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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세계의 희망은 모든 활동이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뤄지는 작고 평화롭고 협력적인 마을에 있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책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2012년, ‘콘크리트 디스토피아’ 서울 곳곳에서는 ‘마을공동체 만들기’가 한창입니다. 함께 '집밥'을 먹고 책을 읽고 텃밭을 가꾸는 것부터, 아이를 같이 키우고 일자리를 나누고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것까지. 반세기 전 간디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오마이뉴스>는 다양한 마을만들기 사례를 통해 마을이 왜 희망인지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할 말 없다고 취재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네요. 생각 있으면 연락하라고 할게요."

답장은 오지 않았다. 3년 전, 언론이 집중 조명했던 '신수동 행복마을 주식회사'. 회사를 이끌었던 주인공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마을공동체 만들기'의 시작과 성장 그리고 소멸 과정을 보여주기에 '행복마을'만큼 적합한 소재가 없었다. '실패했다'는 점에서 취재를 꺼린다는 걸 이해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일단 만나야 했다. 25일 오후, 전화로 접촉했던 최국모(51) 주임이 일하는 서울 마포구의회를 찾았다. 그는 3년 전, '행복마을'을 인큐베이팅했던 신수동 주민센터의 공무원이다. 그도 입을 열기는 조심스러워했다. '이미 다 지난 일', '시간이 없다'고 꺼렸다. 하지만 영국 취재 경험담을 꺼내며 영국과 한국의 마을 사업을 비교하자 그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구청이 기획한 마을 사업들이 실제 현장에서는 왜 지지부진한지 의문이 들었죠. 현장에서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고 2010년 초반에 신수동 주민센터로 갔죠."

월 200~300만 원 매출에 지역 일자리 창출...'잘 나가던' 행복마을

신수동 행복마을 주식회사를 운영했던 이평심 회장이 2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신수동 가게 외벽에 붙여 있는 사진을 보여주며 지난 2010년 서울시 사회적 기업에 선정돼 음식점이 번창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신수동 행복마을 주식회사를 운영했던 이평심 회장이 2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신수동 가게 외벽에 붙여 있는 사진을 보여주며 지난 2010년 서울시 사회적 기업에 선정돼 음식점이 번창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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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민관협력'이었다. '민'에서는 송기창(58) 동 주민자치위원장, 이평심(59) 동 부녀회장이, '관'에서는 최 주임이 나섰다. 2010년 5월, 주민자치위원, 통반장 등 주민 30명이 5만 원에서 100만 원의 돈을 모아 2000만 원의 자본금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는 커뮤니티 비즈니스(Community Business, CB)를 지향했다.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사업을 벌여 지역을 활성화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마을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며, 주민을 고용하고, 이윤을 다시 마을에 재투자하는 형태다. 지금은 협동조합, 마을공동체 사업으로 CB라는 개념이 확장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드물었다.

사업 아이템은 두부와 콩나물이었다. 친근한 아이템을 고른 것이다. 주민센터 4층에 두부 제조 기계를 갖춰놓고 생산을 시작했다. 주주 십여 명이 회사에 시간제로 일했다. 충북 충주시 금가면의 농민들에게서 콩을 받아 200g에 2000원하는 네모난 즉석 두부를 만들었다. 두부 만들다 나온 콩비지로는 도넛도 만들었다. 또 주주들에게 시루를 분양해 집에서 콩나물을 키우게 했다.

"당시만 해도 관공서 청사에 주민이 회사를 만들어서 운영한 사례가 없었어요. 동네 슈퍼에다 납품했는데, '행복마을 두부'를 신수동 주민들이 사기 시작했어요. 한 달 만에 월 200~300만 원의 매출이 나왔어요. 재미가 좋았죠."

재미가 붙자, 주민은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했다. 주민센터 옥상에 도시 텃밭을 만들자는 것이다. 110(약 33평) 규모의 옥상에 텃밭 상자를 깔아 고추와 가지, 배추, 오이 등을 심었다. 생산량은 많지 않고 시중 농산물보다 품질이 떨어졌기에 판매는 하지 않았다. 대신 저소득층 가구에 나눴다. 수확한 배추로 김치를 담가 독거노인에 기부하기도 했다.

혁신적인 행복마을 사업에 언론이 주목했다. 방송과 일간지, 잡지에 크게 실렸다. 최 주임을 비롯해 세 사람은 마을을 소개하러 강의도 다녔다. 2010년 9월, 서울시 사회적 기업에 선정돼 회사 내 인건비 지원을 받게 됐다. 그해 10월에는 신수동 자치회관이 서울시 최우수 자치회관으로 뽑혀 3000만 원을 지원받았다. 마을은 주주들에게 출자금의 20%에 해당하는 금액을 배당하기도 했다.

'재미 좋았던' 두부 공장이 불법이라니...

신수동 행복마을 주식회사를 운영했던 이평심 회장.
 신수동 행복마을 주식회사를 운영했던 이평심 회장.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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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이 타올랐던 마을에 위기가 찾아왔다. 주민센터에 있는 두부 공장이 불법 시설물 판정을 받은 것이다. 두부 공장을 세우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설립·위생 허가 등이 필요했지만 이를 생략했던 것. 이 과정에서 주민과 구청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그때부터 주민이 규정, 허가 등과 관련해 구청에 불만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좋은 일 하는데 봐주면 안 되나' 하는 요구였어요."

'관'과 멀어진 주민은 스스로 해결책을 찾게 된다. 10여 명의 주주를 추가로 모은 것이다. 두부 기계를 놓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보증금 3500만 원에 월세 80만 원으로 주민센터 인근에 식당을 열고 두부 생산을 이어갔다. 두부를 재료로 한 전골과 찌개, 부침개 등을 만들어 팔았다.

다시 문제가 생겼다. 법률상 일반음식점에서 두부를 생산할 수 없었다. 기계는 멈췄다. 이후로 마을은 점점 기울어져 갔다. 2011년도 들어서는 서울시 사회적 기업에서도 탈퇴했다. 회사 일에 매달려 온 주부들이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고, 외부 지원도 끊기면서 마을은 고립됐다.

"주주들 사이에서도 균열이 시작됐죠. 의견들이 미묘하게 엇갈렸어요. 결국, 문제가 터지니까 잘잘못을 따지기 시작했고, 그런 일들이 걷잡을 수 없이 소문으로 퍼졌죠. 몇몇 주주들은 탈퇴도 했고요."

"정말 주민이 원했던가"

소통을 위해 주주총회와 사업 설명회도 열었지만,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런 내부 갈등은 주주 재교육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고 최 주임은 지적한다. '커뮤니티 비즈니스'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업을 주주들이 왜 하는지, 이를 통해 무얼 이룰 수 있는지 등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갈등을 풀었어야 한다는 얘기다.

"사회적 가치가 무엇인지. 주민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재교육을 해야 했는데, 그게 부족했죠. 당시 대한민국에서 커뮤니티 비즈니스가 만들어진 것은 신수동이 처음이고, 그런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어요. 그러다보니까 약한 균열이 있어도 쉽게 메우지 못했죠."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그리고 그의 말은 이어졌다.

"정말 주민이 절실하게 원했던 사업인지 의문이 드네요. 몇 사람이 나서서 주도했다는 느낌도 들어요. 그리고 두부 몇 개 팔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신수동 전체 주민에게 어떤 공감을 주는지, 그들의 지지가 있었는지 평가하는 과정이 없었죠."

지난해 8월, 결국 신수동 행복마을 주식회사는 주주들에게 투자금을 돌려주고 청산했다. 이평심 회장이 남은 식당을 인수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최 주임에게 이 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마음이 풀렸는지, 최 주임은 이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약속을 잡아줬다. 곧바로 신수동 행복마을 식당으로 향했다.

이평심 회장 "기업가 마인드, 행정 능력 부족했다"

신수동 행복마을 주식회사를 운영했던 이평심 회장이 서울 마포구 신수동 가게에서 언론에 소개된 기사와 사진을 보여주며 가게가 번창했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수동 행복마을 주식회사를 운영했던 이평심 회장이 서울 마포구 신수동 가게에서 언론에 소개된 기사와 사진을 보여주며 가게가 번창했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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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만난 이 회장은 파를 다듬고 있었다. 취재를 꺼렸던 마음은 사라졌는지 환하게 웃으며 취재진을 맡았다. 그는 식당 왼쪽 벽에 붙은 사진과 기사들을 소개했다. '서울 안의 행복마을을 꿈꾸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옥상 텃밭에서 찍은 사진들이 눈에 띄었다. 서울시에서 받은 표창장도, 2차 주주를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도 걸려 있었다.

"30년 동안 주부로만 있다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거였죠. 우리가 돈을 벌어서 가게도 얻고, 사람들 써서 월급을 준다는 게 너무너무 즐거웠어요. 그렇게 힘들게 했는데…마을이 없어져서 울기도 많이 울었죠. 정말 모든 걸 다 쏟았어요."

그가 밝힌 첫 번째 문제는 기업가적 마인드, 전문 행정 능력이 떨어졌다는 점이다. 공장 허가 문제도 사업해 본 사람이라면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었다. 특히, 시와 구에서 지원금을 받게 되면서 공금의 영수증 처리와 함께 각종 결과 보고서가 그들을 괴롭혔다. 매달 600만 원의 인건비를 지원했던 서울시 사회적 기업에서 스스로 탈퇴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행정 업무를 맡을 경리직원이 없었다는 것을 후회했다.

남성 주주들의 참여가 부족했다는 점을 이 회장은 두 번째 문제로 꼽았다. 낮에는 직장에 나가야 할 남성 주주들이 회사에 관심을 기울이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마을 장터에서 천막도 쳐야 하고 콩 포대도 옮겨야했지만, 주부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투자만 했지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내 일이라는 인식으로 회사에 힘이 됐어야 하는데…, 뒷받침이 안 됐어요. 그저 잘 될 거라 낙관했죠."

멈춰선 기계... 다시 '뜨끈뜨끈' 두부 만들 수 있을까?

지난 2010년 당시 신수동행복마을 주식회사 직원들이 주민센터 4층에 설치된 두부 제조 기계에서 두부를 제조하고 있는 모습.
 지난 2010년 당시 신수동행복마을 주식회사 직원들이 주민센터 4층에 설치된 두부 제조 기계에서 두부를 제조하고 있는 모습.
ⓒ 최국모 주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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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최국모 주임을 비롯해 신수동 행복마을 주식회사 직원들이 주민센터 옥상에서 텃밭을 가꾸고 있는 모습.
 지난 2010년 최국모 주임을 비롯해 신수동 행복마을 주식회사 직원들이 주민센터 옥상에서 텃밭을 가꾸고 있는 모습.
ⓒ 최국모 주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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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과 함께 주민센터 4층에 올라갔다. 이전의 두부 공장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기계 옆쪽으로는 포댓자루 등 두부를 만들 때 쓰던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 회장은 콩을 갈아 가마솥에 넣고 끓인 후 포장지에 나오는 두부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했다. 이 회장은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언제라도 기계를 돌리고 싶은 마음이다.

"한창때는 주민센터 앞에서 뜨끈뜨끈한 콩물 한 그릇, 그냥 나눠줬어요. 이제는 그렇지 못해서 아쉽죠. 다시 한다면 제대로 공장 차려서 젊은 주부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어요."

지금도 식당은 마을 사랑방이다. 통반장 회의가 열리고, 주민 센터를 오가는 사람들이 들르는 공간이다. 매주 토요일에는 노인들에게 음식도 제공한다. 2년 넘게 진행된 행복마을의 실험은 끝났지만, 회사가 뿌린 마을 씨앗들은 신수동 곳곳에 살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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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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