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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볕이 좋았던 지난 16일, 서울 용산 철도회관으로 향했다. 녹색당 대의원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왜 굳이 황금 같은 주말에 재미없기로 유명한 정당 대의원대회를? 게다가 기자는 녹색당 당원도 아니다.

녹색당의 정식 이름은 '녹색당+(녹색당 더하기)'. 지난 4월 총선에서 정당법상 정당 명칭을 유지하기 위한 2%득표 조항을 못 채워 법적으로 해산했다. 동일 이름을 쓸 수 없어 불가피하게 더하기(+)를 붙였다. 그러나 녹색당이 더한 것은 이름만이 아니었다. 국내는 물론 세계 정당 역사상 처음으로 대의원 전원을 추첨으로 선발했다.

16일 치러진 녹색당 대의원대회는 '추첨대의원'들이 처음으로 대의원대회를 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열렬한 '추첨 민주주의(sortition democracy)' 지지자인 기자, 어떻게 '구경'이라도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전원 추첨으로 대의원 선발한 녹색당

물론 선거 대신 '추첨'이라는 방식으로 대의기관을 구성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다. 아주 멀게는 고대 그리스 민회의 대의체로 알려진 보울레(boule)는 10개 부족에서 추첨으로 선발한 500명으로 구성되었고, 베네치아와 피렌체, 스위스의 한 주에서도 추첨제가 존재했다. 오늘날 추첨이라는 전통이 가장 확실하게 남아 있는 사례는 바로 '배심제'다. 보통 사람들 중에서 추첨을 통해 선발된 배심원단은 한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는 결정권을 갖는다.

'추첨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와 주장이 가장 간명하게 정리된 책. 미국 하원을 추첨으로 구성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칼렌바흐와 필립스는 의회는 국민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85년에 쓴 글을 필자와 이지문 박사가 공동 번역했다.
▲ 책 <추첨민주주의> '추첨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와 주장이 가장 간명하게 정리된 책. 미국 하원을 추첨으로 구성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칼렌바흐와 필립스는 의회는 국민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85년에 쓴 글을 필자와 이지문 박사가 공동 번역했다.
ⓒ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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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첨민주주의는 사회통계의 논리와도 유사하다. 우리가 5천만명이나 되는 국민들이 누굴 지지하고, 어떤 의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려 할 때 5천만명 모두에게 묻지 않는다. 대신 잘 설계된 할당표집을 통해 작게는 5백 명에서 많게는 2천명 정도를 무작위로 골라내, 그들의 의견으로 전체 5천만명의 의사를 '추정'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과학적인 의사추정방식이다. 

그런데 만일 무작위로 선택된 샘플에게 단지 의사만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안건을 진지하게 토론하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의회가 무엇보다 국민 전체의 의사를 반영하는 곳이어야 한다면 이것보다 의회의 이상에 걸 맞은 제도가 있을까? 무작위 추출을 통해 전체 구성원과 가장 닮은 '전체의 축소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이 의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대통령과 지방자치단체장과 같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행정수반은 그렇다 치더라도, 의회는 전체 국민의 의사를 가장 왜곡 없이 반영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민주주의와 동일시하는 '선거'라는 제도는 '보통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돈이 많다거나, 유명하다거나, 조직세가 튼튼하다거나, 심지어 잘생겼다는 이유로 '특별한 사람'을 선출한다.

이렇게 선거로 만든 의회는 소수 엘리트들만의 독점물이 되는 것은 예사일뿐더러, 선거와 재선 과정에 필요한 막대한 예산은 의회공백 상태와 부패가 싹트는 이유를 만든다. 보통 사람도 정치를 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있다면, 의회만큼은 누구나 선출될 확률이 동일한 추첨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이것이 '추첨민주주의'의 기본 아이디어다.

국내에서는 몇몇 시민단체가 추첨으로 운영진을 선발하고 있으며, 정당 중에서는 2009년부터 진보신당이 대의원 10%를 추첨으로 선발하고 있다. 그러나 추첨민주주의의 기본 발상이 전체 모집단과 가장 근접한 축소판을 만드는데 있다는 점에서, 10% 할당만으로는 추첨민주주의의 장점이 살아날 수 없다. 10% 이내로 제한된 추첨대의원은 자신이 참여해 전체 의사가 바뀔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 어려우며 기존 정파관계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보신당의 추첨대의원은 출석 가능성조차 항상 의문시 되어 왔다.

그런데 녹색당에서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적극적 조치의 일환으로 일정 비율을 할당한 것 외에는 전체 대의원 모두를 추첨으로 선발한 것이다. 선출방법은 지역마다 천차만별이었는데, 당원 이름을 모두 적은 원판을 돌려 선발한 지역, 사다리타기를 한 지역, 종이비행기를 날린 지역 등 다양했다. 이렇게 선발된 총 140명의 대의원. 지난 녹색당 대의원대회는 이상적으로는 가장 민주주의에 가깝지만, 그 효율성이 의심받았던 추첨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첫 무대였던 셈이다.

좌충우돌 의장 선출기

녹색당은 부의장으로 추천받은 4명의 대의원 중 3명을 가위, 바위, 보로 선출했다.
▲ 부의장을 선출하고 있는 녹색당 대의원들 녹색당은 부의장으로 추천받은 4명의 대의원 중 3명을 가위, 바위, 보로 선출했다.
ⓒ 손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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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대의원대회장에 들어선 것은 시작 시간인 오후 2시 정각이었다. 정당 대의원대회는 전국에서 대의원들이 참석하기 때문에 제 시간에 시작되는 사례가 거의 드물다. 게다가 녹색당 대의원들은 '추첨'으로 선발되었으니 정족수(대의원 전체 정원의 50% 이상 참석)를 채울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2시 대의원대회 장소에는 이미 꽤 많은 대의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눈대중으로 봐서는 이미 정족수는 넘어선 것으로 보였다. 임시 사회자의 진행으로 대의원대회에 대한 소개와 지역별로 참석자들의 인사가 있었고, 오늘 다룰 의제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제 본격적인 회의에 앞서 의장을 선출하는 순서.

"의장으로 추천하실 분?" 잉? 그렇다. 의장을 내부적으로 미리 선발해 놓고 대의원들의 추인을 받는 다른 정당과 달리 녹색당은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여기저기서 의장 추천이 들어왔다. 그러자 이번엔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추천받은 사람은 세 명인데, 이 중 누구를 의장으로 할지가 전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번째 고비는 다른 두 명의 피추천자가 사양하면서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다음으로, 부의장 추천하실 분?" 산 넘어 산이다. 이제 3명의 부의장을 선출해야 한다. 또 여기저기서 추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추천받은 사람은 총 4명. 이번엔 이 4명 중 3명을 뽑을 방법에 대한 설왕설래가 오갔다. 제안된 여러 방법 중 거수로 선택된 방법은 '가위, 바위, 보.' 웃음이 터졌나왔다. 추천받은 4명은 앞으로 나가 치열한 가위, 바위, 보를 해야 했다.

"다음은 서기 한 명을 선출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자원 하실 분?"

누가 손을 들겠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막 스쳐갈 즈음, 세 명이 손을 들었다. 이것 봐라? 의장보다 인기 있는 서기라니. 다른 정당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어쨌거나 3명은 다시 가위, 바위, 보.

본회의에 앞서 진행된 '모둠 토론'

자, 벌써 한 시간이 흘렀다. 이제 곧 대의원대회가 시작되나 생각한 순간, 예상치 못한 순서가 끼어 있었다. 이른바 모둠 토론. 녹색당은 규모가 큰 정당은 아니지만, 전체 대의원 숫자는 140명에 이른다. 특히 평소 당 활동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당원은 의제가 낯설 수도 있을 터. 이런 점을 고려하여 10명 정도로 구성된 소그룹에서 오늘 의제에 대한 토론을 먼저 진행하는 것이다.

"모둠 토론은 한 시간입니다. 시간 꼭 지켜주세요."

사회자의 당부가 이어졌다. 대부분 '선수'들로 이루어진 다른 진보정당 대의원들을 떠올려 볼 때, 한 시간은 너무 길다 싶었다. 타 진보정당에서는 대부분 대의원 각자가 자신이 속한 지역위원회나 정파별로 의제에 대한 입장을 정해 참석하기 때문에 한 시간이나 사전 토론할 이유가 없다. 본판의 표 대결에만 온갖 신경이 쏠린다. 

그러나 슬쩍 지켜본 결과, 녹색당의 모둠 토론은 상당히 진지하게 진행됐다. 의제에 익숙하지 않은 대의원들의 질문과 다른 대의원들의 해설도 오고 갔고, 서로 다른 의견도 치열하게 논쟁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추 한 시간이 지났지만, 토론을 이미 끝낸 모둠은 거의 없었다. "자자, 말하는 사람만 하지 말고, 모두가 한번 이상 의견을 냅시다"라는 소리도 간간이 흘러 나왔다.

그렇게 다시 한 시간이 지나고 이번엔 정말 대의원대회가 시작되었다. 한 시간 전에 뽑은 대의원대회 의장이 사회를 봤다. 의장이 밝힌 참석자는 총 140명의 대의원 중 88명(63%). 정족수를 못 채울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참석율은 다른 정당과 엇비슷했다. 추첨민주주의에서는 출석하지 않은 대의원도 '전체 구성원 중 그 의제에 관심이 없는 이들의 비율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서울, 인천, 경기 등 가까운 지역 대의원의 참석률보다 먼 거리에 있는 지역 대의원의 참석율이 높았다는 점이다. 경남, 대전, 충북 지역과 소수자 할당인 청소년, 장애인 대의원은 100% 참석율을 기록했다.

수정안, 현장 발의안, 댐 건설과 2014년 지방선거와 관련한 결의문 2개를 포함해 10개의 안건이 토론되었다. 사전마당과 모둠 토론을 제외하면 순수 대의원대회가 진행된 시간은 2시간 30분. 통상 밤을 새우기 일쑤인 다른 정당 대의원대회에 비한다면 신속한 진행이긴 하지만, 신생 정당으로 첨예한 갈등적 의제가 없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적절한 수준이다.

추첨으로 선발된 대의원들은 의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사전에 다양한 의견을 정리하기 위해 모둠토론을 진행했다.
▲ 모둠토론 추첨으로 선발된 대의원들은 의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사전에 다양한 의견을 정리하기 위해 모둠토론을 진행했다.
ⓒ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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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제에 대한 이해도도 선거로 선출된 타 정당 대의원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는 사전 모둠토론에서 해당 의제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오고 갔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결과적으로 일반 당원 중에서 무작위로 선발한 대의원들의 첫 회의는 무난한 합격점을 받았다.

녹색당의 실험.....여전히 남은 과제들

물론 추첨대의원대회에도 향후 개선해야할 점이 없지는 않았다. 첫 대의원대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의원대회 의장과 부의장, 서기 선출 방법은 미리 고안해 효율성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일반 당원 사이에서 검증된 이들이 추천되기는 했지만, 사전에 추천을 받는 방식도 고려해봄직 하다.

또한, 당내 최고대의기구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갈등적 의제를 실질적으로 논의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논의와 대책이 필요한 의제들은 각 지역위원장 등으로 구성된 집행력을 상징하는 운영위원회로 넘겨졌다. 일상적인 안건들의 경우 크게 문제가 없지만 내부갈등의 소지가 있는 의제는 운영위원회로 넘겨지기보다 대의원대회에서 실질적인 결정이 가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녹색당이 실험한 추첨대의원대회는 선거로 선출하는 다른 정당의 대의원대회보다 결코 그 논의수준이나 결정의 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선거 대의원대회와 거의 유사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한다면 굳이 복잡하게 추첨이라는 방식을 진행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녹색당의 실험은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추첨민주주의론에서 주장하듯이, 평범한 당원들이 당의 주요 의제를 실질적으로 결정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다시 지역에 내려가서 당의 기층을 더욱 활성화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게다가 매년 교체되는 추첨대의원은 관성화로부터는 자유롭지만 이들의 출석율은 당의 내부 활력에 크게 영향 받는다. 첫 대의원대회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무난하게 정족수를 넘겼다하더라도, 앞으로 당의 내부 활력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대의원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될 수 있다. 

당내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델 될 수 있나?

추첨으로 구성된 대의체는 무작위로 선발되며 매번 구성원이 교체되기 때문에 정파나 계파관계에 고정된 기존 선거 방식의 대의체와는 질적으로 구별된다. 정파간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대의기구의 역할이 사라진 진보정당에서 내부민주주의를 구현할 유력한 대안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 표결중인 추첨대의원 추첨으로 구성된 대의체는 무작위로 선발되며 매번 구성원이 교체되기 때문에 정파나 계파관계에 고정된 기존 선거 방식의 대의체와는 질적으로 구별된다. 정파간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대의기구의 역할이 사라진 진보정당에서 내부민주주의를 구현할 유력한 대안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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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거의 모든 언론이 주목하지 않았던 녹색당의 실험은 앞으로의 성공 여부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기성 정당은 물론 진보정당 역시 내부의 정파, 혹은 계파 정치로 인해 당내 민주주의가 숨 막혔다.

특히 지난 통합진보당 사례에서 보듯 진보정당의 경우, 대의기구가 당원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심의와 소통, 결정의 기능을 거의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정파관계를 따라 중앙위원과 대의원이 선출되기 때문에 당선된 대의원의 정파별 비율과 출석율을 따져보면 토론 이전에 결정내용을 미리 추정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런 점에서 중앙위원회와 대의원대회의 질적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선거로 구성되는 우리 국회의 성격도 동일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일반 당원 중에서 무작위로 선출한 당원들은 기존 선거방식에 비해 심의를 통해 입장을 바꿀 수 있는 가변적인 성격을 지닌다. 설령 추첨으로 정파멤버십을 가진 대의원이 선발될 수 있더라도 전체 대의원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고려할 때 지금의 선거 방식에 따른 구성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를 지닌다. 이렇게 된다면 제대로 된 토론한번 하지 않고 각자의 입장에 따라 시간 끌기 등의 전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토론을 할 가능성이 확보된다.

물론 이것이 현실 가능한지, 새로운 당내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파급될 수 있을지는 그것을 현실에서 보여주는 경험적 사례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아직은 가진 것이 없어서 갈등이 없는 녹색당이 단지 추첨대의원대회를 잘 치러낸 것 이상의 것을 보여줄 수 있느냐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국회의원 한 명 없는 신생소수정당 녹색당의 진지한 실험에 찬사를 보낸다. 새로움에 도전한 정치적 상상력 없이 현실에만 머리 박고 있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 답답하지 않은가?


태그:#추첨민주주의, #녹색당, #대의원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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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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