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소록도병원 앞에서 바라본 소록대교
 소록도병원 앞에서 바라본 소록대교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고흥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27번 국도를 따라 10분쯤 달렸을까. '녹동 2교차로' 안내표시판이 나타났다. 우측으로 나가면 도양·녹동항, 직진하면 금산·소록도(小鹿島)라 적혀 있었다. 말로만 듣던 '소록도'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심호흡과 함께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렸을 때, 아니 스무 살이 넘어서도 소록도는 '금단의 땅'으로 '가서는 안 되는 섬', '갈 필요도 없는 무서운 섬'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결혼 전 아내에게 "초보 간호사 시절 동료들과 국립소록도병원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소록대교를 지나는데 푸른 바다에 보석처럼 박힌 섬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소록도였다. 가슴이 뛰면서 예전 나병(한센병) 환자들 모습이 환상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어렸을 때 거리에서 봤던 그 환자들이었다. 어린 눈에도 그들은 지팡이를 휘두르는 상이군인보다 무서웠고, 구걸하는 거지보다 불쌍하게 보였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아무 법문에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한하운의 <벌(罪)>)

해안을 따라 S자로 조성된 산책로
 해안을 따라 S자로 조성된 산책로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그랬다. 그들이 '문둥이'로 불리던 시절에는 죄인도 그런 죄인이 없었다. 강도, 사기꾼도 국가가 관리하는 수용시설에서 의식주는 물론 다양한 교육을 받고 출소하는데, 그들은 피부가 문드러졌다는 죄도 아닌 죄로 친구, 이웃, 사회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옛 어른들은 우는 아이에게 '순사가 잡으러 온다!'며 겁을 줬다. 그러나 우리는 '문딩이가 잡아간다!'는 말을 더 무서워했다. 특히 보리가 패기 시작하는 초여름에는 보리밭 접근조차 꺼렸다. 문딩이가 보리밭에 숨었다가 아이들을 유인해서 간을 빼먹는다는 말을 사실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나병이 불치의 병으로 인식되었던 1950~1960년대. 당시 어른들은 나병을 하늘이 내린 형벌(刑罰)이라 하여 거리에서 유리걸식하는 나환자들을 '잘못 타고난 사회의 독버섯'으로 여겼다. 아이들은 귀신보다 나환자를 더 무서워했으며, 아낙들은 병이 옮는 것을 염려해 찬밥 한 그릇 동냥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탄식의 장소'였던 수탄장

환자와 자녀가 면회하는 모습
 환자와 자녀가 면회하는 모습
ⓒ 소록도병원

관련사진보기


국립소록도병원 주차장 입구 안내판에 "소록도는 관광지가 아니며 섬 전체가 병원으로, 한센인의 치료 공간입니다"라고 적힌 글귀를 삼가는 마음으로 3~4차례 읽었다. 700여 명의 환자와 의료진, 자원봉사자들이 살아가는 공간이어서 흥겨움이나 소란은 당연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바다를 좌우로 나누면서 해안을 따라 S자로 조성된 산책로 입구는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켰다. 수려한 풍광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감탄의 마음은 1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푸른 바다는 일제의 가혹한 학대를 피해 소록도를 탈출하다 익사한 환자들의 원귀가, 소나무 숲은 자식과 부모가 눈물로 만났던 탄식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1950~1960년대 소록도병원에서는 섬을 직원지대와 병사(病舍)지대로 나누고 2km 정도의 철조망을 쳐 경계로 삼았다. 병사지대 환자에게서 자녀가 태어나면 전염을 우려해 직원지대에 있는 미감아보육소에 격리시키고, 부모와 자녀들의 면회는 한 달에 한 번씩만 허락하였다.

이때 자녀와 부모들은 직원들의 통제하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만났으며 서로 만지거나 안아볼 수 없었다. 특히 전염을 우려해 자녀들은 바람을 등지고, 부모는 바람을 안고 서야 했다. 이러한 면회 장소를 원생들은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愁嘆場)이라 불렀다 한다. 당시 상황을 누군가는 '천벌이라면 가혹하고, 인위라면 가증스럽다'고 표현했다.

소록도 병원이 걸어온 애환의 발자취

억울하게 죽어간 환자들을 추모하는 애환의 추모비.
 억울하게 죽어간 환자들을 추모하는 애환의 추모비.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수탄장에서 병원 본관까지 조성된 산책로(600m) 주변에는 소록도의 각종 문화재 위치도와 일제강점기에 완공된 건물들(소록도 갱생원 본관, 강당, 감금실, 검시실, 만령당, 식량창고 등), 소록도에 거주하면서 우리나라 한센병 퇴치와 계몽에 큰 역할을 한 마가렛 수녀 안내문, 애환의 추모비 등이 세워져 있었다.

병원 건물 앞에 세워진 애환의 추모비는 해방(1945) 후 일본인 소장과 직원들이 물러가자 자치권을 요구하다 처참하게 학살당한 원생들을 추모하는 비였다. 수용소장 자리를 노리던 친일파 직원들이 고흥 치안대에 지원을 요청하여 원생 84명을 총과 죽창 등으로 무참하게 살해해 송탄유로 불태웠다는 것. 끔찍한 사건임에도 반세기 넘게 묻혔다가 2002년 추모비를 세웠다고 한다.

소록도병원 전신으로 일제강점기 자혜의원 모습.
 소록도병원 전신으로 일제강점기 자혜의원 모습.
ⓒ 소록도병원

관련사진보기


서양 선교사들이 1909년 광주를 비롯한 부산, 대구 등에 나병원을 개원하자, 일제는 1916년 2월 소록도의 약 1/5에 해당하는 30만 평에 나환자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자혜의원을 설립한다. 그나마 '조선나(癩)예방협회'라는 단체를 조직,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통해서였다. 시설 확장공사는 대부분 수용환자의 노동으로 추진하였다. 

자혜의원은 100여 년 역사만큼이나 많은 변천을 거듭하는데, 1934년 소록도갱생원, 1949년 중앙나요양소, 1957년 소록도갱생원, 1960년 국립소록도병원으로 개편된다. 1968년 국립나병원으로 개편하였으며 1977년 부설 간호보조원 양성소를 설치하고, 1982년 국립소록도병원으로 다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731부대' 떠올랐던 '감금실'과 '검시실'

왼쪽 상단에서 시계방향으로 감금실, 검시실, 붉은 벽돌담
 왼쪽 상단에서 시계방향으로 감금실, 검시실, 붉은 벽돌담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감금실 복도(왼쪽)와 검시대(위), 단종대(아래)
 감금실 복도(왼쪽)와 검시대(위), 단종대(아래)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중앙공원으로 향하는 도로 왼쪽에는 소록도병원과 한센병 관련 자료가 전시된 제1, 제2 전시관이 있고, 오른쪽 건물 두 동은 검시실(등록문화재 66호)과 감금실(등록문화재 67호)로 뇌리에서 사라진 으스스한 기억들을 되살려냈다. 붉은 벽돌담 높이와 모양이 중고생 시절 학교 부근에 있던 군산교도소 담벼락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검시실(檢屍室)은 1935년 건축된 붉은 벽돌집 단층 건물로 해부실과 영안실로 나뉘어 있었다. 치료를 받다가 사망한 환자를 해부하고 생식 기능을 없애는 수술을 했다니, 악명 높은 만주 하얼빈의 731부대 생체실험 전시장이 떠오르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모든 사망자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곳에서 해부절차를 마친 뒤 간단한 장례식을 거쳐 화장 후 납골당에 안치했다고 한다. 이래서 소록도 환자들에게 '3번 죽는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첫 번째는 한센병 발병이요, 두 번째는 죽은 후 시신 해부요, 세 번째는 장례 후 화장이라는 것.  

인권 탄압의 상징물인 감금실(監禁室) 역시 일제강점기 건물(1935년)로 내규를 위반한 환자를 격리·감금했던 곳. 그래서 그런지 내실은 음산하고 침침했다. 한쪽 건물에는 세 개의 방이 있는데, 굶겨 죽이는 방(5방), 매질하는 방(6방), 차갑게 해서 얼려 죽이는 방(7방) 등으로 나뉘어 있고, 그러한 야만적인 행위는 해방 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아름다우면서도 생채기가 가득한 중앙공원

 다양한 종류의 수목이 울창한 중앙공원.
 다양한 종류의 수목이 울창한 중앙공원.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일제가 원생들을 강제로 동원, 완도·득량 등에서 운반해온 기암괴석과 일본·대만 등지에서 들여온 관상수를 심었다는 중앙공원은 수목원을 방불케 했다. 아름다우면서도 생채기로 가득한 공원에는 '한센병은 낫는다'는 문구가 적힌 구라탑(求癩塔)과 세마(3M) 공적비, 제4대 수호(周防正季) 원장 동상,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가 새겨진 시비(詩碑) 등이 있었다.

남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아저씨 설명에 의하면 한센병 환자였던 한하운의 <보리피리>가 새겨진 바윗돌은 원생들이 완도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원생 40여 명이 밧줄로 꽁꽁 묶는 데 한 달 남짓, 드럼통 115개로 뗏목을 만들어 싣는 데 6개월 남짓 걸리는 등 계획에서 비를 세우기까지 2년 8개월이나 소요되었다고.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비. 비가 누워있는 게 특징이라 한다.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비. 비가 누워있는 게 특징이라 한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세마 공적비 주인공 마가렛, 마리안느, 마리아 수녀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 '3M'이란 애칭이 따라다녔던 세 수녀는 혐오스러운 환자 상처를 섣달 그믐날 떡 주무르듯 매만졌다는 것. 이들은 대한적십자사에서 '올해의 간호상'으로 선정했으나 사양했고, 수여식에 참석지 않아 고국(오스트리아) 정부가 훈장을 소록도까지 보내왔을 정도였단다.  

인생의 절반을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가 2005년 어느 날 '이제는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으니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겠다'는 내용의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남몰래 고국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소록도를 방문해서 원생들의 정성이 담긴 선물을 받고, 성금을 전달했다. 교황 방문 후부터 원생들 전용 선박과 선착장을 없애고 직원을 비롯한 일반 주민과 같은 배로 출입하기 시작했다 한다. 원생들은 기념비를 세웠고, 지금도 교황이 남긴 자유와 평등 정신을 소중히 여긴다고 한다.

산책로에서 바라본 한센인 마을
 산책로에서 바라본 한센인 마을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작은 사슴'을 뜻하는 아름다운 섬 소록도. 그러나 한센병 환자들이 강제 수용되기 시작한 1916년 이래 천형(天刑)의 땅이 되었다. 2009년 소록대교 개통으로 왕래가 자유로워졌다고는 하나 아직은 '장애의 섬'이었다. 섬의 반쪽만 방문이 허용되고 그나마 일몰 후에는 출입이 통제되고 있어서였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공원에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소록도병원을 빠져나오는데, 갑자기 목이 마르고 다리가 터벅거렸다. 해서 바다 풍광을 조망하면서 쉬었다가 오려고 보리피리 휴게소에 들렀는데, 음료수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주인아저씨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했던 말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한센병 환자들은 요즘도 자기 돈으로 짜장면 한 그릇 자유롭게 사먹지 못해요. 대부분 식당 주인이 영업에 지장이 있다며 꺼리거든요."

덧붙이는 글 | 2012년 12월 28일~29일에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소록도병원, #한센병, #짜장면, #수탄장, #단종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