의 최후를 봤다는 김용환씨의 주장은 선우 부장의 주장처럼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정말로 선우 부장이 이 사실을 몰라서 이렇게 글을 쓴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주장을 강변하기 위해 이렇게 쓴 것인지 그 속내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김용환씨는 절대 '그렇게만'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김용환씨가 사건 발생후 지금까지 이렇게만 주장했다면 차라리 더 좋을 뻔했다. 그랬다면 그를 상대로 이렇게 많은 이들이 끈질기게 그의 목격자 주장을 의심하지 않았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김용환씨는 정말로 '다양한' 목격담을 그때 그때 다르게 말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장준하 선생 추락 상황을 봤다는 증언이다. 그는 지난 75년 8월 17일 사건 직후 "장 선생이 하산중 소나무를 잡고 내려오는데 그 나무가 휘면서 추락했다"고 말했다.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따라서 당시 <동아일보> 역시 '소나무 가지' 관련 내용을 장 선생의 최후라며 보도했고 이후 장 선생의 지인 역시 사건 현장인 약사봉 계곡만 가면 문제의 '휘어진 소나무'가 어느 나무인지를 두고 서로 '갑론을박'을 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휜 소나무' 발언은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2004년 1월, 2기 의문사위 조사에서도 김용환씨는 조사관이 묻는 질문에 대해 재차 반복하여 "장 선생이 소나무를 잡았으나 휘어 추락했다"고 되풀이 진술했고 조서에도 그렇게 기록을 남겼다. 그래서 '장준하'하면 많은 이들은 '휜 소나무'를 연상했고, 지금 역시 장 선생의 사고 경위를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 모두 김용환씨가 '봤다는' 목격 증언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용환씨가 봤다는 '휜 소나무' 주장이 사실은 '거짓'이라는 '충격적인' 문서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발언의 당사자가 누구도 아닌 바로 '김용환', 그 자신이었다. 88년 국정감사 과정에서 야당이 장 선생 사인 의혹을 제기하며 재조사를 요구하자 이에 당시 포천경찰서 경찰관 한희권이 작성한 이른바 '88년 경찰 재조사' 기록에서였다. 이미 폐기된 것으로 알려진 이 문서를 포천경찰서 문서고에서 '극적'인 과정을 통해 찾아낸 후 그 보고서에 담긴 김용환씨의 발언을 접한 나는 그야말로 경악에 가까운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관련 부분을 발췌하면 이렇다

한희권 : 그럼 장준하씨가 실족 추락할 때 그곳에서 소나무를 잡고 미끄러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종류의 소나무인가요
김용환 : 예. 저는 장준하씨가 실족 추락할 때 소나무를 잡았는지, 안 잡았는지 보지 못하였는데 며칠후 <동아일보> 신문에서 소나무를 잡고 내려오다 떨어졌다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나로서는 정말 심장이 멎어 버리는 줄 알았다. 장 선생이 실족 추락사했다는 그동안의 모든 '역사적 대 전제'가 무너지는 발언이었기 때문이었다. "잡았던 소나무가 휘어 추락사했다"는 그동안의 목격 진술이 그렇다면 모두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김용환씨를 다시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새로 찾아낸 '88년 경찰 재조사 기록'을 제시하며 따졌다. 이후 그의 '변해가는' 주장은 놀라웠다.

처음에 당황해하던 그는 자신의 발언이 담긴 '88년 경찰 재조사 기록'을 전면 부정했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더니 끝내 "경찰관이 잘못 쓴 것"이라고 잡아 떼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지장까지 찍은 그 조서를 부정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더구나 김용환씨의 경우 우리 위원회 조사시 최소 8시간 이상 소요되곤 했는데 그중 상당 시간은 자신의 발언 내용을 꼼꼼히 확인하는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발언 의미가 조금만 달라도 수정을 요구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는 절대 도장을 찍지 않았다.

한편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2004년 5월 12일 그가 마지막으로 조사를 받은 날이었다. 그동안 '88년 경찰 재조사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김용환씨가 갑자기 '휜 소나무' 목격 주장을 전면 철회한 것이다. 그러면서 느닷없이 '나는 소나무가 휜 것을 본적이 없고, 휜 소나무가 있다는 말을 지금까지 한 사실이 없다'라는 황당한 주장을 새롭게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75년 8월 20일,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후 3일이 지나서야 김용환씨는 처음으로 장 선생의 상가를 방문했다. 그리고 이날, 그는 유족과 문익환 목사 등 지인들 앞에서 자신이 목격한 장 선생의 최후를 처음으로 증언했다. 이 당시 숨겨진 야사가 있었는데 함께 듣던 문익환 목사가 기지를 발휘하여 김용환씨 몰래 그의 육성을 테이프로 녹음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조사팀이 잃어버렸던 그 테이프를 다시 찾아내어 복원한 결과 그의 육성이 들려왔다. 이때 그는 뭐라고 말했을까. 문익환 목사가 반복하여 "목격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거듭하여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장준하 선생이 소나무를 잡고 내려오던중 휘면서 추락했고 그 휘는 모습을 옆에서 내가 봤어요. 옆에서..."

김용환 선생님, 도대체 진실이 무엇인가요

참으로 이 어지러운 사실을 언제까지 말해야 하는지 안타깝다. 선우 부장은 목격자인 김용환씨가 모든 사실을 아주 간결하게 정리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삼으려는' 사람들의 억지로 인해 억울한 인권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빗대어 말했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치에 맞지 않는 그의 진술 앞에 누구보다 가장 안타까워 한 사람은 바로 조사관인 '나'였다는 사실이다.

김용환씨는 자신이 봤다는 장 선생의 최후에 대해 '셀 수 없이' 진술을 바꿨다. 어떨 때는 '억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장 선생님이 없었다'라고 했고 또 어느 때는 '따라오는 소리가 없어 돌아보니 장 선생이 보이지 않아 추락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돌아보니 장 선생이 떨어지는 것을 순간적으로 봤다'고도 했고 또 지금처럼 '잡았던 소나무가 휘어 떨어졌다'고도 했다. 심하게 표현하면 그의 '팔색조 진술' 앞에 때로는 화가 나는 것도 지쳐 멍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만 한참 바라 본적도 있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일행의 증언에 의하면 사건 직후 김용환씨는 어디론가 사라졌었다. 그렇다면 그 사이 어디로 갔으며 또한 누구를 만났는지를 묻는 조사관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더욱 의아했다. 이 모든 내용을 이곳에 다 적을 수는 없다. 다만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그가 갔다고 주장하는 파출소와 경찰서 근무자는 모두 한결같이 그를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반면 또 다른 의정부 지청 검사와 경찰관들은 김용환씨가 가지 않았다는 부인하는 장소와 시간에 그를 '분명히' 만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용환씨는 이러한 이들의 주장이 '거짓말'이라고 전면 부정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전직 경찰관과 검사 모두가 하나로 공모하여 이 사건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조사 과정에서 오히려 김용환씨에게 거듭 거듭 호소했다.

"많은 이들이 선생님을 향해 의구심을 제기하는데 이러한 의심을 해소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맞으면 맞다고 하고 틀리면 왜 틀린지에 대해 납득할 수 있게 설명을 해 주셔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는 끝내 자신에게 쏠린 합리적 의심을 '쉽게' 털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된 실갱이 끝에 예정되어 있던 조사 기간은 끝났다. 시간은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편이 아니었다. '버틴' 거짓이 '찾으려는' 진실을 이기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위원회의 문을 닫던 그때, 김용환씨는 '스스로' <월간조선>을 찾아가 인터뷰를 자청했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조선일보> 선우 부장이 마치 '금과옥조'처럼 칼럼에서 인용한 "난 절벽에 붙어있는 소나무를 잡고 뛰어 내렸는데 뒤에서 '휙'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뒤에 계셔야 할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이며 "이것이 전부"라며 선우 부장이 인정해준 그 말이었다. 조사관이었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였다. 그는 왜 이 말을 <월간조선>까지 찾아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의 의문에 대해서는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내가 정말 '그에게' 묻고 싶은게 있다

누구에게나 인권은 소중하다. 나 역시 아무 죄도 없는 누군가를 향해 근거없는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반대하며 그렇게 하는 것을 증오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치에 좀 맞지 않는다 해서 그를 향해 성급하게 '암살자'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절대 옳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장 선생 사건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에 대해서도 그런 부당한 대우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지금까지 내가 해온 여러 강연과 방송 인터뷰, 그리고 지난 해 장 선생 사건의 모든 내용을 세세하게 담아 출판한 책 <장준하, 묻지못한 진실>(돌베개)를 통해서도 거듭 주장해 온 사실이다.

하지만 반면 김용환씨 역시 이러한 자신에게 쏠린 의혹을 명쾌하게 털어야 할 책임이 있음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거칠게 보면 장 선생의 사인을 규명해야 할 중요한 이유로 나는 두가지를 언급해 왔다. 첫째는 장 선생 당사자와 그 유족을 위해서이다. 자신이 왜 죽었고 또한 내 아버지와 남편이 어떤 경위로 죽었는지에 대해 '알 권리'가 유족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이 사건의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를 위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이미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이들에게 이 사건과 관련한 '중대한 의혹 인물'이 되어버렸다. 만약 이대로 그냥 김용환씨가 자신의 주장처럼 '순수한 목격자'임을 밝히지 못한다면 그에게 씌워진 멍에는 역사에 오래 오래 남을 수 밖에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이러한 '근원적 책임'은 이미 확인한 것처럼 자신의 목격 증언을 뒤죽박죽으로 해 버린 김용환씨, 바로 자신 때문임도  나는 분명하게 확인한다.

정말 김용환씨가 이 사건의 '순수한 목격자라면 진술은 하나'여야 한다. 한 두가지 사실은 틀릴 수 있지만 조사 과정에서 충분히 정정될 수 있음에도, 또한 일부 기억중 틀린 것 역시 대질조사를 통해 다시 정정할 수 있는데도 김용환씨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주장을 바꿨고 반면 다른 이의 주장에 대해서 철저하게 배격했다. 자신의 주장이나 기억이 분명히 틀렸음이 넉넉하게 확인되는데도 불구하고 혼자만 끝까지 아니라고 버텼다. 그러다보니 그는 사건 발생 이전과 이후를 통 털어 '알리바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묘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중 가장 압권은 1975년 8월 17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한 장의 '중요상황 보고문'에 적힌 목격자 김용환씨의 행적이다. 중정 문서에 따르면 그는 사건 발생 직후 장준하의 집으로 전화를 건 사람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나' 이러한 중정 문서의 내용을 끝까지 부인했다. 그렇다면 김용환씨는 왜 중앙정보부 문서 내용을 이처럼 강력하게 부인했을까.

유족이 장준하 선생의 사인에 대해 강력한 의구심을 가진 계기가 바로 이 '한통의 전화'로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8월 17일 오후 3시경, 신분을 밝히지 않은 남자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장 선생의 집으로 걸려왔다. 그리고 괴  남자는 '지금 장 선생이 포천 약사봉에게 크게 다쳤으니 서울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모셔가야 한다'고 말한 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유족은 이 괴 전화를 한 남자가 바로 이 사건의 열쇠를 쥔 누군가로 여겨왔던 것이다. 그런데 중정 존안 기록에서 마침내 그 괴전화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바로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씨임을 찾아내었다.

장준하 선생 사인 의혹, 이제 그만 결론내야

다시 한번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또 다시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강력 부인했다. 끝끝내 부인하더니 '88년 경찰재조사 기록'처럼 이 보고문 역시 '중앙정보부 조작'이라고 강변했다. 김용환씨를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유족이나 조사관이 아니라 사실은 '전직 경찰관과 검사', 그리고 '중정과 경찰의' 국가 공식 문서였다. 혹시 정말 중앙정보부 기록이 잘못된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실명이 기재되어 있다면 그가 맞다"는 진술을 나는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이 업무를 담당했던 복수의 책임자로부터 확인했다.

나는 김용환씨에게 쏠린 이같은 의혹에 대해 다시한번 답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여전히' 믿는다. 그것이 김용환씨를 위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배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끝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조사를 거부한다면 그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다시 '이 사건 조사관이 된다 할지라도' 이처럼 거부하는 김용환씨를 굳이 '억지 조사'할 생각이 없다. 그가 "자신을 향한 의혹에 대해 더 이상 해명하지 않겠다"고 결정한다면 지금까지 확인한 결론만으로도 어느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그가 왜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찾는 일이다.

결국 또 글이 길어졌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글은 아직도 여전히 다 쓰지 못했다. 사실 장 선생 사건의 진실은 '상식적'이다. 그런데 이 상식을 넘어서는 '억지가 마치 사실인양' 호도하는 부정 세력을 보면서 나는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이제 더 이상의 소모적인 논쟁은 가치가 없는 일이다. 2기 의문사위 조사 결과와 이정빈 교수의 법의학 감정 결과를 통해 확인된 사실은 '결국 하나'다. 장 선생의 사인 의혹은 '이미 끝난 사건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조사를 통해 다시 밝혀야 할 진실'이라는 결론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혹에 대해 진실을 알고 있는 이는 답해야 한다. 나는 그 진실의 '일부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 바로 1975년 장 선생 사망 당시 사고 현장을 다녀간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 요원이 작성한 '중요 상황보고서'를 존안해 놓고 있는 그 문서고이다. 이제 그 문서고 안으로 '강제 수사권'과 '압수 수색권'을 가진 의문사 사건 조사관이 직접 들어가 문제의 존안 문서를 확보할 수 있다면 지난 38년에 걸친 '비밀의 문'은 그 먼지를 털며 열리게 될 것이다. 바로 그때가 이 나라의 '진짜' 민주주의가 이룩되는 '그날'임을 나는 확신한다. 그날이 어서 오기를 간절하게 고대한다.

덧붙이는 글 | 고상만 기자는 <장준하, 묻지못한 진실>(돌베개 출판사)의 저자입니다.



태그:#장준하, #조선일보, #의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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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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