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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표창원 교수가 22일 오후 광주를 방문 3000명이 넘는 시민들과 프리 허그를 했다.
 표창원 교수가 22일 오후 광주를 방문 3000명이 넘는 시민들과 프리 허그를 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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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오후 4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광주 충장로가 인파로 가득 찼다. 10대 청소년부터 칠순 노인까지 세대도 다양했다. 얼추 3000명이 넘게 모였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인 이유는 단 하나, 표창원 경찰대 교수와 프리 허그를 하기 위해서였다.

표 교수는 광주에서 그리 유명한 이가 아니다. 그런데도 대선 후보였던 안철수 교수나 문재인 후보의 광주 유세 때보다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은 더 많았다. 왜 그랬을까. 표 교수가 광주를 찾아 프리 허그를 하겠다고 한 까닭에 그 답이 있다.

표 교수는 "전국 최고의 투표율(80.4%)을 보인 광주가 이번 선거의 유일한 승자"라며 "광주와 광주 시민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러 왔다"고 했다. 그는 또 "제가 안아드리려고 온 게 아니라 제가 안기려고 온 것"이라며 "저도 마음이 아프고 상실감이 크고, 기댈 데가 필요했는데 저보다 더 가슴이 아플 광주 시민들이 경상도 사람인 저를 반겨 주셔서 많이 치유가 됐다"고 말했다.

투표율 1위를 해 상을 받아도 시원찮을 동네가 위로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낙선한 후보인 문재인 후보에게 92% 몰표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젠 '대통령 당선인'이 된 박근혜 후보는 광주에서 7.8%를 얻었다.

투표결과 지도에서 다시 '섬'으로 남은 호남

공중파 방송이 그린 후보별 득표율 지도에서 다시 광주를 비롯한 호남은 섬으로 남았다. 투표결과 지도를 보면서 광주 사람들은 기괴한 침묵에 빠졌다. 직장에서, 술집에서 흔한 패인 논쟁 하나 일지 않았다. 서로가 이심전심으로 침묵을 강제하는 해괴한 정서 붕괴의 상태가 아직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경상도 출신 한 보수 인사가 "광주가 자랑스럽다"고 대놓고 말한다. 92% '몰빵'을 받은 이도 찾지 않는데 아무 상관없는 인사가 와서 "안아주겠다"고까지 한다. 서로 말도 못하고, 전라도 경계 밖으론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다시 주눅 들어 있는데 말이다.

표 교수와 프리 허그를 하겠다고 늘어선 줄이 300m가 넘었다. 시린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한번 안아보겠다고 길게 늘어선 줄, 그것은 다시 고립된 광주를 상징했다. 그래서 슬픈 줄이고 한 서린 줄이며 동시에 다시 일어서는 무등(無等)의 줄이다.

광주이야기를 더 하기 전에 이번 대선의 승패를 가른 것이 무엇이었는지 따지고 가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 광주를 위한 힐링을 그리고 광주 스스로의 힐링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번 대선 승패를 가른 요인을 세대별 대결에서 찾는다. 즉 2030세대와 5060세대의 대결에서 5060세대가 이겼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경상도 패권주의가 표류하는 충청민심을 얻어 호남을 고립시키며 승리했다는 지역대결론을 펼치기도 한다. 지역에서 이긴 승자독식의 그림에서는 그럴듯한 논리다.

그렇지만 난 이번 대선에서도 '욕망'이 승패를 갈랐다고 본다. 안정된 일자리를 갖고 편하게 먹고살고 싶다는 욕망, 보다 큰 집에서 안온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 이러저런 잔걱정 없이 속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

고백컨대 교만하게도 나는 이번 대선에선 '욕망의 자기증식'보다는 '욕망의 해체'에 기초한 투표행태가 이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욕망의 기대치는 '뉴타운 버블'처럼 사라져버려 유권자들은 '심판'의 투표행태를 보일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투표결과가 굳어가던 19일 밤 나는 "유권자들은 '욕망의 해체'보다는 '욕망을 실현시켜줄 대체재'를 더 원했다"는 글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갑갑할 정도로 가치를 더 따지는 문재인 후보보다 '다시 잘 살게 해주겠다'는 박근혜 후보가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 줄 MB의 대체재로 더 적합하다고 유권자들은 판단한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은 또 '욕망에 기초한 선택'은 그릇된 것인가. 근대성에 기초한 근대의 진화는 욕망과 그 통제의 진화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쉽게 얘기하면 '잘 살자 그러나 함께 잘 살자'는 문장이 19세기 후반 그리고 20세기, 21세기 초입인 지금까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보'로 통칭되는 세력들은 '잘 사는 문제'보다는 '가치 있는 삶'에 더 천착한다. 이미 유권자들은 민주주의가 밥이 되는, 평화가 돈이 되는 실사구시를 원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진보'는 '민주주의' 혹은 '평화'라는 가치개념에 편향돼 '욕망' 자체를 폄훼시켜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받는다.

욕망에 대적하는 이 가치 우선의 법칙은 늘 상징체계를 만든다. 그것이 현실정치로 들어오면 '민주성지' '민주당의 심장' '진보정당의 뿌리' 같은 슬로건으로 구체화된다. 그렇다, 광주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광주에겐 거세당한 욕망의 부활과 생성이 절실하다

무등산 설경. 무등(無等)은 구별과 등급이 없다는 뜻도 있지만 “다만 같음이 없다”는 뜻도 있다.
 무등산 설경. 무등(無等)은 구별과 등급이 없다는 뜻도 있지만 “다만 같음이 없다”는 뜻도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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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오월 이후 광주는 욕망의 도시가 되어선 안 되는 암묵적 강제를 받아왔다. '민주성지' '평화인권 도시' 따위의 슬로건은 광주의 저항이 '파괴된 일상'과 '억압받은 욕망'에 대한 분노였다는 것을 간과하게 만들었다.

광주에 대한 기득권을 쥐고 있는 세력은 다름 아닌 광주를 슬로건 속에 박제시킨 세력들이다. 이들은 그 슬로건 실행의 개념으로 '광주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나를 포함한 아둔한 지식인들은 그 용어가 전제하는 치명적 덫을 옳게 분별해내지 못했다.

'광주의 전략적 선택'이란 용어엔 이미 욕망 배제, 가치 우선의 선택이 강제되어 있다. 거칠게 얘기해서 자신들은 줄곧 욕망의 선택을 해왔으면서 광주에게는 늘 가치 우선의 선택을 강요해온 것이다. 그리고 나 같은 언론인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그 강제에 부역했다. 광주가 욕망을 거세당한 죽은 도시가 되는 데 부역한 것이다. 부끄럽고, 죄스럽다.

광주의 선택엔 죽임 당함을 겪은 한 사회 집단의 트라우마가 숨어있다. 더 이상 죽임 당하고 싶지 않아서, 더 이상 고립당하고 싶지 않아서 선택해야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 내재돼 있는 것이다. 광주에 아직 거세당하고 있지 않은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두 번 다시 학살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설마? 그렇다!

대통령 선거 당선인이 확정된 20일 오전. <바위섬>과 <직녀에게>로 유명한 가수 김원중씨는 허탈하고 쓸쓸한 마음에 광주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고. 근데 사람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선거 관련 얘기는 한 마디도 않더란다. 그 기괴한 침묵이 너무 서러워 울컥 눈물이 솟았지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커피숍에서 몇몇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난 밤 찬바람에 꽃잎 다 떨어졌겠다. 모양만 따스한 햇살에 모두 말이 없는 아침. 흩어진 꽃잎이 내 뺨을 때린다. 나 달게 맞겠다. 울지 마라, 광주!"

울지 마라, 광주! 어쩌면 광주를 사는 사람들이 또 광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금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그렇게 염려하고 다독이는 것이 광주를 위한 힐링의 그리고 광주 스스로의 힐링의 첫걸음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우선 해체가 필요하지 않을까. '전략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해체시키지 않고서는 광주는, 순정한 '몰빵'을 하고도 두려움과 슬픔에 온몸이 우는 서러움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전략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해체시키다보면 그 용어와 함께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과 그 부역자들도 진솔한 자기해체를 요구받을 것이다.

기득권은 주류만 누리는 호사가 아니다. 오히려 비주류의 주류, 변방의 주류가 누리는 기득권은 가히 특권적이다. 이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 숱한 꼼수가 동원됐고, 조직이 관리됐으며, 이권이 거래됐다. 해체시켜야 한다, 이제 그래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생성이 필요하겠다. 특히 광주에겐 거세당한 욕망의 부활과 생성이 절실하다. 이는 광주의 욕망을 거세시킴으로써 이득을 보아왔던 세력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욕망이 죽은 도시를 살아있는 도시라 할 수 있는가. 욕망이 숨죽이는 도시를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라 할 수 있는가.

매우 오래되어서 새로운, 문화예술의 욕망을 되살리는 일이 시급하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창의적 욕망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광주의 미래는 없다. 그들이 실컷 놀 수 있는 공간과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어린이들, 십대들, 이십대들이 뛰놀지 않는 도시는 죽은 도시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적 욕망을 생성하는 것도 필요하다. 세력 중심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의 연대를 중심으로 정치적 욕망을 확장시켜야 한다. 누구로부터 '전략적 선택'을 강제 받지 않는 광주 스스로의 정치적 욕망을 키울 때다.

광주엔 무등산이 있다. 무등(無等)은 구별과 등급이 없다는 뜻도 있지만 "다만 같음이 없다"는 뜻도 있다. 그렇게 서로 다른 꿈을 키우고 나누는 '무등 광주'를 오지게 사랑하련다.


태그:#표창원, #힐링,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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