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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 어초은공파 사당
 녹우당 어초은공파 사당
ⓒ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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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에서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년 6월 22일~1671년 6월 11일)를 만났습니다. 고산은 시인·문신·작가·정치인이자 음악가로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 윤휴와 함께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예송 논쟁 당시 선봉장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작품 중<산중신곡(山中新曲)>, <어부사시사> 등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녹우당, 500년을 꿋꿋하게 산 은행나무...

해남에는 고산 유적지가 많은 데 그 중 하나가 '녹우당(綠雨堂)'입니다. 사적 167호인 녹우당은 500년 된 은행나무 때문에 유래되었습니다. 은행잎이 날리는 소리가 비 오는 소리와 같다는 뜻입니다. 이 은행나무는 고산 4대조인 어초은이 이 집에 살던 때,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 걸 기념하며 심었다고 합니다. 500년 동안 녹우당을 지킨 은행나무의 꿋꿋함 앞에 서면 저절로 마음을 조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 종가인 녹우당 앞 은행나무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 종가인 녹우당 앞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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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녹우당 뒷산 숲에는 천연기념물 제241호인 비자나무 300여 그루가 있습니다. 비자나무는 윤씨 선조들이 뒷산에 작은 바위들이 있어 사람들 눈에 띄면 마을이 가난해지므로 바위를 숨기기 위해 비자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기대를 가지고 비자나무 숲을 찾았지만 말라 죽은 나무들도 몇 그루가 눈에 띄었습니다. 역시 모든 생명은 세월에 자신을 내놓을 수밖에 없음을 비자나무가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비자나무는 마을의 풍요로움을 위해 푸름을 잃지 않았습니다.

천연기념물 제241호 비자나무
 천연기념물 제241호 비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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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녹우당은 수리 중이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몇 백 년을 지나 온 옛집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해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녹우당 앞에서 고산 유적전시관이 있어,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의 유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집안 유적전시관에 국보와 보물급 유물이 많았습니다. 국보 240호 공재 윤두서 자화상,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이 담긴 고산 윤선도 수적관계 문서와 고려 공민왕 3년(1354년) 노비문권 등 고산과 해남 윤씨 유물 4600여 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윤두서 자화상, 조선 선비 올곧음 풍겨....

고산윤서도유물관에 전시된 '동국여지지도' 공재 윤두서가 1710년(숙종 36년)에 그린 것으로 김정호 대동여지도보다 150년이 앞선다. 보물 481호다.
 고산윤서도유물관에 전시된 '동국여지지도' 공재 윤두서가 1710년(숙종 36년)에 그린 것으로 김정호 대동여지도보다 150년이 앞선다. 보물 481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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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481호인 '동국여지지도' 공재 윤두서가 1710년(숙종 36년)에 그린 것으로 김정호 대동여지도보다 150년 빠릅니다. 윤두서(尹斗緖, 1668년∼1715년)는 고산의 증손으로 숙종 때 진사에 급제해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는데, 특히 인물·동식물 그림에 뛰어나 겸재(謙齋)·현재(玄齋)와 함께 조선의 '3재'라 불립니다.

공재 윤두서 자화상. 국보 제240호
 공재 윤두서 자화상. 국보 제2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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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국보 제240호인 '윤두서자화상'은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걸작 중 걸작입니다. 수염은 사진을 찍은 것처럼 가늘게 처리해, 예리한 눈동자와 함께 강한 힘과 생기를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느끼게 합니다. 거짓 없는 외모와 자신의 정신세계를 있는 드러내 올곧은 조선 선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인도. 공재 윤두서 손자 청고 윤용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양손을 들어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을 하고 있는 이 그림은 당시 부녀자 신분과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미인도. 공재 윤두서 손자 청고 윤용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양손을 들어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을 하고 있는 이 그림은 당시 부녀자 신분과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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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 윤두서 손자 청고 윤용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인 미인도는 양손을 들어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을 하고 있는 이 그림은 당시 부녀자 신분과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가채값이 비싼 것은 기왓집 몇 채 값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미인도 가채와 윤두수 자화상보다 눈에 띈 작품 하나는 '규한록'이었습니다.

13m에 쓴 해남 윤씨 종부 이씨 부인의 '규한록'

규한록
 규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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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한록. 광주이씨 부인이 1834년(순조34년) 3월 4일 보성군 대곡(한실) 친장에 가 있으면서 해남 시어머니에게 올린 한글 궁체로 쓴 수기체 글. 고산 윤선도 8대 종부인 광주이씨(1804-1863년)는 17세 결혼하였으나, 신행전 홀로되어 남편 없는 종가 종부로서 고단한 삶을 기록했다. 길이가 13m에 200자 원고지 150매 분량이다.
 규한록. 광주이씨 부인이 1834년(순조34년) 3월 4일 보성군 대곡(한실) 친장에 가 있으면서 해남 시어머니에게 올린 한글 궁체로 쓴 수기체 글. 고산 윤선도 8대 종부인 광주이씨(1804-1863년)는 17세 결혼하였으나, 신행전 홀로되어 남편 없는 종가 종부로서 고단한 삶을 기록했다. 길이가 13m에 200자 원고지 150매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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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한록(閨恨錄)은 광원군(廣原君) 이극돈(李克墩) 후손으로 해남윤씨 종가에 출가하여 윤선도 8대 종손부가 지은 한글 궁체로 쓴 수기체로 길이가 13m로 200자 원고지 150매 분량입니다. 광주이씨 부인(1804~1863년)은 열일곱 살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신행(新行,결혼을 할 때 신랑이 신부집에 가거나 신부가 신랑집에 감)을 앞두고 그만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죽는 바람에 후사가 없어 종손을 입양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해남 윤씨 집안이 나라부자(國富)로 불릴 정도로 부자였다는 점입니다. 종손 입양을 두고 해남 윤씨 집안은 재산다툼을 벌입니다. 이씨 부인은 이 모든 것을 다 이겨내고 먼 일가 붙이를 양자로 입적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씨 부인 겪은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이씨 부인은 1834년(순조34년) 3월 4일 보성군 대곡(한실) 친장에 가 있으면서 시어머니에게 자신이 겪은 고통과 질곡을 편지글로 올렸는데 바로 규한록입니다. 규한록은 청상과부로서 그리고 종가집 종부로서 힘들게 살아온 한 여인의 삶이 생생하게 그린 작품으로 정조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함께 조선시대 여성 문학의 진수입니다.

고려 공민왕 때, 노비문서...

윤선도 유적전시관에는 독특한 문서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고려 공민왕 때 노비문서입니다. 보물 제483호인 노비문서는 공민왕 때 윤광전이 아들에게 노비를 상속해주는 문서로 문자 내용은 '이두문'입니다. 공민왕 때니 주인도 노비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때는 문서 하나로 주인과 노비로 결정되었습니다. 문서상으로 노비가 없는 2013년은 정말 노비가 없는 세상일까요? 사람답게 살려는 노동자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감시하고 사찰한 이마트가 거센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마트는 '현대판 노비문서' 작성을 시도했는지도 모릅니다.

고려시대 개인 노비문서. 보물 제483호
 고려시대 개인 노비문서. 보물 제4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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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고산윤선도, #해남, #윤두서, #노비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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