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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1월 14일부터 19일까지 미국 뉴욕의 사회적 금융기관들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이 글은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한 짧은 보고서입니다. [편집자말]
빌 클린턴의 집권 초반기였던 지난 1995년, 미 연방 의회는 오래전에 만들어진 한 낡은 법률의 일부 개정안을 통과시킨다. 지역사회의 저소득층에 대한 투·융자 등 은행들의 금융서비스를 의무화한 지역재투자법(Community Reinvestment Act, 이하 CRA)이 그것이다. 기존 법이 규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약간의 불이익을 받는 방식이었다면, 개정안은 실시보고를 강제 의무사항으로 규정하고 금융 감독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금융자본의 지역투자를 법으로 '강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제도로 평가받는 CRA는 1977년에 법률이 제정되었으나, 미이행에 따른 벌칙이 솜방망이 수준이어서 사실상 유명무실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개정안은 대형은행들이 낙후지역을 대상으로 진행한 투·융자 및 금융서비스 활동내용을 은행 스스로 입증하도록 했으며, 감독기관은 그 결과를 금융기관 '평가점수'에 포함시켜 등급을 매기는 방식을 써서 피감기관들이 '안 하고는 배기지 못하도록' 강하게 압박했다.

사문화되어 있던 법률을 살아 움직이게 하기 위해 그린라이닝(Greenlining, 금융회사의 차별적 대출을 감시하는 미 시민단체)을 비롯한 낙후지역의 많은 기관, 단체들이 은행과 규제당국을 대상으로 치열한 문제제기 및 여론화 작업을 경주해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은행들이 지역 및 소득수준에 따라 레드라이닝(Redlining) 즉, 차별적인 대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효과는 놀라웠다. 사업 이행 결과가 인터넷으로 모두 공개됨으로 인해 이미지 악화를 우려한 대형은행들은 의무 실적을 맞추기 위해 앞 다투어 '짝짓기'(CDFI 등 지역기반 금융기관과 파트너십을 맺고 자금을 지원) 작업에 착수했고, 지역사정에 밝은 토종 금융기관들은 이 자금을 활용해 가뭄의 단비 같은 금융혜택을 주민들에게 제공했다.

지역에 돈이 흐르기 시작하자 낙후된 경제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지역개발을 위해 정부가 직접 재정을 투입하는 것보다 지역금융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본 클린턴 행정부의 판단이 옳았음이 입증된 것이다.

부활한 '지역재투자법'이 가져온 놀라운 효과

CRA 준수를 감시,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단체 NCRC의 누리집(www.ncrc.org)
 CRA 준수를 감시,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단체 NCRC의 누리집(www.ncrc.org)
ⓒ NC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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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안이 발효된 지 18년이 지난 지금, CRA가 미국 내 금융 사각지대를 상당부분 일소하고 지역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CRA가 2008년 금융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일부 주장이 있으나, 미 연준의 조사 결과, 서브프라임 위기를 촉발시킨 곳 대부분이 CRA의 적용을 받지 않는 모기지론(mortgage-loan) 기관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다.   

다수의 금융기관이 밀집해 있는 뉴욕시에서는 실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뉴욕시에서 취약계층에 대한 주택투자 사업을 하고 있는 컨택펀드(The Contact Fund)의 마크 리드(Mark Reed) 대표는 "CRA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가 뉴욕"이라고 말했다. 월가를 필두로 다수의 은행들이 모여 있어 취약지구 개발을 위한 투·융자 사업에 많은 자금이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저소득층 임대주택 세액공제 프로그램(Low Income Housing Tax Credit, LIHTC)이 맞물리면서 민간 건설자금이 이 시장으로 대거 유입되는 승수효과를 만들어냈다. 한 마디로, 금융자본을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해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최근 뉴욕시는 CRA의 취지를 도시재생, 청소년 범죄 등 시(市)가 당면하고 있는 주요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영역까지 확장해가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비영리단체나 사회적기업들에게 필요한 사업자금을 제공해주는 새로운 '투자' 프로젝트가 그것으로, 개인투자자를 포함하여 민간의 사적자본(private capital)을 주요 투자처로 바라보고 있는 이 새로운 사회투자 프로그램에서 특히 흥미를 끄는 대목은 투자에 따른 '인센티브' 제공방식이다.

예를 들어, 어떤 혁신기업가에게 투자가 이루어져 수익을 발생시켰다면, 투자수익에 대한 세제 혜택을 포함하여 투자자산의 가치상승에 따른 이익금 대부분이 투자자에게 귀속되도록 프로그램이 설계되어 있다. 사업성 그 자체를 담보로 사업주체와 자금제공자가 위험 및 수익을 공유하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roject financing) 기법을 공익사업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혁신채권(Social Impact Bond)의 운영방식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재정투입 없이 민간 자본을 끌어들이고 비영리단체나 사회적기업이 문제를 해결하는, 섹터(Sector)간 '공동 협치' 방식의 사업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도시재생 차원에서 뉴욕시가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노후 건물을 개량하여 에너지 효율이 높은 빌딩(Energy Efficient Building)으로 바꾸는 재건축사업이다. 금융위기 여파로 뉴욕시내의 많은 건물들이 경매시장에 쏟아져 나옴에 따라,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게 된 시(市)가 저효율의 낡은 건물을 고효율의 공간(smart place)으로 탈바꿈시키고 실업자들을 선발, 교육훈련을 거쳐 건물 관리인으로 일하게 함으로써 에너지 절감 및 고용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뜻이다.

'청소년 범죄예방' 채권에 골드만삭스가 투자한다? 

뉴욕시 녹색건물 및 에너지효율사업 PlaNYC 누리집(www.nyc.gov)
 뉴욕시 녹색건물 및 에너지효율사업 PlaNYC 누리집(www.nyc.gov)
ⓒ PlaN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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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자본을 낙후지역에 투입함으로써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고자 한 '고전적인' 투자방식이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사회투자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뉴욕시는 이러한 시도가 일정한 성과를 보일 경우, 재생에너지, 로컬푸드, 취약지구 개선 등 다양한 영역에 접목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블룸버그 시장의 최대 장점은 돈이 많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뉴욕이 가진 거대한 자본 유동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크 리드 대표는 최근 이 거대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본이익과 사회적가치의 융·복합 현상을 바라보며, 현재 뉴욕은 다양한 방식의 자본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며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건 향후 몇 년 안에 사회투자시장은 매우 큰 규모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을 피력했다.

이 '실험'의 대표적 사례가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와 뉴욕시가 함께 추진하고 있는 청소년 범죄예방 관련 사회혁신채권(SIB) 프로젝트다. 혹자는 이에 대해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주범' 중 하나인 투자은행이 정부와 국민들에게 '착한 아이'로 보이기 위한 전형적인 마케팅 전술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나아가 프로젝트가 실패할 경우, 투자원금의 75%를 뉴욕시가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면 나서지 않았을 것이라는 비판도 들린다(사업 실패 시, 골드만삭스가 투자한 돈 960만 달러 중 720만 달러를 뉴욕시가 대신 갚는 구조로 계약이 이루어짐).

내막이 어떠하든, 민간의 잉여자본을 공적 영역에 끌어들여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미국식' 투자실험이 향후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사회목적투자(Impact Investing) 산업의 전망에 대해, 뉴욕대 경영대학원의 스티븐 고데끼(Steven Godeke)교수는 "지금은 박애주의 자본(philanthropic capital)이 주를 이루지만, 상업자본의 유입이 점차 늘어나게 될 것으로 생각하며 이 산업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업의 착한투자를 촉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경제적 목적을 추구하는 기업을 오직 '규제'를 통해 강제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와 각 경제주체들의 행동패턴이 바뀌도록 유도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그 역할은 "정부의 몫"이라고 답했다. 계속해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보다 좀 더 나은 해결방법을 보여주는 것이 훌륭한 가르침인 것처럼, 먼저 좋은 선례를 만들고 이를 통해 변화할 수 있는 구체적 '계기'를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지역경제와 사회통합을 위한 '새로운 금융질서'   

미 뉴욕시 소재 뉴욕대 경영대학원
 미 뉴욕시 소재 뉴욕대 경영대학원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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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가 있는 곳에 돈이 흘러들어가야 한다"는 입법취지로 제정된 CRA가 소외된 지역의 경제 생태계를 활성화시켰듯이, 최근 전개되고 있는 사회목적투자의 흐름이 낡은 금융을 대체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지 아직은 예단하기 어렵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일련의 변화가 금융의 탐욕적 성격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환란'의 본고장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망가진 금융자본주의의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한 자연스러운 인과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난 수 년간 아니 최근까지도 여의도에선 지역재투자법의 입법 필요성에 대한 여야 의원들의 의견피력 및 발의가 이어져왔다. 단순한 찬반논쟁을 넘어 36년 전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 법률안을 우리 현실에 맞게 어떻게 잘 조율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일부에서 제기하는 은행 수익성 및 건전성 악화에 대한 우려는 이미 낡은 시대의 패러다임일 뿐이다. 낙후지역의 자본 및 신용접근성 강화는 지역경제를 발전시키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은 경제를 운영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누가 어떤 의도로 이 기제를 운영하느냐에 따라, 사회경제를 윤택하게 하는 훌륭한 시스템이 될 수도 있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처럼 무수한 사람들의 삶을 하루아침에 붕괴시킬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인류가 창제한 이 멋진 도구가 소득의 많고 적음을 떠나, 어느 곳에 살고 있건 상관없이 모두에게 골고루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 우리 곁엔 어려운 이들의 편에 서서 손을 잡아줄 '착한' 금융기관들이 많이 관찰되지 않는 것 같다. 정부 주도의 육성정책에 힘입어 사회적 기업 숫자는 많이 늘어났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자금을 제공해 줄 사회투자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외계층에 대한 공여를 포함하여 제3섹터에 대한 정부 지원은 대부분 인건비 등 소모성 예산으로 편성되어 자금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로 인해 시장논리와 정부지원의 틈새에서 많은 사회적 기업들이 자본조달을 위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양극화와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 현상이 날로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서, 파괴된 공동체와 지역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남는 곳에서 모자라는 곳으로 자금이 유입되고 흘러줘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지만, 그보다 먼저 '금융기관의 자산 건전성'과 '금융의 공공적 가치'를 함께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와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 왜 필요한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오래전에 우리 조상들이 '두레'와 '계'를 통해 자발적 호혜와 나눔의 실천을 조직화해왔던 것처럼, 소외된 이웃을 돕고 지역경제를 살찌우며 사회통합을 이루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금융질서가 조성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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