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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빌딩은 시내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타이베이의 랜드마크다.
▲ 국부기념관에서 본 101 빌딩 101 빌딩은 시내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타이베이의 랜드마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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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전에 인터넷 등의 도움을 받아 어느 곳을 둘러볼까 나름 꼼꼼히 챙겼지만, 도착해 현지인들에게 지나가는 말로 맨 먼저 묻는 게 '가장 가볼 만한 곳이 어디냐'는 질문이다. 대개 타이완 사람들은 질문을 받게 되면 장소뿐만 아니라 가는 편한 방법과 요금, 주의할 사항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심지어 볼펜과 메모지를 꺼내 그려주는 사람도 있다.

외국인으로서 일종의 '말 걸기'인 셈인데, 공항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탈 때, 달랑 목적지만 말하고 마는 데면데면한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에 그만한 소재가 없다. 오가며 만난 남녀노소 여러 사람들에게 물었는데, 답변은 이구동성 같았다. 그들이 알려준 타이베이 최고의 관광명소는 '타이베이 101 빌딩'이었다.

타이완 사람들이 꼽는 관광명소는 '타이베이 101 빌딩'

여행 계획을 짤 때, 사실 여유가 되면 가보고, 빠듯하면 굳이 가볼 필요가 없다고 여긴 곳이었다. 그저 장소만 다를 뿐, 남산 타워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풍광과 다를 바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관광지의 입장료가 없거나 매우 싼 타이베이에서 가장 비싼 요금(우리 돈 만8천원)을 받는 곳이라는 점에서도 그랬다.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인 여덟 팔자를 뒤집어 꽃술 모양으로 세운 8단 건축물이다. 맨 꼭대기에는 웬만한 지진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한 댐퍼 시설이 있다.
▲ 올려다 본 101 빌딩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인 여덟 팔자를 뒤집어 꽃술 모양으로 세운 8단 건축물이다. 맨 꼭대기에는 웬만한 지진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한 댐퍼 시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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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타이베이 사람들 대부분이 최고라며 추천하는 건, 이 건물이 지닌 '기록' 때문이다. 2010년 두바이에 건설된 '버즈 칼리파' 빌딩에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세계 1위의 고층 건물(508m)이었고, 지금도 운행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승강기가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증명이라도 하듯 승강기 입구에 기네스 기록증이 큼지막하게 내걸려있다.

하긴 89층에 자리한 전망대까지 불과 37초 만에 주파하는 엄청난 속도의 승강기다. 타면 전혀 속도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조용한데, 단지 기압차로 인한 귀가 뻥 뚫리는 느낌만이 순식간에 전망대에 도착했음을 알게 해준다. 관광객용 승강기는 고작 한 대인데, 평일인데도 이를 타기 위해 줄을 선 관광객이 뱀 꼬리마냥 길다. 주말에는 족히 한두 시간은 기다려야 한단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광은 예상대로 서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운 좋게도 맑은 날이어서 타이베이를 감싸고 흐르는 단수이강과 지룽강, 그리고 그 사이에 펼쳐진 장난감 블록 같은 도시 전경을 깨끗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초록빛이 거의 없는 삭막한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만이 뒤덮고 있다는 사실만 도드라졌다. 마치 서울처럼.

전망대 내부 역시 단체 관광객들이 접수해버렸다. 특별하달 게 없는 풍광인데다 안팎의 그림자가 짙어 사진이 잘 찍힐 수 없는 조건인데도, 유리창을 배경 삼아(?) 연신 셔터를 눌러대고 왁자지껄 소란하다. 모른 채 하고 인솔자가 든 깃발을 보니, 일본과 우리나라의 관광객들이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다.

듣자니까 본토에서 건너온 중국 관광객들이 타이완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바로 이 건물이라고 한다. 같은 중국인이 이뤄낸 건축학적 쾌거라면서도, 조그만 섬에 본토에는 없는 '세계 제일'의 건물이 우뚝 서 있으니 샘난다는 것이다. 타이완을 포함해 기실 중국인들의 고층 건물에 대한 집착은 유난스러운 게 있다.

전망대에 비치된 책자를 보니, 2010년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10개 중 다섯이 타이완과 홍콩을 포함해 모두 중국에 있다고 한다. 한때 우리도 '동양 최대', '세계 최초', '세계 최고' 등의 수식어에 현혹돼, 마치 그런 것들이 국위선양을 위해 꼭 필요하고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조건인 양 여겼던 적이 있다.

남산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야경과 크게 다를 바 없다.
▲ 101 빌딩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타이베이 야경 남산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야경과 크게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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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101 빌딩은 시내 어디에서나 잘 보인다. 마치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방위를 찾을 때 유용한 타이베이의 랜드마크다. 거의 하늘에 닿아 지구상 모든 것들을 발아래 두고 내려다보려는 부질없는 욕망이 아니라면, 101 빌딩은 되레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중국인들이 모두 좋아하는 한자 '八'를 거꾸로 해서 층층이 쌓아올린 외관은 꽃술 같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딱 한 사람만이 '타이베이에 왔거든 반드시 고궁박물원을 찾아야 한다'며 마치 관광객의 의무라는 듯 강조했다. 사실 내가 다른 좋은 휴가지 다 마다하고 굳이 타이베이를 찾은 이유가 바로 고궁박물원 때문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타이완 사람들이 가장 가볼 만한 곳으로 고궁박물원을 선뜻 꼽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넓은' 고궁박물원

실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입구에 모든 걸 맡기고 빈 몸으로 입장해야 하는데, 입에 바짝 침이 마를 만큼 카메라에 담고 싶은 게 지천인 곳이다.
▲ 고궁박물원 오르는 길 실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입구에 모든 걸 맡기고 빈 몸으로 입장해야 하는데, 입에 바짝 침이 마를 만큼 카메라에 담고 싶은 게 지천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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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곳 같으면 가벼운 마음으로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관람할 수 있는 곳이지만, 고궁박물원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관광지가 아닌 '순례지'처럼 여긴다고나 할까. 아닌 게 아니라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지만, 음성 안내기에 탑재된 핵심 유물만 본다고 해도 한나절로는 어림없을 만큼 규모가 엄청나다.

아침 일찍 서둘러 관람 동선을 짜는 등 나름 철저하게 준비했지만, 밀려드는 인파에 부대끼며 서른 개가 넘는 넓은 전시실은 돌아다녀야 하는 건 관람이 아니라 차라리 '수행'이었다. 다행히도 단체 관광객들은 대개 인솔자의 개략적인 안내만 받고 썰물처럼 빠져나가주었지만, 각 전시실을 가득 채운 유물들을 일일이 친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타이완 고궁박물원은 런던의 대영박물관과 파리의 루브르박물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실공히 세계 5대 박물관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60만 점을 넘는 소장 유물의 양도 양이지만, 유물의 보존 정도가 거의 완벽에 가까워, '중국 최고의 문화자산'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다보니 경비가 삼엄하고, 카메라나 음식은 물론, 손가방과 마실 물조차도 반입할 수 없다.

대개 맨 꼭대기인 3층에서부터 1층으로 내려오면서 관람하게 되는데, 어느 전시실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걸작들이 많아서 전시관 입구마다 긴 줄을 서야한다. 중국어를 비롯해, 영어, 일어, 한국어로 된 음성 안내기가 제공되는데, 각 전시관의마다 핵심 유물 몇 가지를 소개해주는 것에 불과해 아쉬움이 남는다. 어느 것 하나 국보급 아닌 게 없을 정도다.

청나라 말 서태후가 나들이를 갈 때 음식을 담았던 망사로 된 찬합과 건륭제 시절 제작됐다는 상아로 만든 공노리개, 고작 4cm의 상아 배 위에 사람과 그가 앉은 의자와 숟가락, 젓가락까지 새겨놓은 장신구 앞에 서면, 과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옥으로 만든 배추에 여치 한 마리까지 돋을 새겨놓은 '취옥백채'와 조그만 겨자씨에 풍경화를 새겨 담은 작품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도자기와 공예품들이 다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관 시간이라 관광객이 비교적 적었지만, 채 한 시간도 안 돼 인산인해가 되었다.
▲ 고궁박물원 정문 개관 시간이라 관광객이 비교적 적었지만, 채 한 시간도 안 돼 인산인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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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놀라운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 걸작들이 타이베이의 야트막한 언덕에까지 오게 된 사연이다. 기실 소장 유물 대부분은 본디 베이징의 자금성에 있었다. 1930년대 이후 일본군이 쳐들어오면서 도난과 훼손을 우려한 당시 국민당 정부가 유물을 상자에 담아 난징을 거쳐 상하이 옮기게 된다.

1937년 일본과의 전쟁이 본토로 확대되자 다시 내륙에 있는 충칭으로, 또다시 더 안전한 운남성의 쿤밍 등지로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일본의 위협에서는 벗어났지만, 다시 공산당과의 이른바 '국공내전'이 벌어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1948년 전세가 공산당에게 크게 밀리자, 당시 국민당을 이끌었던 장제스는 중대한 결정을 한다.

60여만 점에 달하는 자금성의 유물, 어떻게 건너 왔을까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대륙을 떠돈 유물을 조그만 섬, 타이완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자금성에서 가져온 것의 20% 정도에 불과한 양이었으나, 당시 퇴각하는 배에 실은 것만 3천 상자, 60여만 점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군인은 배에 못 타도, 유물은 실었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단다. 그나마 곧장 타이베이로 들어오지도 못했다. 당시 2·28 사건이 발생하는 등 어수선한 정국 탓에 진압군이 주둔했던 타이중에 우선 여장을 풀게 된다.

이후 정국이 안정된 196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지금의 자리에 터 잡게 되니, 다사다난했던 30여 년 뜨내기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이는 모두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으로 비롯된 것인데다, 이동 거리도 본토를 두 번이나 가로질렀을 만큼 엄청났는데도 유물의 훼손이 거의 없었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사실 장제스에 대한 타이완 사람들의 역사적 평가가 상당히 호의적인 것에 대해 적잖이 놀랐다. 중화민국의 지도자이기에 앞서 대륙을 상실한 패장으로서, 또 항일전쟁 과정에서 되레 우군인 공산당군을 탄압했으며, 타이완 2·28 사건의 학살자이자 계엄령에 기댄 독재자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 '중정'을 우러르는 건 왜일까. 대개 타이완 사람들은 '국부' 쑨원과 함께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북벌을 완수한 그의 애국심과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성을 높이 친다. 오죽하면 타이베이 시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간선도로를 '충효로'라 이름 붙였을까. 곧, 패전은 그의 책임보다는 부패한 국민당 군인들의 몫이 크고, 그러하기에 그가 타이완으로 밀려나 가장 먼저 단행한 것이 바로 부정부패의 척결 아니냐고 외려 반문한다.

그런 그들의 인식에는 별로 동의하진 않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만약 장제스가 타이완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아야 한다면, 바로 문화유산의 보존에 대한 지극정성의 마음가짐 아닐는지. 그 어떤 문화재든 본디 있었던 자리로 가는 게 맞지만, 지금 고궁박물원의 유물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엄청난 전화를 과연 피할 수 있었을까.

개관 시간에 맞춰 들어갔는데, 나와 보니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음성 안내기의 도움을 받아 관람한 것을 헤아려보니 고작 200개도 안 됐는데.


태그:#타이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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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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