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슬> 포스터

영화 <지슬> 포스터 ⓒ 지파리 필름


'지슬'은 제주말로 '감자'를 가리킨다. '땅의 열매'란 뜻이라고 한다. 제주에 살아보지 않은 이라면 말만 들어서는 그 뜻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4.3'도 그렇다. 제주에 살아보지 않은 이라면 말만으로는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지슬>(2013)은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주는 영화다. 뭍에서 살아온 당신과 내가 실은 '4.3'이라 이름 붙여진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1948년 겨울, 그 섬에 가다

1948년 겨울, 마을에 흉흉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군인들이 아랫마을에 몰려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까지 들려왔다. 곳곳에 '소개령'도 나붙었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밖 산악지대에 머물면 무조건 '빨갱이'로 간주해 사살할 테니 산 밑으로 내려오라는 엄포였다.

하지만 대대로 산기슭에 마을을 이루고 살아온 이들에겐 안 될 말이었다. 게다가 누구의 말도 미덥지가 않았다. 그래서 마을의 남자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깊은 산에 올라가 숨기로 했다. 며칠만 버티면 모든 게 잠잠해질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곧 섬 전체에 계엄령이 내려졌지만 벌써 산 깊숙이 숨어든 이들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어두운 동굴 안에서 무료함을 달랬다. 나란히 앉아 식어버린 지슬로 허기를 채우는 모습에선 마치 늦은 저녁 이웃집 마당에 둘러앉아 막 구워낸 지슬을 나눠먹는 것 같은 따스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영화 <지슬>의 한 장면 ⓒ 지파리 필름


머지않아 모두가 아무 탈 없이 산을 내려갈 수 있으리란 사실을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영화가 우리들에게 건넨 지슬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도 조심스럽게 그들 곁으로 다가가 한쪽 끝에 자리를 잡았다. 순덕 어멈이 내게도 지슬 하나를 건넸다. 추위를 잊게 할 정도로 따뜻한 지슬, 그 지슬로 언 손을 녹이며 어쩌면 정말 모두가 살아서 이곳을 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돌아보니 내 옆으로도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그렇게 불 꺼진 극장은 어느새 '큰넓궤'가 되어 있었다. 우리들 모두는 1948년 겨울, 그 좁고 어두운 동굴 안에 함께 머물렀다.

지슬에 담긴 묵직한 의미

영화에서 지슬은 늘 누군가로부터 다른 누군가에게로 건네진다. 한 이병이 몰래 감춰두었던 지슬을 굶주린 박 일병에게 건네고, 박 일병은 헛간에 갇힌 순덕을 위해 역시 몰래 지슬 하나를 챙긴다. 순덕 어멈은 집을 나서며 잔뜩 싸온 지슬을 이웃들에게 기꺼이 나눠주고, 무동은 어머니가 남긴 지슬을 다시 이웃들에게 먹인다. 지슬은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살리는 섬의 열매다.

그래서 섬을 짓밟으러 온 이들은 지슬을 먹지 않는다. 그들은 약과 고기를 탐하며 끊임없이 죽음을 쫓을 뿐이다. 마치 지슬을 입에 대기라도 하면 더 이상 누군가를 죽일 수 없게 된다는 듯이.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영화 <지슬>의 한 장면 ⓒ 지파리 필름


이렇듯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지슬'은 그저 낯선 제주말이 아니다. 지슬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삶의 의지이자, 선과 악 그리고 삶과 죽음을 가르는 뚜렷한 경계다. 그래서 영화를 본 이들에게 지슬은 더 이상 익숙하게 알고 있던 그것이 아니다. 4.3을 떠올리게 하는 묵직한 기억이자, 아마도 우리 모두가 오래도록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일런지 모른다.

영화가 어렵게 내민 화해의 손길

영화가 끝나고 작은 극장 안에 옅은 조명이 켜졌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말라버린 눈물을 닦아내고 몸을 일으켰다. 마치 어둡고 깊은 동굴 안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나는 그 뒤로도 한참을 두려움에 떨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죽음은 '겨우' 스무 명 남짓한 이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죽어간 이들이 자그마치 3만여 명, 그 무렵 섬 사람의 9분의 1에 달하는 수였다고 한다. 미군 정보보고서조차 이를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 학살 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이라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영화는 그 죽음의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아마 죽인 쪽도, 또 죽어간 쪽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빨갱이의 손에 죽었다는 어느 서북청년단원의 고백도 그 숱한 죽음을 설명할 수는 없다. 영화가 다시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들 각자가 답해야만 한다. 똑같은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영화는 제의(祭儀)의 순서를 밟고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뜻밖에도 섬에서 죽어간 모든 이들이다. 이유도 모른 채 죽음을 좇다 결국 그 섬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악한 자들의 원혼마저도 영화는 위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아마도 오랜 고민 끝에 내린 힘든 선택이었을 것이다.

부디 이 영화가 어렵게 내민 화해의 손길이 오랜 세월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온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은 마땅히 국가가 해야 할 몫이다. 그날로부터 예순다섯 번째 4월 3일이 다가오고 있다.

지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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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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