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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주말, 나는 아이와 함께 오랜만에 대구 친정에 들렀다. 사실 크리스마스 바로 전 주말이 친정 할아버지 제사라 그맘때 한번 들를까 했던 터였다. 그러나 나는 내려가지 못했다. 그 며칠 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가 뜻밖의 변수가 된 것이었다.

대통령 선거는 선거일 뿐이고 친정 식구는 식구이니, 그럴 일이 생길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선이 뭔지, 내 편 네 편으로 나뉘어 감정적으로 치닫고, 막판으로 갈수록 내가 응원하는 후보가 당선되길 바라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던 지라, 내 바람과는 다른 결론에 이르자 나는 무너져 내렸다.

예상과 다른 출구조사 발표에 배탈로 드러누운 나

선거 당일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투표율이 높으면 어느 후보에게 유리하다는 공식을 철썩 같이 믿었던 터라 오후 6시를 향해갈수록 높아지는 투표율에 기분도 고무된 터였다. 그러나 기대를 가지고 집중하였던 출구조사 결과는 예상 밖이었고, 혹시나 하는 기대는 저녁 8시가 되고 9시가 되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예상 밖의 출구조사결과를 보았을 때부터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향방을 가늠할 수 없었던 선거 당일, 누가 당선되든 사실 내 일상과는 크게 상관도 없는데, 나는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식사 준비도 못했다. 가족 모두가 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삼각김밥과 배달시킨 치킨을 먹었는데, 평소에 잘 먹지 않던 삼각김밥 때문에 사단이 났는지 하필이면 그 시간 무렵에 배탈이 난 거였다.

애타는 열망과는 상이하게 흘러가는 대선결과만으로도 마음이 힘든데, 배탈까지 나자 도저히 개표방송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을 들락거리기를 몇 번, 몸도 마음도 무기력해졌다. 잠시 자고 나면 뭔가 달라져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약을 먹고 억지로 잠을 청해 한두 시간 자고 일어났지만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오히려 '당선 유력'이라는 자막이 다른 후보 옆에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막은 잠시 후 '당선 확실'이 되었다.

말 그대로 '멘붕'이었다. 앞을 향해 가던 세상이 거꾸로 뒤로 돌아서는 것 같았다. TV 화면 속 붉은 지도의 '대구 경북'은 한층 검붉은 색으로 높은 투표율과 지지율을 숫자로 내보이고 있었다. 내 고향이고, 아직도 부모님과 동생들, 일가 친지들이 살고 있는 그곳의 사람들이 80%에 가까운 몰표 지지로 내 바람을 무참히 무너뜨렸다. 그 감정의 격랑 속에서 나는 친정이 대구인 것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마음이 그랬으니 며칠 지나지도 않아 친정에 갈 수 없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다. 2-3주가 지나면서 나도 이성을 되찾았고, 잔뜩 치솟았던 감정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늘 겨울방학이면 애들을 데리고 한 번씩은 친정 나들이를 했던 터였다. 더 미루기도 애매했다. 새해 첫 주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마음으로 친정에 들른 나는 언제 그런 생각을 했냐는 듯 오랜만에 보는 친정 부모님과 동생네와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높은 투표율에 안절부절... 깡소주 들이켠 70대 친정 아버지

그날 밤, 잠자리에서 동생과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데, 서로에게 금기어일 것 같았던 대선 얘기가 우연히 흘러나왔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라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런데 동생이 얘기해주는 선거 당일의 친정 아버지의 모습이 뜻밖이었다.

대선 당일, 높은 투표율이 화제가 되자 친정 아버지가 안절부절 못하셨다 했다. 투표율이 높아 내가 응원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아버지 입장에서는 나라가 망하는 것이었고, 북한에 나라를 내주는 꼴이 되니 절대로 안 될 일이었던 것이다. 오후가 될수록 점점 높아지는 투표율에 4시쯤,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시더니 소주를 사들고 오셨단다.

그리고 2시간쯤 소파에 앉아 TV 뉴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 깡소주를 들이키셨다 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고 입에서는 술냄새가 심했고 안색까지 나빠졌다고 한다. 술도 많이 못 드시는 분이, 속이 타니 안주도 없이 애꿎은 소주만 들이켜며 개표방송만 애타게 기다리셨던 거다.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이 하늘에 전달되었던지, 다행히 개표방송의 출구조사는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결과를 전해주었다. 아버지는 긴가민가 하는 마음으로 개표방송을 지켜보시다, 원하던 후보 이름 옆에서 '당선 유력'이라는 자막을 보고 흐뭇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했다.

동생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의 그날 행적이 떠올랐다. 그 얼마나 극과 극의 반응이란 말인가? 깡소주를 들이켠 70대의 친정 아버지와 배탈이 난 40대의 딸이라니. 결과가 달랐다면 내가 아니라 친정 아버지가 속이 상해 드러눕지는 않으셨을까? 만약 그랬다면, 내가 지지하던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해도 정말 절반의 승리일 뿐이었을 것이다.

이번 결과를 받아들기 전까지는 내가 믿고 따랐던 민주주의와 공정함의 가치가 이 시대에 필요하고 걸맞은 가치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국민의 선택을 받는 데 '실패'하는 결과에 맞닥뜨리자 그동안 내가 과연 전체를 보았던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내가 의미를 두었던 가치는 어쩌면 여러 가치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왜 내가 믿는 가치만이 당연한 듯 우선권을 두고, 그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비하 어린 적대적 감정을 가졌던 것일까 하고 말이다. 그건 나의 또 다른 오만은 아니었을까?

전체를 두루 살펴볼 만한 냉철함과 상대의 비판은 비판대로 받아들이면서 내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여유가 부족했던 건 아닐까? 적어도 다른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내 모습을 보려 노력하기는 했었나 반성해본다. 대선 결과에서 촉발된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내 삶의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내가 70대가 되었을 땐 그날의 아버지보다는 조금 더 어른스럽게 대처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음먹으면서.


태그:#2012 대선,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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