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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표지
 <족보> 표지
ⓒ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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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농사지으며 목수일 했고
아버지는
농사지으며 미장일 했고
나는 공장 노동자

아내도 공장 나가고
딸도 공장 나가고
아들도 공장 나가고

어쩌다 다 같이 쉬는 일요일
길고 긴 옥상 빨랫줄엔
빛깔 다른 작업복
너울너울 춤을 춥니다.

- <족보> 모두, 20쪽

20대 들머리에 가정을 거느리고 소작농, 탄광 광부 4년을 거쳐 철강공장에서 30년을 넘게 일한 시인 이한걸. 그가 첫 시집 <족보>(푸른사상)를 펴냈다. 이 시집 곳곳에는 한 노동자가 지하 수천 미터 막장에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채탄작업을 하고, 1500도를 훌쩍 넘기는 철강공장에서 쇳물을 마름질하면서 흘린 피눈물이 배어 있다.

제1부 '족보', 제2부 '조립공', 제3부 '연금술사', 제4부 '나는 광부였다'에 모두 69편에 이르는 시편들이 때로는 할아버지 얼굴로, 때로는 아버지 얼굴로, 때로는 나와 아내 얼굴로, 때로는 딸, 아들 얼굴로 겹쳐진다. 시인이 이 시집 제목을 <족보>라 붙인 것은 4대에 걸친 직업이 모두 현장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시인 이한걸은 '시인의 말'에서 "인생이란 참 아이러니하다"며 지난 일을 곰곰이 되짚는다. 그는 "막장이 무너져 탄더미에 깔려 죽고, 쇳물 덮어쓰고 죽어나가는 모습을 수없이 지켜보면서 먹고사는 일이 이처럼 힘들고 위험한 줄 몰랐다"며 "막장에 묻힌 시신 발굴 작업을 하면서, 가장을 잃은 가족의 오열을 보면서, 엄숙히 장례를 치르면서 밑바닥 인생을 제대로 실감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그래도 "밑바닥 인생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는 왜 지옥 같았던 그때 그 처절했던 삶을 다시 끌어안는 것일까. 그 까닭은 "밑바닥에서는 몸부림치듯 바닥을 치고 올라갈 희망이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면 그리 높은 곳은 아니더라도 오를 곳만 남아 있지 않겠는가.

열 곳 넘는 공장을 돌아다니며... "삶은 전쟁만큼 치열했다"


국졸 학력으로 세상은 너무 높아

38세에 독학을 시작했다
초등 4학년 아들 교과서 펼치고
중3 큰딸이 영어 수학 선생이다
밥 먹으면서 화장실 볼일 보면서
잠자는 시간 빼고 책을 들었다
천장크레인 운전실 배전반 뒤 틈새
교재 숨겨놓고 작업 틈틈이
학습에 몰입하는 것이 즐거웠다
행여 정신이 느슨해지면
무학산 오르며 극기 훈련했다
교복 입은 동기생 피해 얼굴 돌렸던
옛날 떠올리며 독을 품었다
- <독학 인생> 몇 토막, 28쪽  

"딴에는 시집이라고 세상에 내놓으려니 쑥스럽다"고 가만 가만 말하는 시인 이한걸. 시인이 겪은 삶은 삶이 아니라 죽음 같은 세월이었다. 20대 들머리에 어쩔 수 없이 가장이 된 시인은 처음 소작농이 되어 뙤약볕을 맞으며 벼 포기에 눈을 찔려가며 죽어라 김을 맸지만 가족들 식의주를 해결할 수 없어 잣대를 내려놓는다.

그 다음으로 간 곳이 탄광이었다. 시인은 "절망의 막장을 파던" 그때 너무 힘에 부쳐 뼈다귀만 앙상해졌다. 진폐증을 앓으면서도 찍 소리 한 마디 않고 열심히 탄을 캤지만 어용노조와 석탄합리화란 괴물(?) 앞에 무릎 꿇고 만다. 그렇게 길바닥에 나앉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살아야 했다. '사는 것이 지옥'이란 것을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그는 오뚝이처럼 일어서서 철강공장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30여 년 쇳물과 씨름하면서 책을 손에 든다. "국졸 학력으로 세상은 너무 높아" 이렇게 나아가면 벼랑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중, 고등학고 검정고시를 거쳐 마침내 방송통신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열 개가 넘는 공장을 돌아다니며 맞벌이를 해온 아내와 함께 산 삶은 전쟁만큼 치열했다"고 말하겠는가.         

그의 삶 앞에서는... 그저 입 꼭 다물고 눈물지을 수밖에

설비자동화 구조조정 공장 해외 이전
공포 분위기로 경쟁력 닦달하여
폭발하지 않을 만큼 압력을 가해야
혀에 착착 감기는 차진 밥이 나오는
압력 밥솥 원리를 이용한다지요
- <자본가들은> 모두, 73쪽 

시인 이한걸이 온몸으로 쓴 시를 읽다보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글쓴이도 새파랗게 젊은 날 창원공단에서 8년 동안 현장 노동자로 일했지만 시인처럼 힘들게 살지는 않았다. 글쓴이도 그 공장에서 7~8번씩이나 부서이동을 하며 온갖 일을 다 겪었지만 국졸 학력을 가진 이한걸 시인이 겪었던 불꽃 튀는 노동전쟁은 아니었다.

글쓴이는 그나마 공고를 마친 데다 기능사 자격증도 있었다. "삐끗 하면 저승으로 추락하는 고공직업"(<천장크레인 운전공>)도 아니었다. 낡은 기계였지만 그나마 안전장치가 되어 있는 기계 앞에서 삐끗 해도 손가락 한 마디 잘리는 정도였다. 공장이 다른 대기업으로 넘어갔을 때도 "공장을 인수하며 400명 자른 기업"도 아니었고, "그들은 점령군"(<담금질>)도 아니었다.

"아들딸 유치원 고액 과외비/ 미래의 대학등록금에 팔려온 여인은/ 애초부터 헤픈 여자가 아니었다"(<노래방>)는 그런 여자도 쉬이 찾기 힘들었다. "이제 지긋지긋한 공장생활은 안 할 거야"라며 "외손자 둘 키우며 할머니로 살던 아내"도 없었고, 그 아내가 "10년 만에 다시 얻은 직업은 청소부"도 아니었다.

"나는 살아야 해, 살려줘/ 탄이 쏟아지고 있어 어떡할 수 없어요/ 이 도끼로 무릎을 잘라주게"(<결국은>)라고 애걸하던 선산부 박용택 같은 이는 아예 없었다. 그런 일 또한 겪어보지도 못했다. 사지는 멀쩡한 중증 장애인도 되지 않았고, "호흡기 장애3급 국내선 항공기 KTX 무궁화 새마을호 동행하는 보호자 1인까지 50%할인 받는 복지카드" 같은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시인 이한걸이 알몸으로 겪었던 이처럼 처절했던 노동전쟁에 비하면 글쓴이가 겪은 노동현장은 그야말로 완전무장을 한 '노동국지전' 같은 것이었다. 그랬으니 노동으로 똘똘 뭉친용광로 같은 노동자 이한걸 앞에서 감히 용접봉 같은 노동자가 어찌 명함을 내밀 수 있으랴. 그저 입을 꼭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며 눈물지을 수밖에.    

자본가들에 '급전'으로 보내는 현장보고서

죽음을 넘나드는 치열했던 채탄 작업
석탄산업 합리화로 뿔뿔이 흩어져
가슴에 묻어둔 그리움 너무 많다
낡은 사택 어용노조 사북사태 술집
진폐 전문요양병원 아니면
어디에서 속 시원히 말할 수 있을까
전직광부는 빼앗긴 열정 어쩌지 못해
추억의 막장 파고 또 판다
- <진폐 정밀검진을 받으며 2> 몇 토막, 106쪽 

그래. 이건 시가 아니라 몸부림 그 자체다. 아무리 참고 견디려 해도 저절로 몸이 배배 꼬이는 괴로움 말이다. 잘못한 게 있다면 먹고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다. 저들은 진폐증을 앓으면서도 석탄을 금싸라기처럼 파냈던 노동자를 왜 어용노조와 석탄산업 합리화란 이름을 내세워 거리에 내팽개치는가. 오죽 답답했으면 "추억의 막장 파고" 또 파고 있을까.    

시인 이한걸 첫 시집 <족보>는 조상 대대로 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한 노동자가 그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는 자본가들에 급전으로 보내는 현장보고서다. 시인은 이 현장보고서를 통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노동으로 식의주를 꾸리다 어떻게 막장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 막장에 떨어진 사람들이 왜 악을 쓰며 자본가들에게 맞서는지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시인 이한걸은
1950년 강릉에서 가난한 농부 아들로 태어나 1995년 근로자문학상 시 부문과 1998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수필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35년을 넘게 현장노동자로 일했던 그는 특근과 잔업에 지친 몸으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를 거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마쳤다. 지금은 노동자 시 동인 '객토'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경남작가회의 지회장을 맡고 있다.(시집 저자소개 인용)

덧붙이는 글 | [문학in]에도 보냅니다



족보 - 이한걸 시집

이한걸 지음, 푸른사상(2012)


태그:#시인 이한걸,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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