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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장에서 100편의 시를 외우다

나는 소설로 등단했지만, 평생 동안 끊임없이 시를 사랑하며 살아왔다. 지금도 시 읽는 것을 즐기고, 틈틈이 애송시들을 낭송하며 산다. 물론 내 애송시들은 모두 청년 시절에 외운 시들이다. 지금은 시를 외울 수가 없다. 외우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애써 외워도 금새 잊어먹는다. 말할 것도 없이 나이 탓이다. 그것에서도 인생무상을 느낀다. 

작가 지망생 시절 무려 15년이나 낙방거사 노릇을 하며 무수히 등단 관문에 도전을 했지만, 하나같이 소설 관문이었다. 시 관문에 도전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틈틈이 시도 짓고, 평론가들의 시평들을 많이 읽으면서도 왜 시 관문에는 한 번도 도전을 해보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좀 이상한 일일 것도 같고 아쉬운 일이기도 하다. 시 관문 도전 일화를 전혀 장만하지 못했으니 좀 썰렁한 느낌을 피할 수가 없다. 

청년 시절 한 때는 100수가 넘는 시를 외우기도 했다. 모국어로 빚어진 아름다운 시들을 외운다는 것이 내게 묘한 행복감과 의무감 같은 것을 안겨주곤 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내가 베트남 전장에서 시들을 외웠다는 사실이다. 나는 1970년 9월 지원병으로 월남엘 갔다. 백마사단 도깨비연대 제1대대 제1중대 전투병이었고, 경기관총 사수였다. 당시 제1중대는 전술기지라고도 부르는 공수기지에 배치돼 있었다. 육로로는 갈 수 없고 헬기로만 모든 운송이 가능한 기지였다. 베트콩 은거지로 악명 높은 홈바 산의 지척이었고, 단용 강 지류의 늪지대 안이어서 밤에는 모기가 유난히 많은 곳이었다.

1971년 초 대부대 작전에 참가하여 정글로 투입되기 전 치누크 헬기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 베트남 전장에서 1971년 초 대부대 작전에 참가하여 정글로 투입되기 전 치누크 헬기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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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 총기를 분해해 닦는 일이나 하고, 화장실 인분을 퍼다 버리는 일이나 하며 빈둥빈둥 놀았다. 주간 관망대 근무자들도 관망대에서 책을 읽곤 했다. 나는 그때 많은 책을 읽었다. 중대본부 지하도서실에 있는 책들을 거의 모두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때 도서실에서 작은 시집을 한 권 발견했다. 한국 명시 100편을 선정해 실은 시집이었다.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의 도움으로 펴낸 책임을 박목월 시인이 밝히고 있는 시집이기도 했다.

나는 그 시집을 읽었고, 그 시집 안의 시 100편을 모두 외울 생각을 불현듯 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시를 외우기 시작했다. 하루에 서너 편씩 외우니 한 달 안에 시 100편을 다 외울 수 있게 됐다.

내가 주간 관망대 근무를 하면서도 시를 외우는 것을 중대장도 알게 됐다. 관망대 근무에 열중하지 않고 시를 외우는 일에 신경을 쓰는 나를 주번 사령이 적발해 중대장에게 보고했다. 그때 중대장이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시를 외우느냐는 물음이었다.

"무료한 시간을 유익하게 쓰고 싶어서입니다만, 지금 시를 외워두면 평생 동안 애용할 자산을 만드는 셈일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작전에 대한 두려움도 반감되는 것 같고..."

이런 내 대답에 중대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으로 주간 관망대 근무 중에도 시를 외우는 내 태도는 그대로 용인됐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어느 날 밤에 있었다. 야간 잠복호 근무 중에도 작은 소리로 웅얼웅얼 시를 외우고 있을 때였다. 돌연 내 머리에서 퍽 하는 둔탁한 파열음이 났다. 순찰을 돌던 당직사관이 자신의 철모로 내 철모를 내리친 것이었다.

"니 지금 머하노?"

말뚝 중사인 당직사관은 경상도 말투로 내게 물었다.

"예, 시를 읊고 있는 중입니다."
"뭐, 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말고 경계근무나 똑바로 해 임마, 알간?"
"예, 알았습니다."

나는 그때 사람에 따라서는 시가 얼마든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확인했다. 머리통의 충격이 전신에 퍼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 일을 겪은 후로도 나는 시 외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작전을 뛰지 않는 동안의 중대 전술기지에서의 무료한 시간을 온통 시 외우는 일에 활용했다.

그 후 나는 대대본부에서 생활했다. 도깨비연대 대표 배구선수로 선발돼 백마사단 창설 기념 배구대회에 출전, 준우승을 한 공으로 운동선수들로 구성된 특별기동대에 배속된 덕이었다.

내 시 낭송 실력은 여차저차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귀국 장병 송별회식이 열리는 막사들에서는 나를 초청하기도 했고, 내가 먼저 자발적으로 송별회식을 하는 막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캔 맥주를 얻어 마시고는 기분이 얼큰해지면 시 낭송을 했다. 내 시 낭송은 장병들을 숙연하게 했고, 깊은 감동을 안겨주곤 했다. 시를 두세 수 낭송하곤 으레 가곡을 불렀다. 시낭송 다음에 부르는 가곡은 그때나 지금이나 <옛 동산에 올라>와 <동심초> 등이다.

나는 지금도 이런저런 자리에서 시낭송을 즐기고, 상황에 따라서는 시낭송 다음에 노래도 부르는데, 그때마다 군대 시절 베트남 전장에서의 풍경을 재연하는 기분이 되곤 한다.

시를 외운 보람들

2006년 4월 23일 김대건 신부 탄생지인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솔뫼성지'에서 홍윤숙 원로시인과 우리 가족이 함께 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 홍윤숙 시인과 함께 2006년 4월 23일 김대건 신부 탄생지인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솔뫼성지'에서 홍윤숙 원로시인과 우리 가족이 함께 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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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룸살롱과 노래방 판이지만, 19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술집들이 많았다. 무대 아래 플로어에서는 남녀가 어울려 춤을 추곤 했다.

그런 술집을 몇 번 가본 경험이 있다. 대개는 억지로 끌려간 경우이다. 그런 술집에 가면 술만 마시는 게 아니다. 시끄러운 음향 속에서 얘기도 제대로 나눌 수가 없다. 나를 데려간 친구들은 내게 노래를 권유하곤 했다. 나는 일단 거부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돈을 받으면서 노래를 하면 했지 내 돈을 주면서 노래를 부르지는 않는다."

그래도 친구들은 돈을 지불하고 내 이름을 적어서 노래를 신청하곤 했다. 그에 따라 무대의 사회자는 내 순서가 되면 나를 호명한다. 알고 있었든 전혀 몰랐든 간에 무대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이크는 잡은 나는 엉뚱한 말을 한다.

"한창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춤들을 추시는 흥겨운 자리에서 분위기를 깨는 짓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노래에 앞서 시를 낭송하겠습니다. 이런 자리에서도 시가 존재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모국어로 빚어진 아름다운 시가 이 자리에 함께 한다면 여러분 모두에게 더 좋은 기분과 감동을 안겨드리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반주자들에게 적당한 배음을 부탁하고는 시를 낭송한다. 술자리의 대부분의 손님들은 내 시낭송을 감상하며 색다른 기분에 젖는 표정들이다. 그렇게 분위기를 만든 다음 내가 스스로 시를 한 수 더 읊기도 하고, 요청을 받아 더 읊기도 한다. 그러고는 노래를 부르는데, 대개는 가곡을 불렀지만 민중가요, 즉 운동권 노래를 부른 적들도 있다.

그런 일은 서울에서도 있었고, 대전에서도 있었다. 보령과 서산에서도 있었고 태안에서도 있었다. 노래하고 춤추는 술집에서 시낭송을 하는 일들을 계속할 때 <여성자신>이라는 여성지로부터 청탁을 받았다. 수필 청탁이었다. 나는 술집에서 시낭송을 하는 내 얘기를 썼다. 제목이 아마 <시를 읊는 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얘기는 내가 지난2010년 출간한 장편소설 <향수>에도 소개됐다.

내가 노래하고 춤추는 술집에서 시를 읊던 시절에는 시를 낭송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 이후에 전국 각지에서 시 낭송회들이 생겨나고 시를 낭송하는 이들이 많아지게 됐다. 물론 나로 말미암은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어느 모로는 시낭송 분야 쪽으로 나는 선구자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1983년이던가, 충남 태안의 몽산포에서 '해변시인학교'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온 수십 명의 시인 지망생들이 함께 했고, 유명시인들도 다수 참가했다. 황금찬 시인이 교장이었고, 구상 시인도 오셨다. 고장에서 '흙빛문학회'를 운영하던 나는 동료들과 함께 구상 선생님을 모시고 술자리를 가졌다. 그때 구상 선생님에게서 김소월의 <산유화>에 대한 '해설'을 감동적으로 들었고, 나는 구상 시인의 <길>이라는 시를 낭송했다. 구상 선생님은 내가 낭송하는 자신의 시를 들으며 어린애처럼 좋아하셨다. 당신의 청년 시절 시를 내게서 처음 들어본다는 말씀도 하셨다. 내가 일찍이 군대 시절에 시를 외운 보람이 실팍해지는 순간이었다.

그후 1986년이던가, 서울 명동성당에서 '한국가톨릭문인회'의 송년 모임이 있었다. 회의 후 만찬을 갖는 자리에서 나는 구상 시인의 <길>과 함께 송윤숙 시인의 <장식론>을 낭송했다. 내 시낭송을 듣는 홍윤숙 시인은 황홀한 표정이었다.

후일 홍윤숙 선생은 내게 당신의 시집과 함께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에 "시 낭송을 들을 때 허공에 붕 떠서 부유하는 기분이었습니다!"라는 말씀을 적으셨다. 그 후로 홍윤숙 선생은 시집을 내실 때마다 사인을 해서 내게 보내주신다. 그것 역시 내가 일찍이 군대 시절에 홍윤숙 시인의 시를 외운 보람일 것 같다.

석양 무렵 길 위의 기도, 길 위의 시

2012년 12월 9일 대전 탄방동성당에서 열린 대전가톨릭문학회의 시낭송회에서 구상 시인의 <길>과 내 자작시를 낭송했다. 가장 최근의 시낭송 모습이다.
▲ 최근의 시낭송 2012년 12월 9일 대전 탄방동성당에서 열린 대전가톨릭문학회의 시낭송회에서 구상 시인의 <길>과 내 자작시를 낭송했다. 가장 최근의 시낭송 모습이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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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등단을 했지만 시를 끊임없이 사랑하며 살아왔다는 말을 맨 앞에 적었다. 시 관문을 밟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시를 지어왔고, 이런저런 지면에 발표도 꽤 많이 했다. 나는 분명히 소설가지만 내 이름의 질감 탓인지 나를 시인으로 보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것은 내가 소설가로 크게 이름을 떨치지 못한 탓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나는 내가 시인으로 불리는 것을 과분해하면서도 고마워한다. 지금까지 16명 시인들의 시집에 '평설'이라는 이름의 글을 썼는데, 시인들 모두 내게 감사했고, 내게 '사은패(謝恩牌)'를 만들어준 시인도 있다.

시를 읽으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고 맛도 잘 느껴지지 않는데, 평설을 읽으니까 뜻을 알겠고 재미도 있고, 시를 다시 읽게 되더라는 독자들의 말도 여러 번 들었다. 시 해설을 읽으면서 '귀신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재미있는 말을 접한 적도 있다.

틈틈이 꾸준히 시를 지으면서 심심찮게 '목적시'도 짓곤 했다. 목적시란 어떤 특별한 목적에 의해서 지어진 시의 이름이다. 이를 테면 축시·헌시·기념시·추모시·조시 등이다. 내게는 목적시를 짓는 기회가 꽤 많았다.

내가 처음 목적시를 지은 때는 1982년이다. 문단에 갓 등단한 해였는데, 안면도 승언리의 한 길체에 대한광복군 서산군지단장 이종헌 선생 추모비를 건립하면서 주관처에서 내게 비석에 새겨진 헌시를 부탁해왔다. 그래서 처음으로 목적시를 짓게 됐다.

등단 이후 30년 동안 문인 행세를 해오면서 이런저런 갈래의 목적시를 꽤 많이 지어왔는데, 최근에는 '길 위의 시'들을 많이 짓는다. 민주주의가 모멸되는 오늘의 현실을 살아가면서 민주주의 부활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나는 길거리, 노상 위에 많이 머물곤 한다. 천주교 사제들과 불교 스님이 함께 한 '오체투지 순례기도'에도 여러 번 참여했고, 용산참사 현장에서 매일 저녁 거행된 '용산미사'에도 수없이 참례했다.

또 2010년 11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길거리에서 거행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월요시국기도회 - 여의도 거리미사'에 월요일 저녁마다 참례하곤 했다. 그리고 지난해 7월 2일부터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매주 월요일 저녁에 거행되는 '민주주의의 부활을 위하여 용산참사,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4대강, 제주 구럼비, 그리고 오늘을 생각하는 월요미사'에 매번 참례하면서 미사 전의 묵주기도를 주송하곤 한다. 충남 태안에서 서울을 왕래하니 돈 쓰고 시간 쓰고 고생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지난해 여름에 출간한 목적시집 <불씨>의 머리글에도 밝혔지만, 내 목적시들은 대개 이 땅의 현실상황 속에서 빚어진 뜨거운 '기도'들이다. 절절함과 치열함을 지닌 눈물겨운 절망과 희망의 변주곡들이다. 석양빛 속에서 더욱 뜨겁게 살고자 하는 간절한 외침이기도 하다. 감히 진실과 정의, 참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나는 시집 <불씨>를 펴낸 것이다.

시집 <불씨>의 현실 언어들이 독자들의 가슴에 작은 '불씨'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최초의 목적시집을 펴냈지만, 결국 아무런 보람도 없게 됐다. 그만큼 허탈감이 크고, 지금도 '멘붕' 상태가 지속된다. 그래도 나는, 그래서 더욱 끊임없이 참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길 위의 기도'를 계속할 것이며, '길 위의 시'들을 계속 지어나갈 것이다.


태그:#시낭송, #구상 시인 , #홍윤숙 시인, #베트남 전장, #거리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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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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