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문경 새재를 넘기 위해 길을 오르다가 제2관문인 조곡관을 지나 500m가량 더 가면 '문경 새재 아리랑'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사진은 비의 내용 부분.
 문경 새재를 넘기 위해 길을 오르다가 제2관문인 조곡관을 지나 500m가량 더 가면 '문경 새재 아리랑'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사진은 비의 내용 부분.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어린 시절 농촌에서 '아리랑' 노래를 듣거나 부를 때마다 소년이었던 나는 꼭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데, '아리랑 고개'는 과연 어디일까? 고향 마을에는 험한 고개가 없었으므로 당시 '국민학생'이던 나는 그게 늘 의문이었다.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날 정도의 고개라면 한참 높아야 할 터인데,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런 곳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에게 묻기도 했다. '아리랑 고개는 어디에 있나요?' 그러나 어느 어른도 내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주지는 않았다. 다만 '아리랑 고개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고, 우리 면에서 제일 유명한 고개는 열재'라는 망외의 향토 지식을 얻기는 했다. 산적이 들끓는 고개이기 때문에 어른도 열 명 이상이 모였을 때에만 넘어가야 안전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어린 탓이었는지, 그 당시 나는 아리랑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궁금증은 느끼지 못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터 아리랑 노래를 그토록 간절히 불렀을까? 그저 막연하게 '아득한 옛날부터'라고 생각했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던 시절', '단군 할아버지가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 '유리 왕자가 부러진 칼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다니던 시절' 등이 그 답이었다.

시원하게 답을 찾을 수 없는 아리랑의 근원

문경새재 입구의 옛길박물관. 영남대로의 가장 핵심적인 고개였던 문경새재를 기려 건립된 우리나라 유일의 길 전문 박물관이다. 문경새재를 방문한 나그네라면 꼭 들어가볼 곳이다. 엣날 괴나리봇짐, 표주박, 휴대용 지도, 나침반, 안경, 다양한 고지도, 이동 수단 등 볼거리들이 많다.
 문경새재 입구의 옛길박물관. 영남대로의 가장 핵심적인 고개였던 문경새재를 기려 건립된 우리나라 유일의 길 전문 박물관이다. 문경새재를 방문한 나그네라면 꼭 들어가볼 곳이다. 엣날 괴나리봇짐, 표주박, 휴대용 지도, 나침반, 안경, 다양한 고지도, 이동 수단 등 볼거리들이 많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사실 아리랑이 언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알영설, 아랑설, 아난리설, 아이롱설, 아리랑설 등등 주장하는 이에 따라 그 근원은 정말 다양하다. 아리랑의 근원을 두고 '아리랑 백설(百說)'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이다. 백화만발(百花滿發), 백척간두(百尺竿頭), 백가쟁명(百家爭鳴),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등과 같은 조어법을 원용한 것이다.

알영설은 신라 건국시조 박혁거세가 왕비 알영을 찬미하여 "알영 알영"하고 노래를 부른 것이 뒷날 "아리랑 아리랑"으로 변했다는 견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왕조에 여자들이 길쌈짜기 내기 끝에 진 편에서 '회소곡'을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서기 32년) 그보다 조금 전 사람인 혁거세왕이라고 해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 리도 없을 터, '알영'과 '아리랑'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데에 착안한 알영설도 일견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아랑설은 조선 명종(1545∼1567) 때 밀양부사의 딸 아랑이 순결을 지키려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을 애도하여 사람들 사이에 그녀의 이름을 딴 '아랑가'가 퍼졌는데, 그 노래가 아리랑으로 이어졌다는 견해다. 본명이 윤동옥 또는 윤정옥으로 전해지는 '아랑'과 노래 이름 '아리랑'의 음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알영설과 일면 비슷한 점도 있다. 그러나 두 견해에는 시간상으로 1600년이나 되는 간격이 있으니, 아리랑의 근원은 참으로 알기 어렵다고 하겠다. 

경남 밀양의 아랑각 내부
 경남 밀양의 아랑각 내부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그런가 하면 아난리설, 아이롱설, 아리랑설은 아랑설보다도 더 시기적으로 늦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인 1865년부터 1872년 사이에 아리랑 노래가 생겨났다는 견해이기 때문이다.

아난리(我難離)설은 경복궁 노역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내가[我] 공사장을 떠나기[離] 어렵구나[難]' 하는 마음을 탄식조로 읊은 것이 아리랑으로 발전했다는 설이고, 아이롱(我耳聾)설은 백성들이 공사비 독촉 성화가 듣기 싫어 '내[我] 귀[耳]야, 어두워져라[聾]' 하고 되풀이한 것이 '아리랑'으로 바뀌어 전해졌다는 설이다. 아리랑(我離娘)설은 경복궁 노역장 인부[我]들이 떠나온[離] 처자[娘]를 그리워하여 "아리랑 아리랑" 한 것이 노래로 발전했다는 견해다. 물론 셋 다 발음의 유사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어쨌든 아리랑이 박혁거세 때에 발생한 노래가 아니라면, 특히 대원군 시절에 생겼다면? 이는 아리랑이 흔히 생각하기보다는 별로 오래된 노래가 아니라는 뜻이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느라 백성들을 대거 동원하였을 때라면 지금부터 불과 150년 가량 전이니, 그렇다면 고대도 중세도 아니고 말 그대로 근대의 일이 아닌가.  

문경새재를 넘는 고갯길 초입인 제1관문을 향해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문경새재를 넘는 고갯길 초입인 제1관문을 향해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발생 시기에 대해 백설이 난무하는 만큼 아리랑은 종류도 많다.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 해주 아리랑, 정선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 독립군 아리랑, 연변 아리랑, 서울(경기) 아리랑 등등, 내용이 다른 가사가 백 가지를 넘는다.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아리랑은 서울(경기)아리랑에서 변용된 것으로 여겨지는 '신 아리랑'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신 아리랑'은 나운규가 1926년 우리나라 첫 무성영화 <아리랑>을 만들면서 서울(경기)아리랑을 변용하여 주제곡으로 삼았다. 그런데 관객이 너무 많이 몰려 심지어 평양 극장은 대들보가 내려앉았을 만큼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낳았다.

그 결과 노래도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일제에 핍박받던 농촌 현실과 민중의 참혹상을 실제 그대로 담은 영화 <아리랑>은 전국민적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영화의 내용과 등장인물에 감정이입된 관객들은 극장 밖에서까지 일상적으로 영화 주제가(아리랑)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신아리랑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국에 퍼져나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하지만 2012년 12월 유네스코는 이 아리랑만이 아니라, 후렴구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끝나는 노래를 모두 포함하여 세계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했다. 유네스코도 우리나라 아리랑에는 종류도 많고 그 기원도 제각각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문경사람들, "문경새재아리랑이 아리랑의 시조"

영화 <아리랑>의 줄거리
실성한 영진에게 옛날 친구가 찾아온다. 친구의 이름은 현구. 영진의 여동생 영희와 현구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친일파 오기호가 마을 축제의 어수선한 혼란을 틈타 영희를 겁탈하려 한다. 이를 발견한 현구가 뛰어들어 격투가 벌어진다. 그 광경을 보던 영진이 정신적 환상에 빠지면서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인다. 피투성이가 튀는 광경을 보면서 영진은 맑은 정신을 되찾는다. 그러나 영진은 살인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2013년 1월 28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아리랑의 인류문화유산 등재기념 국회정책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에서 한민족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상임이사는 '아리랑은 1865년부터 1872년까지 진행된 대원군의 경복궁 중수 공사를 계기로 역사성과 사회성을 가지게 됐다'면서 '이 당시 최초의 아리랑 악보 채보자인 미국인 헐버트의 악보에 따르면 첫 사설이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나간다"라고 한 점으로 미뤄 (아리랑의 시조는) 문경아리랑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또 그는 '아리랑은 문경새재를 배경으로 한 민족의 노래'라면서 '아리랑의 본향인 문경에 국립 아리랑박물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덧붙여 '아리랑과 고개의 합성은 경복궁 중수와 동학혁명, 의병전쟁 등으로 이어진 시대적 상황에서 상실과 고난의 상징이 문경새재에 부여된 결과물이며, 문경아리랑은 아리랑고개라는 민족시어를 창출했다'고 말했다.

문경새재는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죽흘산 사이를 넘어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고개로, 일찍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영남대로 중에서도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의 요충지였다.

한자어 조령(鳥嶺)의 순수 우리말 표기인 새재는 보통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를 뜻하는 말로 여겨져 옛날 문헌에 초점(草岾)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또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에 있는 '새(사이)재', 새(新)로 난 고개라는 의미의 '새(新)재'로 해석되기도 한다.

제3관문 조령관. 문경새재의 정상부인 이 문을 지나면 이제 내리막을 걷게 된다.
 제3관문 조령관. 문경새재의 정상부인 이 문을 지나면 이제 내리막을 걷게 된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문경새재를 찾아간다. 문경새재는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인이 꼭 가보아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에서 3위를 기록한 명승 32호이기도 하지만, 특히 아리랑의 근원지 중 한 곳으로 손꼽히는 문화유산의 현장이기도 하므로 당연히 찾아볼 일이다.

문경새재 주차장에서 고개 정상부의 제3관문까지 왕복 13km는 좌우로 숲이 울창하고 생각보다 편편하다. 현대의 도시인들에게 걷는 재미를 쏠쏠하게 안겨주는 산길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만 해도 이 산길은 '영남대로'로 이름을 날렸던 중요 큰길이었다.

그 덕분인지 이 길은 현대와 과거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구경거리들이 잘 어울려 있어 찾아온 나그네들을 흐뭇하게 해준다. 길을 주제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옛길 박물관', 제1관문 주흘관, 사극 <왕건>, <무인시대>, <대조영> 등을 촬영한 세트장, 조령원터, 교귀정, '산불됴심' 비석, 제2관문 조곡관, 문경새재 아리랑비, 제3관문 조령관이 줄을 서서 나그네를 맞이한다.  

'문경새재 아리랑비' 앞에서 노래를 한번 불러본다. 여기까지 왔으니 저 옛날 이곳 사람들이 슬픔과 한을 삭이며 불렀던 그 노래를 나도 한번 불러보아야 하지 않겠나. 1896년에 아리랑을 처음 채보한 서양인 헐버트가 '아리랑은 한국인들에게 쌀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는데, 내가 한국사람인 이상 아리랑 한 가락 읊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으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 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문경새재에서 눈여겨 볼 것들

제1관문 주흘관
 제1관문 주흘관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제1관문 주흘관 사적 147호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 순행차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을 지날 때 성주 홍달(洪達)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 지방과 서울 사이의 관문이여 또 군사적 요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雞立嶺)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 초부터는 이곳 초참(草站)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2 5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제2관문 조곡관
 제2관문 조곡관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이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 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 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삼중(三重)의 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을 조동문(鳥東門) 혹은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을 조령관(鳥嶺關)이라 이름한다.


제2관문 조곡관
 사적 147호

이 관문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문경 조령(鳥嶺)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 선조 25년(1592) 왜란이 일어난 후에 충주 사람 신충원(辛忠元)이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숙종 34년(1708) 조령산성을 쌓을 때 매바위(鷹岩) 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쌓고, 중성(中城)을 삼아 조동문(鳥東門)이라 이름하였다. 현재의 시설은 그 후 폐허기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교귀정
 교귀정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교귀정

교귀정은 새롭게 도임(到任)하는 신임감사와 업무를 마치고 이임하여 돌아가는 감사가 관인(官印)을 인수인계하던 곳으로 문경새재 용추폭포 옆에 위치하고 있다. 문경현감 신승명(愼承命)이 1400년대 후반(1466∼1488)에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1896년 3월 의병전쟁 중에 불타 없어졌던 것을 1999년 6월에 중창하였다.

조령원터(鳥嶺院址)

조령관문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위치한 조령원터는 고려와 조선 시대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이다.
'산불됴심' 표석
 '산불됴심' 표석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문경새재는 과거 영남과 한양을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하여 수많은 길손이 오가던 중요한 통로였으며, 역과 원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새재 내에서만 동화원, 신혜원, 조령원 등 3곳의 원터가 전해오고 있다.
1977년과 1997년에 걸쳐 두 차례 발굴했는데, 고려 시대 온돌 유지와 부엌시설 일부가 드러났고, 와편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철제 화살촉 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조령 산불됴심 표석(標石)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26호

이 표석의 설치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된 보기 드문 순수 한글 비석으로 설치 당시의 위치대로 세워져 있다.
이 표석은 행인의 발길이 잦은 이곳에 설치해 지나는 길손들에게 산불 예방과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세운 높이 157cm의 표석으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이 표석 중 "됴심"은 "조심"의 옛말이다.



태그:#아리랑, #새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