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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파도를 받아 앞뒤와 좌우로 요동치는 요트에서 몸을 가누기란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 세일링 바람과 파도를 받아 앞뒤와 좌우로 요동치는 요트에서 몸을 가누기란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 정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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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있고 시간만 있으면 외국으로 여행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 돼 버린 지금이다. 설이나 추석 연휴를 이용하여 온 가족이 공항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은 일상이 된 것처럼. 이처럼 해외여행을 이웃집 드나들듯 자유롭다. 하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여행자유화가 되었겠느냐고 의문을 가지는 이는 별로 없는 것만 같다.

밀항선을 타지 않고서는 외국으로 갈 수 없었던 시절, 해외여행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여권은 '특별한 신분'을 상징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렇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여권은 'VIP' 대접을 받은 게 사실이었다. '관광목적 여권 발급'이 최초로 시행된 것은 1983년. 이후, 해외여행자유화는 1989년 1월 1일 전면 시행되고 나서 꼭 24년이 되는 셈이다.

'나의 황당 해외 여행기'를 쓰면서 서두가 길어진 이유 하나는 해외여행을 언제부터 이처럼 자유롭게 하게 되었나 싶어서였다. 해외여행이라면 여객기와 여객선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나의 황당 여행기는 여객기도, 여객선도, 아닌 '요트'라는 것. 요트를 이용한 해외여행도 출입국 신고부터 세관검사까지 일반 해외여행과 똑같다.

세일링은 바람과 파도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최고의 스포츠라 할 수 있다.
▲ 세일링 세일링은 바람과 파도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최고의 스포츠라 할 수 있다.
ⓒ 정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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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차게 부는 바람에 흰 거품을 이는 파도가 넘실거리는 망망대해. 돛 하나에 작은 동력으로 움직이는, 일행 7명을 태운, 길이 40피트(12.19m) 크루즈. 푸르다 못해 검붉은 색을 칠한 듯한, 바다에 뜬 요트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종이 조각배보다 더 위태롭다. 이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가슴을 졸이게 하지 않을까?

2011년 3월 4일 밤 11시. 오래전부터 계획돼 왔던 '거제도~대마도(일본명, 쓰시마 섬)' 2박 3일 요트여행은 칠흑 같은 밤으로부터 시작됐다. 묵직한 발걸음 소리는 바다를 깨웠다. 소리에 놀란 파도는 몸을 일으켜 흰 거품을 내며 물결을 인다. 일행 15명이 요트 2척에 타고 떠날 거제 지세포항은 다이아몬드 빛을 발하는 별 금성 아래에 잠들어 있다.

대한민국과 일본 본토 중간에 있는 대마도는 대한민국 땅에서는 지세포항이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직선거리로 약 31마일(50km) 정도. 목적지는 '이즈하라' 항구로 실제 항해 거리는 약 2배 정도인 100km의 거리다. 운항예상 시간은 약 9시간으로, 요트인으로서 바다를 탐험해 볼 만한 코스다.

항해에서 선장 명령은 절대적

요트는 바람과 파도와 싸우면서 망망대해를 탐험하는 최고의 스포츠다.
▲ 요트 요트는 바람과 파도와 싸우면서 망망대해를 탐험하는 최고의 스포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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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을 켜자 기계 소리가 적막감을 깬다. GPS를 켜고 각종 계기를 점검하고는 바로 출항이다. 항을 벗어나자 지세포항 불빛은 눈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다. 호수같이 잔잔했던 항내 와는 달리 파도가 뱃전을 때린다. 피칭(배가 앞뒤로 흔들리는 일)과 롤링(배가 좌우로 흔들리는 일)을 반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계기판을 확인하니 수심 80m 내외, 속도는 6노트로 순항하고 있다. 나를 포함한 일행 7명이 탄 '블루시티'호와 동행한 '코엔스블루(8명 탑승)'는 같이 출발했지만, 깜깜한 시야로 앞서 가는지, 뒤따라오는지 흔적도 알 수가 없다.

거제도~대마도 세일링에 동행한 코엔스블루호.
▲ 세일링 거제도~대마도 세일링에 동행한 코엔스블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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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밤, 스키퍼(요트에 있어 선장)와 두 명의 보조 승무원만 항해를 책임지고 있다. 나머지는 선실에서 대기 상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은 진행형이다. 잠시 밖으로 나와 스키퍼와 승무원과 대화를 나누며 지루함을 달래 본다. 봄으로 접어든 3월이라지만 밤바다 찬바람이 얼굴을 세차게 때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같은 어둠, 출렁이는 물결에 좌우상하로 움직이는 요트, 어둠과 바다가 주는 공포감은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

막연한 기다림은 시간을 뒤로 내쫓는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시계를 보지 않으면 느낌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 신호가 느껴진다. 배의 속도가 떨어진다는 것을 감지한 것은 출항한 지 5시간이 지날 무렵이다. 6노트에서 4노트로 급격히 떨어지는 속도. 엔진과 각종 계기판을 점검하고 요트 전체에 이상 유무를 점검했지만, 원인을 알기에는 역부족이다. 깜깜한 상황에서 현 상황대로 운항할 수밖에 없었고, 동행한 요트와 연락도 되지 않아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

요트 항해중 선상에서 보는 대마도(쓰시마) 일출이 장엄하다.
▲ 대마도일출 요트 항해중 선상에서 보는 대마도(쓰시마) 일출이 장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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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동이 틀 무렵 원인을 알았다. 스크루에 해초가 감겨 프로펠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속도를 내지 못한 것. 요트를 세웠다. 노련한 스키퍼는 차가운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닷물 속에서 30여 분의 해초 제거작업으로 다시 출발할 즈음, 스키퍼의 얼굴이 검붉다. 항해에서 스키퍼의 의사결정과 명령은 절대적이다. 선장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여명이 인다. 남북 80km, 동서의 폭이 넓은 곳이 약 18km인 대마도 위로 붉은 기운이 솟는다. 바다 수면에서 보는 일출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출항할 땐 야간이라 엔진을 이용했지만, 날이 밝자 메인세일을 폈다. 이어 헤드세일도 올리자 바람을 받은 요트는 엔진과 함께 탄력을 받는다. 속도는 두 배로 빠르다.

거제도~대마도 요트횡단을 축하해 주러 마중 나온 대마도협회 소속 요트.
▲ 세일링 거제도~대마도 요트횡단을 축하해 주러 마중 나온 대마도협회 소속 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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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출항한 지 10시간째. 대마도 중앙부 섬 끄트머리가 보인다. 대마도는 상하 두 개의 큰 섬을 이루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앞쪽 멀리서 하얀 요트 한 척이 달려온다. 대마도요트협회 소속 회원이 마중을 나온 것. 서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고 일행을 선도하고 있다. 하나의 섬을 두 개의 섬으로 잘린 허리 부분인 만제키세토라는 협곡에 이르자 물살이 거세다. 물살에 떠밀려 내려다가다시피 하는 요트. 바다 물살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다.

세일링은 역시 바람이 불어야 제맛

인공적으로 만든 만제키세토 수로. 물살이 거세다.
▲ 만제키세토 협곡 인공적으로 만든 만제키세토 수로. 물살이 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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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트는 수로와 항구를 지나 아소만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다시 망망대해다. 세찬 바닷바람이 마스트를 때린다. 역시 세일링은 바람이 불어야 제맛이 드는 법. 엔진 시동을 껐다. 줄을 감고 잡아당기면서 손놀림은 빨라졌고, 몸은 재빠르게 움직인다. 선수는 치켜들고 선미는 반대로 가라앉으며, 요트는 좌우 요동을 반복한다. 좌현이 바닷물에 잠길 기세다. 돛은 팽팽히 댕긴 모양으로 바람을 가득 안은 상태다.

강한 바람이 불자 긴박한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데크에서 몸을 가누기가 어렵기에 선상 이동은 조심스럽다. 동행하는 코엔스블루는 연신 하얀 거품을 만들어 내뱉고 있다. 검푸른 바다에서 거친 파도와 거센 바람과 한 판 싸움을 벌이는 드라마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거제도~대마도 대한해협 첫 횡단 영화 한 편을 찍고 있다는 착각이 인다. 그런데 몸을 지탱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생동감 넘치는 사진을 찍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마도 이즈하라항구 주변 마을 모습.
▲ 이즈하라항 대마도 이즈하라항구 주변 마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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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시간도 끝이 보인다. 항구 방파제 끄트머리에 붉은 등대가 보였기 때문이다. 거제도 지세포항을 출항, 목적지인 이즈하라 항구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13시간 25분. 정장차림의 근무복을 입은 사람이 요트에 올랐다. 출입심사와 세관검사를 할 모양이다. 여권을 준비하고 차례를 기다렸지만, 검사를 할 요량이 아니다. 1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 이번에는 해경 10여 명이 함께 나타났다. 그때야 '아이고, 무슨 일이 벌어졌구나!'하는 느낌이 직감적으로 인다.

이즈하라항구에 도착하고 나서 세관검사와 출입국신고를 마치는데 4시간이 넘게 걸렸다.
▲ 세관검사 이즈하라항구에 도착하고 나서 세관검사와 출입국신고를 마치는데 4시간이 넘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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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트에 마약을 실은 것도 아니고, 무기를 실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각자 여권이 없어 밀항객으로 취급받을 일도 없었다. 또 다시 흐르는 긴 시간. 겨우 출입국신고서를 작성하고 모든 검사를 마칠 수 있었다. 항구에 도착하고 4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에야 자유의 몸이 되었다. 왜 이렇게 입항신고가 늦어졌는지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초 입항을 계획한 시간보다 일찍 항구에 도착했기 때문이란다.

어둠이 내려앉은 이즈하라항 거리에는 한국인 여행객만 오갈 뿐이다.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거제도 지세포항을 떠난 지 꼭 20시간째. 1인용 침실에 눕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천장이 빙빙 돌고, 건물 벽이 심하게 흔들리는 느낌이다. 혹여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나 싶어 밖으로 나와 살펴보니 지진은 아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육상멀미라고 한다.

3월 6일 아침 6시 30분. 7시까지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대기하라는 전날 협의 때문에 피로를 채 풀기도 전에 짐을 싸야만 했다. 항구의 날씨는 겨울 날씨보다 더 차갑다. 차가운 기온을 얼굴에 맞대고 기다린 것도, 1시간을 넘기고 있다. 전날 항구에 도착해서도 그렇고, 출발하는 시간에도 애를 먹이는 관계 공무원이 얄밉기만 하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이즈하라 항의 아침 모습이다. 출발하는 당일도 2시간을 넘어서야 여권에 출항 승인 스탬프를 찍을 수 있었다.

바람, 파도, 바다 그리고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 요트여행

거제도로 돌아오는 항해. 또다시 바람과 바다와의 싸움이 시작됐다. 그리고 긴 시간이 흘렀다. 지루함도 같이 흘렀다. 바닷길 길잡이 역할을 하는 지세포항 방파제에 선 등대가 일행을 맞이한다. 엊그제, 칠흑 같은 밤 우리 일행을 보냈던 그 지세포항은 아무것도 변한 것 없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거제도~대마도 요트횡단에 나선 '블루시티'호가 만제키세토 수로를 지나고 있다.
▲ 세일링 거제도~대마도 요트횡단에 나선 '블루시티'호가 만제키세토 수로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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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트는 지세포항에 정박했다. 돛을 내리고, 엔진 시동도 껐다. 짐을 챙기고 입항신고 절차도 모두 마쳤다. 불편했던 대마도 이즈하라항 입항 수속과는 큰 차이가 났다. 역시 안방이 제일 편하다는 생각이다. 아침 9시 대마도 이즈하라 항에서 출발하여 거제도 지세포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반. 8시간 반이 걸린 셈이다. 출발에서 도착까지 정리하면, 거제도에서 대마도를 갈 때 13시간 반, 대마도에서 거제도를 올 때 8시간 반, 전체 22시간이 걸린 왕복 세일링이었다. 출입항 절차만 밟는 데만 별도로 6시간이 걸렸다. 이로써 거제도~대마도 대한해협 첫 요트 세일링 횡단 기록을 세운 것이다.

지난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미야기현 도호쿠 지방에서 규모 9.0의 강진과 쓰나미가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있었으며, 이웃 나라인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인에게 큰 아픔을 남겼다.

거제도~대마도 대한해협 요트횡단은 3월 4일 밤 거제도를 출발하여, 3월 6일 귀항했다. 정확히 지진 발생 1주일 전 항해였던 셈이다. 일본 쓰나미로 지인들은 농담 삼아 못 볼 뻔했다는 말을 하지만 성난 파도 앞에 당할 자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거제도~대마도(쓰시마) 요트여행. 외국여행에 있어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필수라는 것을 새삼 느끼는 세일링이었다. 멋진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해야 할까?

덧붙이는 글 | '나의 황당 해외여행기' 응모 글입니다.



태그:#세일링, #블루시티, #쓰시마, #거제도, #지세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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