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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1] 육법당 사건

1994년 1월, 서울대 법대 동창회가 개교 100주년을 맞아 동창들의 학창시절 회고와 졸업 후 인생경험 등을 담아 수상록(隨想錄)을 펴냈다. 각 기수별로 10명씩 필자를 선정, 모두 176명의 동문들이 쓴 글을 2권의 책으로 묶었다. 제1권은 서울대 건학이념인 '진리는 나의 빛', 제2권은 한국전쟁 중 피난지 부산 가(假)교사에 표어로 내걸었던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를 각각 제목으로 정했다.

이 책에는 법조계는 물론 정·관계, 경제계, 언론계, 학계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법대 동문들의 자화상이 소개됐다. 관계 인사로는 현승종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이시윤 감사원장, 김석휘 전 검찰총장, 금진호 전 상공장관, 이인제 전 노동장관, 손재식 전 통일원장관, 이규호 전 건설장관, 이선중 전 법무장관, 전·현직 국회의원으로는 이대순·김용태·곽정출·장석화·박상천 의원(직함은 당시 기준) 등이 포함됐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 표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 표지
ⓒ 경세원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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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시 언론은 이 책에 실린 글 한 편에 주목했다. 2권에 실린 법대 13회 졸업생인 한동우 동양투자금융 사장이 쓴 '육법당(陸法黨) 사건'이라는 글이었다.

한 사장은 이 글에서 "군사독재를 뒷받침 해준 머리와 손발은 대부분 서울법대 출신이었던 반면 약자의 편에 서서 권력을 감시하고 이 땅에 정의와 평화를 구현한 법대인은 드물었다"며 법대 출신들이 정통성이 없는 권력과 야합해 사회와 역사를 어지럽혔다고 일갈했다.

한 사장은 또 "부모들이 자식들을 특권층에 입적시키기 위해 법대를 지망하게 하고 자식들도 이에 동조해 법대를 선택하는 등 법대가 출세의 등용문으로 변했다"며 "사정(司正) 한파로 줄줄이 묶여가는 사람 중에 법대인이 많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사장은 이어 "진정 법대인의 일그러진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육법당 사건'을 '기소중지' 하지 말고 정의의 종을 두드리며 끝까지 추적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만 해도 3공, 5공 시절 정·관계로 진출한 인사들이 버젓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때였지만 한 사장은 이에 개의치 않고 입바른 소리를 한 셈이다. 외부인사도 아닌 법대 출신이 동문들을 향해 이같은 '쓴소리'를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서울대 법대 출신들은 육사 출신 정치군인들과 야합해 12·12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을 떠받쳤다. 당시 세간에서는 전두환이 창당한 민주정의당(민정당)을 '육법당(陸法黨)'이라고 불렀다.

[풍경 2] 국방위 회식사건

때는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6년 3월21일 초저녁 서울의 한 요정. 당시 잘나가던 고위 장성들과 현역 국회의원들이 술자리에서 난투극을 벌였다. 이 사건은 당시 박희도 육참총장(육사 12기) 등 육군 수뇌부 8명과 이세기 민정당, 김동영 신민당, 김용채 국민당 원내총무(현 원내대표) 등 여야 국회의원 10여 명이 중구 회현동 요정 '회림'에서 양주파티를 벌이던 중에 일어났다. 이를 두고 흔히 '국방위 회식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날 군부에서 참석한 인사는 박 육참총장을 비롯해 5공 초기 현역으로 대통령 경호실장을 지낸 정동호 참모차장(중장), TK 출신의 이대희 인사참모부장(소장), 12·12 쿠데타 때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진입한 구창회 육참총장 비서실장(준장) 등 모두 '하나회' 핵심멤버들이었다. 국회 국방위에선 공군소장 출신의 천영성 위원장, 남재희 민정당 의원 등이 자리를 같이 했다. 이들은 평소 국방위에서 낯을 익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국방위 회식사건'을 소개한 <동아일보> 기사 (1993.4.22)
 '국방위 회식사건'을 소개한 <동아일보> 기사 (1993.4.22)
ⓒ 동아일보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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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 이어 오후 7시 30분경 김동영 신민당 원내총무가 도착했다. 김 총무는 들어오면서 "힘 있는 거물들은 안 오고 똥별들만 먼저 모였구먼…" 하고 농반진반으로 한 마디 내뱉었다. 그는 민정당 이세가 원내총무가 안 보이자 "여당 총무는 안 오기로 했나, 이세기를 불러와"라고 소리쳤다. 비록 사석이긴 하나 '낯선 군인'들 사이에 끼어 있자니 김 총무로서는 카운터파트인 이 총무를 찾은 건 어쩌면 자연스런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 지나 이세기 민정당 원내총무가 도착했다. 그러나 정동호 차장이 이 총무를 향해 "이새끼… 총무가 뭐 이렇게 늦게 오고 그래? 그러니까 야당이 우릴 보고 똥별이라고 하지 않나"라며 쏘아댔다. 이어 동석했던 다른 군인들은 이 총무를 김동영 총무 앞으로 끌고 가 "정치를 잘해야 바깥에서도 안 떠들 거 아닌가"라고 훈계조로 말했다. 비록 군인정권 시대라고 하나 집권여당 원내총무에게 과도한 행동이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남재희 민정당 의원이 화를 참지 못해 맞은편 벽을 향해 유리컵 2개를 던졌다. 그런데 벽에 맞고 깨진 유리컵 파편에 이대희 부장 왼쪽 눈덩이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피를 본 이 소장은 남 의원 얼굴에 발길질을 날렸고, 남 의원은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이후 술자리는 순식간에 난투장으로 변했다. 이 사건 뒤 정동호 차장은 전역했고, 이대희 부장은 전방으로 전출됐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날 회식자리에서 물의를 빚은 군부 인사들은 전부 승승장구했다. 박 총장은 예편 뒤 별다른 공직에 나서지 않았으나 정동호 차장은 민정당과 민자당 공천으로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2000년엔 새천년민주당 의령·함안지구당 위원장을 맡았다. 또 이대희 부장은 예편 후 병무청장을 지냈으며, 구창회 비서실장은 당시 준장에서 대장까지 승승장구하다 1993년 봄 3군사령관을 끝으로 예편했다. 모두 육사 출신인 이들은 전두환 정권의 한 축이었다.

[풍경 3] 박근혜와 '육법당'

 29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한반도 전쟁방지와 평화 정착을 위한 종교, 시민사회 원로 및 지도자 기자회견'에서 인명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가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호소하고 있다.
 인명진 목사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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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출신의 인명진 목사는 12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육사 출신과 법조계 출신을 중용한 데 대해 "5060시대의 '육법당(陸法黨)' 생각이 난다, 박 당선인이 시야를 좀 넓혔으면 좋겠다"며 '육법당'을 거론했다.

인 목사는 이날 S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당선인이 새로운 정부에 세 명 인사하지 않았나, 안보실장과 경호실장과 국무총리, 그런데 두 분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고 한 분은 법조인 출신"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인 목사는 이어 "우리 사회에는 육사와 법조인만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시민사회가 얼마나 커졌나, 그쪽 지도자들도 있고 문화예술 지도자들도 있다"며 "이번에 인선된 분들 다 60대 후반이다, 조금 젊은 사람들을 찾아봐야 하는 것이고 또 여성도 찾아봐야 하는 것이고요… 아주 두드러지게 활동하고 있는 능력있는 분들이 많이 보여요, 이런 분들도 찾아보고 이렇게 해야 대탕평 100% 대한민국이 될 텐데…"라며 박 당선인의 인사 스타일에 우려를 표명했다.

진행자가 "김종인 전 수석, 이상돈 중앙대 교수, 벤처사업가 이준석 등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인수위 출범 이후에는 쏙 들어가고 너무 예스맨만 주변에 있는 것 아니냐"고 묻자 인 목사는 "국민들에게 신선하고 또 쓴 소리를 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이 박 당선인에게는 굉장히 좋다"며 "주변에 있는 친박이라는 분들, 오랫동안 박 당선인의 신뢰를 받았던 분들, 이런 분들 중에 쓴 소리를 하는 분들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박 당선인은 차기정부의 요인 가운데 국무총리, 청와대 안보실장, 경호실장 등 3인을 지명, 혹은 내정한 상태다. 이를 두고 야당과 언론의 반응은 그리 따뜻하지 않다. 그 하나는 '돌려막기 식 재활용 인사'라는 것. 정홍원 총리 지명자는 지난해 4·11총선 당시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장을 지낸 바 있다. 야당은 박 당선인의 인재풀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는 "대통합에 맞는 인사인지 우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하나의 지적은 '육법당' 인맥. 김용준 인수위원장이나 정홍원 총리 지명자 모두 법대 출신이며, 청와대의 김장수 안보실장과 박흥렬 경호실장은 모두 육사를 졸업한 4성 장군 출신이다. 박 당선인은 '법과 원칙'을 강조한 차원에서 법대 출신들을, 또 안보를 중시하고 '상명하복'에 철저한 집단인 군인출신들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안은 다르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육법당'의 부활인 셈이다. 박 당선인은 인명진 목사의 '고언'을 뼈아프게 헤아려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진실의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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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