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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2일 오전 10시 10분]

한 아이가 있었다. 10세 되던 어느날, 그는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호되게 매를 맞았다. 교실에서 떠들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내가 한 게 아니다"며 극구 변명했지만, 거짓말을 한다고 더 맞았다. 억울했다. 그는 바로 그 길로 태권도장으로 향했다. 태권도를 배워 억울함에 대한 앙갚음을 하고야 말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는 20대 후반 팔팔한 나이에 미국땅으로 건너왔다. 이번에는 '태권도로 세상을 바꾸어 놓겠다'는 꿈을 품었다. 하루 2~3시간 잠을 자고 굶기를 밥먹듯 하며 초기 이민생활을 견뎌냈다. 불과 3~4개월이 지나며 수련생들이 몰려들었고, 10여 년이 지나면서 달러가 쌓이기 시작했다. 비난을 무릅쓰고 '태권도 비즈니스'를 한 결과이기도 했다.

미국 플로리다 김영군 사범
 미국 플로리다 김영군 사범
ⓒ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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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랜드 마스터'라는 명칭에 걸맞게 주류사회에 거액의 도네이션도 마다 하지 않았다. '체계적인 태권도 교육'을 한다며 모은 돈으로 책을 쓰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Y.K. Kim'이라는 고유 브랜드로 알려지게 된 그는 어느덧 한인사회는 물론 주류사회에서도 꼽아주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느닷없이 '영화사업'에 뛰어든다. 한국에 들어갔다 '성공한 재미 태권도인'으로 텔레비전에 소개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 유명한 무술영화 감독이 인터뷰 방송을 보고 태권도 영화를 만들자는 제안을 해 왔고, 꿈을 달성할 절호의 기회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를 승락했다.

이렇게 해서 100만 달러의 거금을 들인 영화 <마이애미 커넥션>(Miami Connection)이 제작에 들어갔다. 마침 미국 안방에서 <마이애미 바이스>가 큰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주연은 자신이 맡았고, 제자들이 몽땅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는 고아로 자란 대학생 태권도 수련생들로 구성된 음악 밴드 '드래곤 사운드', 마약밀매단 닌자 그룹 그리고 닌자와 연결된 오토바이 갱단 간에 얽힌 이야기가 전체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배급사들로부터 '쓰레기 같은 영화'라는 혹평을 받았다. 영화관 상영을 포기하지 못한 김 사범은 홀로 기존의 필름에 새로 찍은 장면들을 삽입하고 다시 돈을 들여 플로리다 내 8개 극장에서 마침내 영화를 상영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김 사범은 더욱 수치와 절망을 경험해야만 했다. 지역 유명 영화 평론가의 영화평은 혹독했고, 영화는 3주 만에 거둬졌다. 십수년 악착같이 키워온 '태권도 사업'이 파산에 이르게 되었고 6차례나 입원을 하며 실의의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이후로 <마이애미 커넥션>은 김 사범에게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끔찍한 경험으로 남게 됐다.

"내가 당신이 버린 영화를 살리겠다"... 한 여름에 걸려온 '괴 전화'

미국 전역의 35개 독립영화관에서 제작 25년 만에 재상영 무대에 오른 <마이애미 커넥션> 포스터
 미국 전역의 35개 독립영화관에서 제작 25년 만에 재상영 무대에 오른 <마이애미 커넥션> 포스터
ⓒ Drafthouse Fi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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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이 지난 어느날, 생판 들어보지도 못한 텍사스 영화배급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당신이 버린 영화를 내가 살려 내기로 했다"는 전언이었다. 장난 전화로 생각하고 두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애써 묻어뒀던 25년 전 악몽을 되살린 것에 은근히 화가 났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을 영화배급사 드래프트하우스의 오너라고 정중히 소개한 미국인은 경매사이트인 이베이(ebay)에서 우연히 <마이애미 커넥션> 필름을 구입하고 자체 시연을 거친 자초지종을 얘기하며 김 사범을 설득했다.

반신반의하던 김 사범은 필름 제작 25주년인 지난해 7월부터 영화 재상영을 후원하고 나서게 됐다. 그는 재상영 초기부터 믿기지 않을 만큼 관객들의 반응이 좋은 것을 보고서야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다. 신바람이 난 그는 시카고, 뉴욕, 로스앤젤레스 등 미 전역의 34개 영화관을 순회하며 태권도를 소개하고 팬 사인회를 갖는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지난해 12월 11일 DVD와 블루레이로 이미 출시된 <마이애미 커넥션>은 올랜도 독립 영화관인 엔지안(Enzian)에서 15일 상영을 마지막으로 철수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찌감치 표가 매진되는 상황이 되자, 엔지안 측은 28일과 29일 앙코르 상영을 했다.

기자는 지난 12월 28일 직접 인터뷰에 이어 지난 11일 인터넷으로 보충 인터뷰를 했다. 그의 도장에서 만난 김 사범은 3개월 동안 팬 사인회를 위해 전국의 극장을 돈 탓인지 다소 피곤한 듯 보였으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목소리는 밝고 힘이 넘쳤다.

- 지난달 말로 35개 영화관에서 상영이 모두 끝났다. 소감을 말해달라.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완전히 잊고 지낸 지 25년 만에 재상영 무대가 열리다니. 뉴욕, 시카고, LA, 오스틴 등 대도시 영화관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고 느낄 만큼 상영 전후로 관람객들이 밀려들었고 호응이 컸다. 현지에 가서 보고 너무 놀랐다."

- 미국 주류 미디어들도 <마이애미 커넥션>의 재상영을 경이롭다는 듯 보도했고, <올랜도센티널> 등 1면 주요기사로 비중있게 다룬 것을 보았다.
"플로리다 지역 신문뿐 아니라 <시카고 트리뷴>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LA 타임스>, CNN, MS NBC 등 주요 미디어들이 큰 관심을 갖고 전했다. <마이애미 커넥션> 구글 조회는 1억이 넘었고, 한 인터뷰 기사는 조회수 250만을 기록했다."

김영군 사범 제작 주연의 <마이애미 커넥션>을 엔터테인먼트 섹션 주요 기사로 다룬 CNN 인터넷판. '마이애미 커넥션, 인기 바닥에서 명성으로 뒤바뀌다'는 타이틀이 영화의 화려한 부활을 말해주고 있다.
 김영군 사범 제작 주연의 <마이애미 커넥션>을 엔터테인먼트 섹션 주요 기사로 다룬 CNN 인터넷판. '마이애미 커넥션, 인기 바닥에서 명성으로 뒤바뀌다'는 타이틀이 영화의 화려한 부활을 말해주고 있다.
ⓒ CNN 인터넷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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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애미 커넥션>이 재상영 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한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미 영화평에서도 나왔지만, 인터넷 시대에 인위적인 기술로 만들어진 영화에 싫증을 낸 젊은이들이 1980년대의 '리얼 액션' 영화를 알아보게 된 것이다. 영화전문가의 눈보다는 관객의 눈을 사로잡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 1986년 영화를 완성하고 나서 영화의 끝부분을 다시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화를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좋겠다는 어떤 영화평론가의 충고를 받아들여 뒷 부분을 다시 촬영했다. 실패한 영화라며 손들고 모두 떠난 상태에서 영화제작 관련 책들을 사다 밤새 공부하면서 감독하고 주연도 하며 다시 만들었다. 모두가 '제발 그만 하라'고 말렸다."

- 다시 만들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나?
"물러서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고국을 떠난 이후 모은 재력과 정력을 다 쏟아부은 마당에 포기하기가 힘들었다. 영화 전문가들의 평은 혹독했다. 하나같이 '빨리 갖다 버리는 것이 사는 길이다'고 했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올랜도 영화관 등에서 상영했는데 언론도 관객의 평도 싸늘했다."

"어머님 가르침 아니었으면 평생 머슴이나 살았을 것"

- 그동안 김 사범이 내놓은 태권도 서적들과 행적을 보면 '긍정적 마인드'와 '무한 도전'의 정신이 강하게 느껴진다.
"모두가 어머님 한테서 배운 것이다. 남편을 전쟁통에 잃고 자식들을 키우면서 늘 어머님은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 살아 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 살아라'고 하셨다. 어머님의 보살핌과 강한 가르침이 아니었으면 시골동네에서 평생 머슴이나 살았을 것이다."

김 사범의 어머니는 현재 88세로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김 사범의 아버지는 용인 중고등학교 설립자로 지역 유지였으나 한국전 때 사망했다고 한다. 가세가 기울어 먹고 살길이 막연해진 김 사범은 경기도 파주와 양주의 외갓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에서 10세때 태권도를 처음 배웠다. 김 사범이 태권도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억울하게 매를 맞은 뒤 분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성년이 된 후 그 담임 선생님은 평생의 '은사'가 되었다. 태권도를 하면서 자연스레 가르침을 준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우애'를 배운 덕택이었다.

청년 시절 김 사범은 처음으로 일산과 고양에서 도장을 열었고, 그 곳에서 평생의 은인 이중협 사범을 만나 태권도 정신을 몸에 익혔다. 그는 이중협 사범으로부터 '굴절하지 않는 정신'을 배웠고,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그를 '아버지'로 모셨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서울로 올라와 1969년도에 연희동에 천막 도장을 시작했고, 3~4년 후 전두환씨 집이 내려다 보이는 번듯한 2층 건물에 입주해 태권도를 가르쳤다.

당시 대학에 갓 입학한 기자가 그 도장에 몇번인가 드나들었던 기억이 있다. 태권도를 시작한 5살짜리 어린 조카를 데려다 주기 위해서였는데, 젊은 사범이 비지땀을 흘리는 것을 문 밖 먼 발치에서 지켜 보았었다. 20여 년이 흐른 후 미국땅 올랜도에서 우연한 자리에 통성명을 하고보니 바로 그 청년이 김영군 사범이었다. 희한한 재회였다. 오다가다 김 사범을 마주친 적은 대여섯 차례에 지나지 않았고, <마이애미 커넥션>이 뜨고서야 오랫동안 마주하고 앉아 그의 태권도 인생을 듣게 된 것이다.

- 김 사범이 쓴 책을 보니 고국을 떠난 이후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 뉴욕을 거쳐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대부분의 태권도 인생을 살았다. 초기에 어려움이 많았을 듯한데 어떻게 돌파했나.
"처음 도장을 열었을 때 일주일씩 물로 배를 채우며 전단지를 들고 올랜도 시 구석구석을 돌아 다녔다. 오후 9시에 운동이 끝나면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했는데, 다음날 동틀녘까지 뿌린 적도 많았다. 돈도 없고 책도 없고 가르쳐줄 이도 없는 상황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방법밖에 없었다. 3개월 정도 하고 나니 어느정도 기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하루 2~3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었고, 15년 동안 토막잠을 자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나는 태권도에 미쳐 있었다."

- 미국에 정착한 이후 김 사범의 태권도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를 꼽으라면?
"우선 현재 뉴저지에 생존해 계신 박동근 사범님을 꼽을 수 있다. 박 사범님은 초기 미국 정착 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많은 도움을 준 분니다. 다음으로는, 나의 '미국 아버지'인 찰리 리스(Charley Reese)이다. <올랜도센티널> 칼럼니스트인 그로부터 '강자에 당당하고 약자 앞에 설 줄 아는 정의'를 배웠고, 지금도 삶의 지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내 태권도 인생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이종우 지도관 관장님이다.

- 미국에서 태권도 비즈니스로 가장 성공한 인물이라는 소문과는 걸맞지 않게 태권도장이 작은 것 같다. 현재의 도장이 1981년도에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재정적 여유가 생겼을 때 도장을 크게 지을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했다. 그러나 책을 쓰는 일에 매달리기로 결심했다. '돈만 많으면 뭐할 건가, 책은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건물만 멋지고 크게 짓고 머릿속에 든 것이 없는 무식한 태권도인이 되는 것이 싫었다.

"영어 사전을 질근질근 씹고 다녔다"

2012년 12월 28일 올랜도 엔지안에서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이 김 사범의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2012년 12월 28일 올랜도 엔지안에서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이 김 사범의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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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적 태권도에 전념하느라 진지하게 공부할 기회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미국에서 어떻게 공부했나.
"영어 사전을 통째로 외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사전을 베개 삼아 잠들었고 입으로는 질근질근 씹고 다녔다. 어느정도 영어가 자유로워지면서부터는 스포츠 관련 서적은 물론, 문학, 철학, 종교학, 심리학 등 좋다는 책들을 줄줄이 모아 독파하기 시작했다.

- 최근 2년여 동안 미국의 여러 대기업에서 '모티베이션 키노트 스피커(동기 부여 전문 강사)'로 초빙받을 정도로 유명 연설가가 되었다. 김 사범을 가리켜 '인간개발의 전도사'로 부르는 이도 있다. 책도 많이 쓴 것을 알려져 있는데.
"현재까지 30권 정도의 영문으로 된 책을 썼고, 14권은 출판했다. 앞으로도 계속 책을 쓸 것이다. 사실 미국 회사들이 나를 '키노트 스피커'로 초빙한다고 했을 때, 놀라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 영어 발음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은 나의 패션(열정)을 높이 샀고, 청중들의 욕구와 필요성에 맞춘 강의 내용과 방식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 김 사범의 삶을 이끌어온 흔들리지 않는 어떤 철학이 있는 것 같다. 그게 뭔가.
"한마디로 '불굴의 정신(Never Stop)'과 '자기개발(Improve Myself)'이다. 한 번 뜻하고 세운 목표에 대해 불굴의 정신으로 도전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자기개발에 몰두하는 것이다. 내 대표적인 책 가운데 하나인 <승부는 선택이다>(Winning is a Choice)에 나의 정신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같은 책을 즐겨 읽는다."

- 듣다 보니 김 사범이 미국생활에서 성공을 거두어온 태생적 또는 체득적 내부 요인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게 뭔가.
"잘 지적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혼자였다. 어머니는 늘 장사다니느라 밖에 나가 계셨고, 내 스스로 먹고 자고 학교가는 일을 혼자서 해결한 적이 대부분이었다. 모든 게 내멋대로 여서 뒤죽박죽이 될 때도 있었지만,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키웠다, 자유분방한 가운데 한도 끝도 없이 내 생각을 펼칠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아마도 부유하게 살고 형제들이 많았다면 오늘날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 미국 정착은 김 사범의 자유분방하고 독립적인 생활과 사고방식에 날개를 달아 주었을 것 같다.
"(박장대소하며) 정말이다. 미국이 나에게는 딱 맞았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이다. 나름 자유롭게 살아왔지만, 한국사회가 얼마나 걸림돌과 제약이 많나. 그렇지만 미국사회라고 해서 모두가 좋은 게 아니었다."

- 어떤 점이 미국사회의 나쁜 점이라고 생각하나. '그랜드 마스터'로서 미국사회에 줄 수 있는 충고가 있을 듯한데.
"한국을 비롯한 동양문화권은 제약이 많은 대신, 미국 사회는 상대적으로 개인생활에서 자유분방하고 무절제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절제 없는 자유, 단련(Discipline)없는 자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 사회에서 태권도가 인기를 끌어온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단련'을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집세 못내고 전기 끊기는 판에 '태권도의 가치'를 지키겠다?

- 그동안 한인사회에 나돌던 조금 껄끄러운 질문을 하겠다. 김 사범을 가리켜 일부에서 '태권도를 상업화시킨 인물'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도'는 '도'로서의 가치를 지키는 것인 금과옥조인데, '도'를 '장삿속'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여러번 들었던 비판이다. 어떤 태권도인으로부터는 '장사꾼 자식, 네놈이 고귀한 무도를망치고 있다'며 따귀도 맞았고, 어떤 이는 면전에서 침을 뱉기도 했다. 그러나 3년여쯤 지나서 평정되었다. 그분들 가운데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이들도 있었고, 나중에는 도장운영의 노하우를 배우겠다는 이들이 넘쳐났다."

- 책을 쓴 이유도 그때문인가?
"책은 좀 더 원대한 이유 때문에 쓰여진 것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무시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집세도 전화비도 못내고 전기도 끊기는 마당에 무슨 태권도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것인가. 너무 현실성 없는 이야기다. 자본 없이 의학이 발전했겠나? 자본 없이 과학기술이 발전했겠나? 내가 도장 외에 마케팅 컨설팅 회사(AMS), 잡지사(Martial-art World), 서플라이 회사(샌프란시스코)를 운영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 그 많은 돈을 벌어서 어디에 다 쓸건가.
"(웃으며) 무도대학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유치원부터 초중고와 대학까지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무도대학을 만들겠다. 당대에 먹고사는 것으로 만족하고 제자 몇몇 만들어내는 것으로 끝내는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것으로 삶을 마감하기에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다. 교육없는 무도는 깡패나 건달을 양산할 수도 있다. 무도대학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고 싶다."

- 이제 60대 후반에 들어섰는데, '태권도 인생'에 후회는 없는가. 성공한 태권도인으로 소문이 나 있지만, 그래도 아쉽고 후회스런 부분이 있을 듯 한데.
"태권도를 내 인생으로 삼은 것에는 추호도 후회가 없다. 태권도는 내 어머니요 스승이었다. (긴 침묵 후에 잠긴 목소리로) 다만, 가족을 등한시한 것은 되돌이킬 수 없이 아쉽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다 보니 모든 것을 다 챙길 수는 없었다."(이 부분에서 김 사범은 어머니와 가족을 얘기하다 왈칵 눈물을 쏟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해 기자를 몹시 당황케 했다).

- 마지막으로 묻겠다. 또 영화를 만들 생각인가?
"새 영화를 구상중이다. 이번에도 무도 영화다. 세상을 들었다 놓을 영화를 만들고 싶다. 영화만큼 태권도를 프로모션할 좋은 매개체가 어디 있겠나."

덧붙이는 글 | 플로리다코리아 위클리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태권도, #김영군, #마이애미 커넥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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