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한 루카스에게 다시 시작된 로맨스, 그의 연인 나디아. 그녀는 유치원의 모든 교사가 루카스를 성추행범으로 낙인 찍을 때, 그것을 부인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차츰 루카스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혼한 루카스에게 다시 시작된 로맨스, 그의 연인 나디아. 그녀는 유치원의 모든 교사가 루카스를 성추행범으로 낙인 찍을 때, 그것을 부인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차츰 루카스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 노르디스크 필름


루카스에겐 아들이 하나 있으나, 이혼한 전 부인은 아들과의 만남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이혼 과정에서 적잖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고, 그 상처는 지금도 진행 중인 오늘의 고통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성실하게 일상을 감당하며 소소한 삶의 즐거움과 보람을 누리며 살아간다. 덴마크의 어느 한적한, 눈부신 아름다움과 낭만어린 서정을 가진 그가 사는 마을, 성실한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보람된 일터, 다시 시작된 로맨스, 변함없는 아들의 신뢰,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보다 더 가까운 오랜 친구들과의 우정이 그런 삶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소한 거짓말은 거대한 폭력으로

루카스의 오랜 친구들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벗 테오가 있다. 그의 막내딸 클라라는 종종 말다툼하는 부모와 한참 성에 대한 호기심 가득한 욕망을 꿈꾸는 사춘기 오빠 사이에서, 늘 외롭다. 그날도 그랬다. 아침, 출근하던 루카스가 테오의 집을 지날 즈음, 테오 부부는 싸우고 있었고 클라라는 집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루카스가 클라라의 손을 잡고 한적한 길을 지나 유치원에 간다.

외롭던 꼬마 소녀 클라라는 루카스에게 마음을 열고, 틈을 타서 루카스의 입술을 훔친다. 마침 선생님인 루카스는 클라라의 사소한 거짓말에 정색하며 혼낸다. 그리고 '입술 뽀뽀'는 엄마, 아빠하고만 하는 것이라고 나무란다. 혼자 남겨진 클라라는 원장 선생님께 거짓말을 한다. 루카스에 대한 클라라의 어린 마음은 화가 났다. 오빠의 짓궂은 장난결에 보았던 남자의 성난 성기는, 어느새 루카스 선생님의 것이 되었고, 루카스는 그만 유아 성추행범으로 몰리게 된다. 루카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거짓말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루카스의 결백을 전제로 이야기를 이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전제가 없었다면, 나는 원장과 다른 부모들의 편에 서거나 갈팡질팡했을 것이다. 내가 그 원장이었다면, 그 아이의 부모였다면, 심지어 내가 그의 오랜 친구였다고 할지라도, 나라도 루카스를 정죄하고 그를 유치원에서 쫓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진실의 편에 서 있되, 진실에 대한 낭만적인 기대는 철저히 부서뜨린다.

"어린아이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란 신화는, 진실보다 강했다. 클라라는 뒤늦게 자신의 거짓말을 해명하지만, 그마저도 '너의 치욕스런 상처가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외면하고 있다'며 부인된다. 진실은 그렇게 무시당한다.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루카스의 친구였던 그들은, 점점 네카시즘적 폭력으로 루카스를 따돌리기 시작한다. 그의 아들 마르쿠스마저 폭력을 당하며, 그 가련한 부자는 동네 마켓에서마저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한밤 중에 누군가 던진 돌에 그들 집의 유치창은 깨지고, 루카스의 애견마저 사늘한 죽음이 되어 돌아온다.

진실에 대한 우리의 태도

 클라라의 사소한 거짓말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고야 만다.

클라라의 사소한 거짓말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고야 만다. ⓒ 노르디스크 필름


진실은 감춰져 있을 때가 많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가 진실의 편에 있다고 과신한다. 오만한 자의 진실은, 폭력과 위선의 명분으로 활용된다. 설사 그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 오만한 폭력으로 그 진실의 가치는 아스라이 사라진다.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실체에 대해, 우리는 종종 확신어린 비난에 동참하고는 한다. 거짓말의 당사자였던 클라라와 그의 부모보단, 그의 주변에 있던 '동조자'들이 과도한 폭력을 행사한다. 우리 사회도 늘 그러하다. 주변의 동조자들이 더 매몰차고 무섭다. 집단, 혹은 대중이란 익명 속에 숨은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폭력이 어느 정도의 위력이 있는지 미처 알지 못한다.

우리는 종종 어떤 조직의 주류가 될 때, 어떤 이의 사람이 될 때, 조직과 진영의 논리에 편승하여 진실을 그저 헛헛한 상황논리로 대체한다. 세상사에 대해선 날선 비평을 하는 이들도 자기의 사람들, 자신의 영역에 대해선 언제나 "그럴만한 사정이 있지"라고 위로하며 그저 '사람 좋은 동료'가 된다. 지난 대선에서 52%에 패배했던 48%의 사람들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의 싸움으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개혁 진보 진영의 논리는 가끔 무서울 정도의 광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극우의 그것과 닮았다.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오만에 휩싸인 종교는, 정작 그 진리의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진리란, 진실이란 너무 희소한 것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씁쓸하다.

살다보면, 우린 집단 폭력의 피해자도 되지만, 간혹 집단 폭력의 가해자도 된다. 영화를 보며 한때 피해자였던 나의 과거가 생각나서 가슴이 미어졌으나, 돌아와 리뷰를 쓰는 지금은 가해자였던 나의 과거가 생각나 한없이 초라하고 슬프다. 우리는 진실 앞에, 좀 더 겸손할 필요가 있다. 도무지 실체에 접근할 수 없는 진실에 대해선 신비의 영역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진실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태도이어야 한다.

진실은 우리를 구원하는가? 진실의 편에 섰을 때, 우린 세상에 맞서 이길 수 있는가? 혹여 우리가 믿는 진실은 정말 진실일까? 영화는 진실을 압도하는 거짓의 실체를 시종일관 담담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제목 <더 헌트>(The Hunt)는,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루카스의 사슴 사냥 장면과 "1년 후" 성인이 된 아들, 그리고 친구들과의 사슴 사냥 에피소드를 하나의 메타포로 활용한다. 즉 진실을 외면한 집단의 사냥은, 누군가를 가혹한 죽음으로 내몰며 질주한다. 거대 집단의 가혹한 폭행을 감내했던 루카스의 1년 후, 사슴을 겨냥했으나 쉬이 총을 쏘지 못하는 루카스의 심정은, 진실에 대한 그의 미련, 혹은 질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가 버텨주어 고맙다

 루카스가 도망치지 아니라고, 절망에 굴복하여 죽음을 택하지 아니하고 버텨주어 고맙다. 그리고 그의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들이 정말이지 눈물겹게 고맙다.

루카스가 도망치지 아니라고, 절망에 굴복하여 죽음을 택하지 아니하고 버텨주어 고맙다. 그리고 그의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들이 정말이지 눈물겹게 고맙다. ⓒ 노르디스크 필름


영화 내내 루카스는 위태롭다. 허물어질 듯 위태롭지만, 그는 여전히 담담하고 꼿꼿하다. 동네 마켓에서 부당한 모욕과 폭행을 당하면서도 그는 끝내 물러서지 않는다. 살해 당한 애견에 대한 울분도, 아들을 엄마에게 보낸 후에야 홀로 땅에 묻으며, 오래 참았던 감정의 격동을 세찬 빗줄기에 묻어 토해낼 뿐이다. 한편, 감독은 루카스에 대한 지나친 감정이입을 경계하는 듯 하다. 루카스의 억울함에 가슴이 먹먹해질 즈음이면 아름다운 풍경을 쉬어갈 공간으로, 혹은 시간을 격리하고 뛰어넘어 관객을 배려한다. 아마 감독은 루카스의 진실을 담담하고 객관화된 시선으로 지켜내고 싶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나의 예상은 번번이 빗나갔다. 집단 린치를 당했던, 크리스마스 저녁. 세면대 앞에서 간신히 얼굴의 핏자국을 씻고 옷과 구두를 단정히 차려 입을 때, 난 그의 죽음을 예상했다. 보통 사무치는 억울함은 자살이란 비극으로 종종 끝나니까. 하지만, 루카스는 가지런한 옷차림으로 교회를 향한다. 사람들은 그를 피하고 수근거린다. 마침 자신이 가르쳤던 유치원 아이들의 캐롤 합창이 있다. 그의 건너편 뒤쪽엔 그의 오랜 벗 테오가 앉아있다. 아이들의 노래를 들으며, 친구에게 시선을 돌리던 그는 결국 흐느낀다. 그리고 테오와 시선이 마주친다. 테오는 그제서야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교회에서조차 거세당해 홀로 남은 그날 밤, 테오가 찾아온다. 누구도 그 자리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묻지 않지만 적어도 그날 밤, 그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닌, 다시 친구로 돌아갔다.

또한 루카스란 존재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아들 마르쿠스가 대견했다. 아들이지만 부모를 믿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원래 가장 가까운 이들이 가장 먼저 의심하는 법이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마르쿠스의 신뢰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친구들을 찾아가 읍소하고, 주먹을 날리고 얻어 맞으면서, "친구들이 뭐이래!"라며 우리가 그토록 소리치고 싶었던 울분을 대변한다. 마르쿠스의 대부이자 루카스의 친구였던 부룬도 그 우정을 끝까지 지켜낸다. 그가 루카스의 결백을 정말 믿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우정은 믿을만 했다. 때로, 실체없는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적인 우정이다. 모름지기 우정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루카스가 도망치지 아니하고, 절망에 굴복하여 죽음을 택하지 아니하고, 버텨주어 고맙다. 무엇보다 진실을 포기하지 않은 그가 고맙다. 그리고 그의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들이 정말이지 눈물겹게 고맙다.

여전히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는 세상

"1년 뒤"란 자막이 흐르고, 성년이 된 아들 마르쿠스를 축하하려 루카스와 그의 친구들이 다시 만났다. 마치 첫 장면에서 유쾌하게 펼쳐지던 그 즐거움이 연상되었다. 루카스의 곁엔 다시 시작된 로맨스였던, 그의 연인 나디아가 있다. 클라라와 조우하던 장면에서 마음 조아렸지만, 루카스는 친절한 선생님으로 클라라를 의연하게 맞이했다. 우정을 노래하던 친구들의 얼굴 하나하나, 특히 테오의 얼굴을 카메라는 놓치지 않고 주목한다. 즐겁다. 모두가 즐겁다. 그리고 그들은 다같이 사슴 사냥에 나선다. 이 즈음에서, 난 "1년 뒤"의 이 상황들이 혹시 루카스의 기대 어린 상상은 아닐까, 꿈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1년 사이에 루카스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던 것일까?

그런 상상과 의심 속에서 서성이던 순간, 루카스를 겨냥했던 누군가의 총소리가 가슴을 새차게 놀래킨다(난 이 장면이, 나와 같은 관객을 향한 감독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집단 속에 숨은 누군가는 여전히 그를 죽이거나, 혹은 위협하여 쫓아내고 싶어한다. 아,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루카스는 여전히 진실을 움켜진채, 고통스럽지만 의연하게, 다시 그 꼿꼿한 성실함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는 이 지극한 현실 속에서 말이다.

ps. 언젠가 어떤 영화의 악역으로 그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주인공 루카스 역의 매즈 미켈슨은 연기는 최고다. 2012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은 결코 넘치지 않는, 그의 연기에 대한 지극히 합당한 찬사일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이름도 기억해 놓는 것이 좋겠다. 빼어난 영상으로 이런 소재를 다루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넘치지 않는 감정선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덧붙이는 글 1. 이 리뷰에는 이 영화의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2. 이 리뷰는 저의 블로그에도 동일하게 싣습니다(http://soli0211.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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