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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포 벤데타>라는 영화가 있다. 동명의 그래픽 노블(문학 형식의 문장이 많은 작가주의 만화)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2006년 개봉작이다. 불멸의 고전도 아니고 최신작도 아닌 영화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낸 걸까. 그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습이 <브이 포 벤데타>가 그리는 세상과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은 2040년의 영국이다. 제3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군부가 정권을 잡은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통제된다. 직함은 의장이지만 실상은 군주에 가까운 지도자 '서틀러'는 조지 오웰의 <1984>를 연상시키는 철권 통치를 자행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극도로 억압된 사회에 테러리스트가 나타난다. 그의 이름은 'V'. 여주인공 '이비'가 우연한 기회에 'V'를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독재자 서틀러가 구사하는 통치 전략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국민의 눈과 귀를 닫을 것. 언론을 장악한 정부는 필요에 따라 날조된 사실들을 보도한다. 정부가 벌인 끔찍한 생체 실험이 사이비 종교 단체의 짓으로 알려지고, 멀쩡히 살아 있는 V가 사살되었다고 공포하는 식이다.

둘째, 불순분자는 싹을 잘라 버릴 것. 서틀러를 희화화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프로듀서는 사형에 처해지고, 동성애자나 이교도들은 고문 끝에 비참하게 죽어간다. 모든 전화는 무작위로 도청되며, 녹음기가 곳곳에 설치되어 국민을 감시한다.

정도와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난 5년간 이명박 정부가 보인 행태는 서틀러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우선 종편과 MBC 등을 통해 언론을 장악했다. 권력의 하수인이 된 언론들은 앞다투어 친정부적인 보도들을 쏟아냈다. 이에 반발한 언론인들은 좌천되거나 해고당했다. 표현의 자유는 극도로 억압됐다. G20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벌금형이 선고되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공권력 남용이 심해지더니 결국 총리실에서 민간인을 사찰하는 기가 막힌 일까지 벌어졌다.

이제 정권이 바뀌지만 상황은 그리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인수위원회부터 연일 '불통'을 지적받고 있다. 이명박 정권 언론 정책의 핵심 인물인 MBC 김재철 사장은 배임 혐의에 대해 경찰에서 무혐의로 처리된 반면, 이상호 기자는 끝내 해고됐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당선인 측 관계자는 "그게 당선자랑 무슨 상관이냐"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사람 하나 임명할 때마다 자질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대통령 당선에 혁혁한 공을 세운 복지 공약에 여당 최고위원이 나서서 돌을 던지는 모습은 코미디에 가깝다. 대선 전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당선됐으니 안 지켜도 그만이라는 것인가.

힘들었던 5년이었고 힘들 것 같은 5년이다. 물론 뚜껑은 열어봐야 알겠지만(필자는 진심으로 필자의 예상이 틀리길 바란다) 적어도 지금까지 보인 모습으로는 그렇다. 이럴 때일수록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시민의 참여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자. V는 놀라운 능력으로 정부 기관들을 폭파시키고 악행을 저지른 자들을 암살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은 시민들에게 자신이 쓴 것과 똑같은 가면을 보내는 것이다. 11월 5일(V가 독재의 전당으로 전락한 의사당 폭파일로 정한 날)에 같이 싸워달라고 부탁하면서.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 V의 주장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참여를 통해 정부에게 국민의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고 말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언론이 권력에 장악당하고 자유가 억압되면 사람들은 지치고 겁이 많아진다. 그래서 체제에 순응하고 자구책을 찾는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경쟁은 치열해지고 삶은 피폐해진다. 정신적 가치보단 눈앞의 이익을 좇게 된다. 새누리당이 대선에서 50대 표심을 잡을 수 있었던 키워드가 '집값'이었던 것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살기 좋은 사회'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어렵다.

개개인은 약할지 모르지만 뭉치면 강해진다. '약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약자들의 모임'이 더 힘을 내야 할 시기이다. 시민단체나 노동조합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때다. 국민들은 목소리를 더 내야 한다.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많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기는 길은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정부에 옳은 소리로 비판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못 하는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또 집회에 나가고 하면 힘이 커진다. 작게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된다. 하라고 하면 너무 많다.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관심해지지 않는 것이다. 사는 게 힘들다고, 너무 어렵다고, 혹은 선거에 졌다고 해서 절망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이다.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노력할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발전할 수 있다. 정부가 두려워하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영화 얘기다. V로부터 가면을 받은 시민들은 과연 11월 5일에 거리로 나갔을까? 답은 영화를 통해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태그:#국민, #민주주의, #브이 포 벤데타, #이명박,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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