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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딸(strongman's daughter)'이 대통령 당선자가 된 그제, 그리고 어제와 오늘까지 아침을 캄캄한 밤처럼 맞았습니다. 오늘 아침엔 일어나서 애꿎은 아이들에게 투정을 부렸습니다. 심한 몸살로 어제부터 수액을 맞고 새벽에도 해열제를 몇 번이나 먹은 첫째 딸, 그리고 제 누이가 자신을 놀린다며 하소연하는 둘째 아들에게 격하게 짜증을 냈지요. 그렇게 화를 내고 있는 나 자신을 문득 보고 있자니 무서웠습니다.

어젠 인근 몇몇 학교의 친한 선생님들 몇 분과 함께 송년의 밤을 가졌습니다. 교원 노조 활동에 나름대로 열성적인 분들이었죠. 우린 마시고 죽자며 밤새 술을 퍼마셨습니다. 5년 간 우리의 대통령이 된 바로 '그 딸' 때문에, 그리고 못난 우리 자신과 이 알 수 없는 세상 때문에!

앞으로 우리 같은 전교조 활동가 교사들이 더 많이 해직되고 감옥살이 많이 하도록 투쟁 의지를 살려줬으니 그녀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모두들 혀 풀린 소리로 낄낄거리기도 했죠.

얼마 전, 슬라보예 지젝의 책에서 만난 예이츠의 시구가 불길한 예언의 묵시록이 될 것 같은 예감을 가졌었지요.

"가장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반면에 가장 악한 자들은 격정에 차 있다." - 예이츠, <재림(再臨)>에서

우리는 그저 무력과 냉소와 불신의 벽에 갇혀 어떻게든 세상은 바뀌겠지 하며 안이하게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지난 4.11 총선을 맞으면서 새누리당이 보여준 놀라운 변신이 무서웠습니다. 그들은 빨간색을 싫어했습니다. 아니 저주했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 빨간색을 자당의 로고 바탕색으로 썼습니다. 목두리와 점퍼에도 칠했습니다. 그 빨간색은 선거 기간 내내 유세 현장에서 태극기와 어우러지면서 아주 강렬한 인상을 자아냈습니다. 스스로를 정의의 사도이자 선인으로 생각하는 그들에게서 격정이 느껴졌죠. 그래서 자주는 아니었지만, 아주 가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될 수도 있겠다.'

일부러 외면하듯, 무서워서 회피하듯 떠올린 그 생각은 그러나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죠.

하지만 아침이 오지 않을 만큼 긴 밤은 없는 법! 북구의 매력적인 땅 핀란드에 전해진다는 이 멋진 속담을 앞으로 몇 년 간 내 일상의 경구로 삼아야겠어요. 근대 중국의 문호 노신이 말했죠. 원래부터 길은 없었다고. 그저 아무도 가지 않던 땅을 한 사람, 두 사람 걷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길이 만들어진다고. 그렇게 길을 만들어간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처럼 저도 희망의 행진에 동참해 봅니다.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룬 채 인터넷을 배회하다가 공정방송협동조합에 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당장 '뉴스타파(www.newstapa.com)'에 정기 후원 신청을 했습니다.(https://mrmweb.hsit.co.kr/Member/MemberJoin.aspx) 오늘 아침에는 공정 방송 설립과 관련된 언소주의 설문 폼에 한참 시간을 내어 글을 올렸지요.(http://cafe.daum.net/stopcjd/6hlq/307) 시민의 방송국 설립이 가시화하면 기금 모금이나 조합원 모집에 아내와 세 아이와 함께 적극적으로 동참할 생각입니다. 결혼 십 주년 기념 가족 여행을 위해 몰래 챙겨 두고 있는 비자금도 그때 아낌 없이 쏟아부을 생각이에요.

해밑은 다가오는데, 여러분, 친한 이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소주 한 잔 할 수 있을까요? 힘들더라도 기운 잃지 마세요. 그렇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앞으로는 엄청난 일들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소주 한 잔 입에 털어넣어 보세요. 그러면 기운이 날 겁니다. 그렇게 함께 할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요.


태그:#국민방송 설립, #독재자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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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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