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은 한국야구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완벽하게 실패한 대회였다. 앞선 두 번의 대회에서 각각 4강과 준우승의 호성적을 기록했던 대표팀은, 이번엔 1라운드에서 예선 탈락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지난 5일 대만과의 1라운드 최종전에서는  3-2로 역전승을 거두며 네덜란드-대만과 같은 2승 1패를 거두고도 득실차에서 밀려 조기 탈락이 확정됐다. 8회 강정호의 역전 투런 홈런과 오승환의 마무리 세이브에도 누구도 웃지 못했다. 어쩌면 한국야구 사상 가장 '슬픈 역전승'으로 기억될 만한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예상치 못했던 네덜란드와의 첫 경기 대패가 끝내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한국야구는 이번 대회에서 준비과정부터 사실 문제가 많았다. 대표팀 구성은 순탄하지 못했고 기대했던 최상의 라인업을 구축하지 못했으며 팀 분위기도 어딘가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여기에 대회에 접어들며 생각지 못한 변수들까지 속출하면서 대표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뒤늦게 위기의식을 느낀 대표팀이 집중력을 발휘하며 2연승으로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냈지만 이미 흐름은 되돌리기 어려운 지경까지 치달은 뒤였다.

한국야구는 2000년대 이후 국제대회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듭했다.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06 WBC 4강, 2009 WBC 준우승,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하지만 거듭된 성공은 알게 모르게 대표팀에 자신감을 넘어 자만심을 불러온 측면이 있다.

한국야구, 국제무대서 강호 위상 가진 것은 '팀코리아' 정신에 있다

알고 보면 한국야구가 국제무대에서 강호의 위상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올림픽과 WBC에서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전력의 우위가 아니라 국제대회에서 한국야구 특유의 '팀코리아' 정신에 있었다.

한두 명의 슈퍼스타에 의존하기보다는 팀이기에 강한 것이 단체스포츠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앞서는 미국이나 일본같은 강호들을 상대로, 한국은 한발 앞서 뛰는 기동력과 탄탄한 수비-불펜의 조화, 확실한 목표의식을 통한 팀워크로 똘똘 뭉쳐 이변을 연출해왔다. 여기에 병역혜택이라는 당근도 무시할 수 없었다. 우리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서 악착같이 이겨보겠다는 '도전자'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기에 실력 이상의 저력이 나올 수 있었다.

이번 대표팀은 사실 출발부터 꼬였다. 류현진과 추신수 같은 메이저리거들이 팀 적응의 문제로 불참했고, 김광현, 봉중근 같이 국제경험이 풍부하던 주력 선수들이 줄줄이 이탈했다. 대표팀 최종엔트리가 발표된 이후에도 부상 등으로 선수교체가 속출했다.

특히 마운드에 집중된 전력누수는 이미 대회 전부터 큰 우려를 자아냈다. 일부러 태극마크을 기피했다고 하기에는 어렵지만 이번 대표팀의 팀워크나 WBC에 대한 동기 부여가 예전만못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번 WBC에는 병역혜택도 없었고, 지난 대회에서 4강 이상의 호성적을 거둔 대표팀이 오를 수 있는 고지는 우승밖에 없었지만 전력은 역대 최약체였다. 처음부터 선수단이 화곡한 목표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클 수밖에 없었던 대표팀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이 1라운드에서 탈락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이 또다른 함정이었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예년과 달리 껄끄러운 난적인 일본을 피해 네덜란드, 호주, 대만과 함께 한 조에 편성됐다. 한국이 전력누수에도 B조 최강으로 평가됐고, 1라운드 정도는 가볍게 전승으로 통과하리라고 예상했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은 물론이고 내노라 하는 야구전문가와 팬들까지 일찌감치 마음은 일본에서 열리는 2라운드로 향해있었다.

한국야구 사상 최대의 악몽 중 하나로 남아 있는 2006년 도하 참사도 바로 그러한 자만심에 비롯됐다. 한국은 상대의 수준을 너무 경시했고 제대로 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지난 두 번의 WBC를 거치며 어렵더라도 막상 대회가 닥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안이한 발상이 화를 불러왔다. 1라운드 탈락의 결정적인 빌미가 된 네덜란드전이 바로 그러했다.

네덜란드의 전력이 예상보다 강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가 5점차로 영봉패를 당해야 할 수준도 아니었다. 우려했던 마운드의 전력누수보다 오히려 타선과 수비에서의 기본적인 플레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패배를 불러왔다. 추신수의 공백에도 역대 최강이라던 타선은 연습경기에서의 부진에서부터 이미 우려를 자아냈다. 특유의 악착같은 모습이 실종된 채 제대로 된 찬스도 몇 차례 만들지 못했고, 견고하던 수비는 수준 이하의 실책을 남발했다. 결국 네덜란드전 대패가 남긴 부담감은 최종 대만전에서도 대승에 대한 부담감으로 이어졌고 비슷한 실수를 연발하게 했다.

WBC 참사,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한국야구에겐 몸에 좋은 쓴약

WBC 참사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쩌면 한국야구 전체로 봐서는 몸에 좋은 쓴약이 될 수도 있다. 이번 대회를 통하여 한국야구는 국제대회에서 영원한 강자는 없다는 진리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준비되지 못한 강자에게 요행이란 없다는 것을 깨우쳐준 것은 연이은 성공에 만 도취되어 있던 한국야구에게 좋은 자극이 될 것이다.

이 기회를 통하여 제도적인 면도 다시 개선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전 시즌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우승팀에게 대표팀 감독을 강제로 떠맡기는 방식은,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면에서 책임감 있는 대표팀 운영을 기대하기 어렵다. 병역혜택에 대한 보완도 필요하다. 국제대회에서 병역혜택을 받은 선수들의 경우, 대표팀 참여를 기피하면 병역혜택을 박탈하거나 제재를 가하는 규정을 보완하여 추신수처럼 아쉬울 때는 당근만 바라다가 막상 혜택을 받은 뒤에는 '먹튀'로 돌변하는 얌체형 선수들이 발생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미국야구대표팀이 최강의 선수구성에도 왜 그동안 WBC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는지, 한국이 객관적인 전력에서 앞선 일본이나 쿠바 같은 강호들을 상대로 뛰어난 경기를 보여줄 수 있었는지, 이번 대회는 한국이 희생양의 입장이 되어 대리체험해보는 시간이었다고 할 만하다. 준비되지 못한 한국야구에게 이번 1라운드 탈락은 이변이 아닌, 예고된 현실이었다.

이제는 현실을 인정하고 바닥에서부터 새롭게 도전할 때다. 하지만 한 번의 실패가 곧 한국야구의 추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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