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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가 말했던가. 지식인의 역할은 '자명해 보이는 원리들'에 대해서 새롭게 질문하고, 행위와 사고의 방식과 습성을 흔들어놓으며, 상투적인 믿음을 일소하고, 규칙과 제도들을 새롭게 파악하는데 있다고.

아무리 자명해 보이는 원리들이라 하더라도, 과감하고 새롭게 의문을 제기하고 질문하는 게 지식인의 역할이라 한다면 배병삼 영산대학교 교수가 최근 내놓은 책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는 바로 미셸 푸코의 빛나는 말처럼, 우리에게 너무나 '자명한' 유교에 대해서 '새롭게' 질문하는 책이다.

유교 다시 읽기
▲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 유교 다시 읽기
ⓒ 녹색평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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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다산 정약용의 정치사상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유도회(儒道會) 한문연수원에서 홍찬유 선생을 만남으로써 한문과 고전 독법을 배워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저자가 거쳐 온 이런 배움의 여정이 고전을 다루면서도 정치 사회적인 관점을 놓지 않고 있다.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 역시, 다양한 질문과 폭넓은 사유를 통해 유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유교의 자명함은 '위민사상' '민본주의' 그리고 '충효' '삼강오륜' 등이다. 과연 이런 개념과 표상들이 유교의 근본 가르침과 맞느냐를 질문한다. 그러한 말들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자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유교는 조선 500년을 지배한 이데올로기였지만 조선의 멸망을 재촉했으며, 오늘날 제사와 같은 의례에 잔재가 남아있을 뿐, 이미 형해화 되어버린 '누추한 전통'에 불과하지 않은가.

루쉰은 "예교가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했고, 김경일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호기롭게 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다. 유교는 지난 100년 '진보의 걸음을 가로막고, 근대화의 소매를 붙잡는 수구의 원흉'이었다. 그러나 유교를 역사의 전면에서 퇴출시키고 난 뒤의 오늘, 이 땅은 진정 아름다운가. 저자는 몸서리치듯 '지금 여기'를 보여준다.

서양이라는 북극성을 향해 종종걸음 쳐온 길에는 황폐한 땅과 피폐한 사람들만 남았다고. 물질적 성취는 고루 나눠지지 못하고, 자본주의가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는 오늘. 이 땅은 부정의와 불균등·불평등으로 몹시 피로하다고, 이미 농업은 궤멸된 지 오래이며, 빈농의 자식인 노동자들은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에서 목을 맨다고, 한겨울에 노숙자들은 제 손으로 만든 '골판지 관' 속으로 들어가 칼잠을 자고, 청소년들은 늦은 봄 쏟아지는 꽃잎처럼 제 몸을 마구 내던진다고.

유교와 생태주의

그래서 저자는 '21세기도 10여 년이 지난 오늘, 유교를 호출한다'고 했다. 호출하는 사람을 자임한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이 책이 꾸려진 계기가 격월간지 <녹색평론>과 만나면서 비롯됐다고 했다. '운명적인 만남'이란다. 저자는 '녹색이야말로 유교의 본령'이라며, 유교에 깃든 '과거속의 미래'와 회색문명 속에서 녹색의 길을 모색하는 <녹색평론>의 만남은 그 자체로 필연적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러한 관점과 시도가 참으로 반가웠다. 사람들이 굳게 가진 고정관념을 비집고 들어가 틈을 내고, 그 안에 흙을 채우고 씨앗을 뿌려 꽃을 피우는 작업이 곧 지식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도 '생태의 눈으로 <논어> 읽기'이다. 논어의 한 대목을 해석하는 다음 구절에서 저자의 생태학적 고찰을 엿볼 수 있다.

공자가 개천에서 물을 보고 말했다. "이렇구나, 흘러가는 것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흐름이여!" (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논어≫, 9 : 16

(중략) 공자는 순간 개천을 재발견한 것이다. 풍경처럼 존재하던 개천의 물이 어느 순간 자연의 주인공이 되어 불끈 앞으로 돌출하고, 도리어 그간 세계의 주인공이던 '나'는 물가에 선 손님으로 쪼그라드는 뒤집히는 체험을 한 것이다. 고작 개천에 불과했던 물 흐름이 갑자기 천지자연의 '자연스러움'을 체현하고 있음을 목도한 것이다. 우주의 중심이 나(사람)가 아니라 저 흘러가는 물임을, 물속에 자연의 진리가 흐르고 있음을 문득 깨닫고 토로한 것이다.(본문 17쪽 중)

위민과 민본은 허구다

저자는 지배자들이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爲民)사상, 즉 '위하여 살기'의 허구성을 지적하는데 바로 이러한 생태학적인 측면과 통한다. 우리는 대개 건강을 '위하여' 먹고, 내일을 '위하여' 자는데, 이는 결국 먹기와 잠자기가 나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공자의 공자다움은 무엇을 '위하여' 살지 않은데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식사시간엔 '먹기'가 주인이요, 수면시간엔 '잠자기'가 주인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개천(자연)도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존재할 뿐이라는 생태학적 인식의 전환에서 공자의 인(仁) 사상이 있음을 강조한다. 극기복례(克己復禮·단독자로 사는 나를 이겨내고, 상대방과 더불어 함께 함)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그동안 유교 이념으로 알고 있는 위민사상이 공자와 맹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상이라고 했다. 위민은 곧 군주가 국가의 소유자이며, 자기 소유물을 백성들에게 베풀 적에야 '인민을 위한다'는 말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유교 사상과 명백히 배치된다는 것이다. 유교 사상은 '위민(爲民)'이 아니라 여민(與民)이라는 것. 여(與)는 '더불어, 함께'라는 뜻이다.

여민은 인민과 군주가 '더불어서' 국가를 구성하며 또 정치를 '함께' 행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맹자가 말하는 천하국가는 군주의 사유물이 아니라 공동체(公物)이며, 군주의 지위란 그러므로 공동체의 경영을 위탁받은 관리자에 불과하다는 함으로써, 유교가 결코 진보를 가로막고 봉건적인 체제를 수호하는 낡은 사상이 아니라, 반대로 이미 오래 전에 매우 진보적인 정치사상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민본(民本)은 동양사상 전반에 퍼져있는 포괄적 사상이지, 유교사상에만 한정하는 사상이 아니며, 또한 세상 어느 정치사상치고 인민을 근본으로 삼지 않는 사상이 있냐고 반문한다. 특히 민본주의는 일본이 '데모크라시'를 번역할 때, 천황제를 두고서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으니까, 억지로 끌어온 번역어가 '민본주의'라고 하며 유교와의 연관성을 뿌리치고 있다.

유교에 충효는 없다

국가가, 또는 권력이 충효를 이용하면 매우 천박하고 질 낮은 사회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독재 권력은 국가를 사유화하면서 국민들에게 충과 효를 강조하며 권력에 의심을 품거나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기제로 활용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충효가 유교사상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이상, 유교는 사라져야 할 유산이며,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사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효도를 통해 부모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워서 군주(국가)에게 충성하라.'는 논조가 <논어>에는 단 한 곳도 없다고 밝힌다. 유교에서 말하는 충(忠)은 각각 맡은 제 소임을 다하는, 자아성찰적 개념이다.

그러니까 충의 본래 의미는 군주에 대한 충성,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누구든(임금조차도, 아니 임금부터) 제 맡은 일에 성심을 다하는 충실성, 성실성을 뜻한다.(본문 68쪽 중)

도리어 '충효'라는 묶음말은 법가사상인 <한비자> 제20편의 제목으로 처음 등장하며, 이 법가사상이 한나라 초기 동중서가 제국의 통치 원리로 받아들였으며, 이후에 그 쓰임이 관습화됐다. 이는 특별히 일본의 에도 시대에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고 한다.

이후 일본적 토양에서 충효는 멸사봉공, 대의멸친, 상명하복 등의 무시무시한 일본식 가치와 군국주의적 언어로 분화되어, 40년 간 일제 식민지 지배를 받는 동안 이것들이 마치 우리 전통인양 행세해 왔다는 것. 저자는 외치듯 말한다.

"일본은 유교국가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유교에 충효는 없다."

삼강과 오륜,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대개 삼강과 오륜을 묶어 마치 유교사상의 대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는데, 삼강과 오륜은 그 의미와 사상이 완전히 다른 언어임을 이 책은 설파한다. 요약하면, 삼강은 한나라 통치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만든 동중서의 작품이고, 오륜은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뚫고 새 시대를 열어가려고 맹자가 제시한 신문명 프로그램이었다는 것이다.

삼강은 군주·아비·남편이 벼리(주主)가 되고, 그 상대인 신민·자식·아내는 종(從)이라는 가르침으로 이 주종관계는 불변하는 것이다. 군신관계와 마찬가지로 가족 내의 부자나 부부 사이마저도 지배 복종·상하 체제로 기획했다는데, 여기에서 충신·열녀·남존여비 등 각종 봉건적인 윤리가 등장하게 된다.

이에 반해 오륜은 다섯 가지 인간관계의 원리를 밝혀놓은 것이다. 그 원리가 친(親)·의(義)·별(別)·서(序)·신(信)이다. 이 원리는 삼강처럼 어느 일방에서만 적용되는 규범이 아니라 부자, 군신·부부·장유·붕우 쌍방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 오륜은 삼강과 달리 상하관계를 상정하지 않으며 도리어 상호관계, 상보성을 필수 요건으로 하기 때문에 맹자의 '더불어' 함께 하는 여민의 다른 모습인 것이다.

도무지 양립할 수 없고, 짝을 이룰 수 없는 삼강과 오륜을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같은 유교의 가르침으로 사용해 왔으니, 나는 얼마나 무지했던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매우 래디컬한 유교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었다.

다시 여민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생산이 적은 것을 근심하지 않고,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는 것을 근심하노라"(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논어>16 : 1)는 공자의 말은 성장보다는 분배를 강조한 말이며, 홀아비와 과부, 독거노인과 고아들을 우선 보살피라고 한 맹자의 말은 곧 오늘날 복지사회의 모습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지 않은가?

맹자는 단 한 번도, 군주에게 백성을 위하여 정치하라고 권고한 적이 없었고, 애초부터 맹자에게 나라의 주인은 인민이고, 군주는 그 인민을 대리하여 공공의 업무를 경영 관리하는 자라는 유교의 관점도 주권재민, 대의정치를 대표되는 오늘날 민주주의와 다를 바 없다.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사상 언술은 아무래도 '여민'인 것 같다. 맹자의 사상은 여민사상이고, 맹자는 치밀하게 그 사상을 제도 속에 담았는데, 그것이 여민체제이다. 사상을 뒷받침할 제도가 갖추어지고 그것을 운용해야 비로소 정치가 되는 것이므로. 또한 맹자가 꿈꾼 이상 국가의 모습도 중앙집권적인 단일 국가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다양한 영역들이 모여 구성하는 연방제 국가로 저자는 보았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여민' 속에 감춰져 있는 '미래적 가치'인 것이다.

시민의 동의 없는 국가 권력의 행사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후유증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해서 요즘 '선진' 민주주의 사회에서 새롭게 화두가 된 말이 바로 '국민과 함께(with the peaple)'입니다. (중략) 링컨이 말한 민주주의 3대 원리(of the peaple, by the peaple, for the peaple)에 이어 'with the peaple'이 네 번째 원리로 등장했다고 하기도 합니다.(남문희·'편집국장의 편지' <시사IN> 145호 중)

여기 선진 민주주의 사회의 새로운 화두라는 'with the peaple'을 '인민과 함께'라고 번역할 수 있다면, 이것은 맹자가 제시했던 새로운 정치 체제로서 여민(與民), 곧 '인민과 함께-더불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본문 184쪽 중)

덧붙이는 글 |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배병삼 | 녹색평론사 | 2012.09.20 | 1만5000원)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

배병삼 지음, 녹색평론사(2012)


태그:#유교, #충효, #삼강오륜, #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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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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