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6년>에서 초반 5.18 광주민주화운동 장면은 7분 40초 분량의 애니메이션으로 전개된다. 이 삽입 애니메이션은 장편 <마당을 나온 암탉>을 만들어낸 오성윤 감독과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오돌또기의 작품이다.

영화 <26년>에서 초반 5.18 광주민주화운동 장면은 7분 40초 분량의 애니메이션으로 전개된다. 이 삽입 애니메이션은 장편 <마당을 나온 암탉>을 만들어낸 오성윤 감독과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오돌또기의 작품이다. ⓒ 오돌또기


영화 <26년>의 관객들은 뜻밖의 시작을 맞닥뜨린다. 애니메이션이다. '상영관을 잘못 찾은 게 아닌가' 싶을 무렵, 창문을 깨부수고 들어온 총탄이 아이를 업은 여자의 머리를 관통한다. 1980년 5월 18일, '그날'이다.

<26년>은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26년 뒤, 희생자 유족들이 학살의 주범인 '그 사람'의 단죄를 위한 작전을 펼치는 영화다. 애니메이션은 7분 40초 동안 5.18이라는 사건을 설명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다. 그림으로 그린 피가 얼마나 그날의 비극을 담을 수 있을 것인지 의문스럽다면 잘못 짚었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뚫린 배가 쏟아내는 시뻘건 창자를 부여잡고 고꾸라지면서도 동생에게 가라고 손짓하는 누이에게서는 강풀 원작의 웹툰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도의 처참함이 흘러내린다.

이 애니메이션은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한국 애니메이션 흥행의 역사를 새로 쓴 오성윤 감독과 오돌또기 스태프들의 작품이다. 오 감독은 이미 16년 전에 5.18을 다룬 영화 <꽃잎>에서도 삽입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경험이 있었다. 당시 퀄리티 문제로 전남도청 앞 진압 장면이 잘려 나갔던 아픈 기억을 소환한 이번 작업은 꼬박 6개월간 오롯이 신경을 쏟도록 만들었다.

7년이 걸렸던 장편 <마당을 나온 암탉> 이후 제안 받은 <26년>의 삽입 애니메이션은 호흡이 짧은 만큼 집중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오성윤 감독은 "<마당> 때는 영화 전체를 감독해야했던 것에 비해, 이번에는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오성윤 감독은 영화 <꽃잎>(1996)의 삽입 애니메이션을 맡아 작업한 경험이 있다. 오 감독은 "당시 전남도청 장면이 편집에서 잘려 나갔기 때문에 이번에도 전남도청 앞 군중신을 만들 때 긴장됐다"고 전했다.

오성윤 감독은 영화 <꽃잎>(1996)의 삽입 애니메이션을 맡아 작업한 경험이 있다. 오 감독은 "당시 전남도청 장면이 편집에서 잘려 나갔기 때문에 이번에도 전남도청 앞 군중신을 만들 때 긴장됐다"고 전했다. ⓒ 오돌또기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비극 극대화

- 5.18 당시를 그리는 건 정말 중요한 임무가 아니었나.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광주민주화운동의 비상식적인 비극을 초반에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분산된 캐릭터들의 에피소드를 한 방에 몰아서 보여주지만 각각이 인상적이어야 했다. (5.18 당시 가족을 잃은) 아이들의 어릴 적 트라우마를 관객들도 느낄 정도의 임팩트가 있어야 영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 일반적으로 그림이 덜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사보다 더하더라. 원작 웹툰의 내용을 수정하면서까지 훨씬 강도 높게 그린 이유가 있나?
"애초 애니메이션의 역할이 잔인성을 더는 게 아니었다. 최대한 조근현 감독이 각색한 시나리오를 그대로 따랐는데, 임팩트 있게 그려져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아마 이렇게까지 잔혹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기왕에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건데, 관객들이 왜 굳이 그림이어야 하는지의 당위를 느끼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잔혹함을 극대화시켰다. 

그림은 가상이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느낄 수 있는데, 그게 실제 있었던 일임을 알았을 때 당혹감을 배가시키는 효과가 있다. (레바논 전쟁 당시 이스라엘 병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이 그렇다. 애니메이션으로 쭉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사건 당시) 실사가 등장했을 때, 지금까지 내가 본 것이 실화였다는 사실이 크게 느껴지는 일종의 반전 효과다."

- 감독님은 5.18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82학번인데, 사건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대학교 들어가고 나서야 5.18 관련 책자들을 접할 수 있었다. 사실 그때 본 사진집이 더 잔혹하더라. 얼굴과 가슴이 뭉개진 시신들. 나에겐 그 사진과 1980년대가 '악몽'처럼 남아 있다. 대학 때 데모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30대까지만 해도 전경들에게 쫓기고 붙잡히는 악몽을 꿨다. 아마 운동권 핵심이 아니어서 더 그런 꿈에 시달렸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작업도 그런 느낌을 담고 있어야 했다. 현재를 살고 있는 미진(한혜진 분)이나 진배(진구 분), 정혁이(임슬옹 분)에게는 당시가 악몽일 테니까."

 영화 <26년>에서 곽진배(진구 분)의 어머니가 시신 더미에서 남편을 찾아내고 오열하는 장면.

영화 <26년>에서 곽진배(진구 분)의 어머니가 시신 더미에서 남편을 찾아내고 오열하는 장면. ⓒ 오돌또기


"딸 등록금 투자, 잘 될 거라는 확신 있었기 때문"

- 악몽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서 목탄을 사용한 건가? 마이클 두덕 드 비트의 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에서의 목탄은 굉장히 따뜻한 질감이었는데, <26년> 애니메이션에서는 전혀 다른 느낌이더라.
"지워질 수 없는 악몽의 느낌이어야 했다. <26년> 참여를 제안 받았을 때 케테 콜비츠라는 독일의 민중 화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주로 가난한 노동자의 고통을 힘 있고 거친 목탄의 질감으로 표현했다. 그렇게 가야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노가다'를 각오해야 했다. 수작업으로 한장 한장 목탄칠을 해야 했으니까. 디지털로 얼마든지 편하고 빠르게 작업할 수 있었다. 과거로부터 아날로그 방식을 끌어온 건 그만큼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그림과 달리 독특해야 했기 때문이다."

- 로토스코핑 기법을 쓴 건 사실성을 위한 선택이었나?
"그림이라 사실성을 담보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고민이 있었다. 배우들은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아니니까. 동작이나 표정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여야 해서 로토스코핑(실제 촬영한 영상을 바탕으로 각 프레임 위에 덧그리는 기법)을 택했다. 청어람의 100여 명의 스태프들과 이틀 동안 촬영을 하고, 편집을 완벽히 마친 후에 애니메이션 작업에 들어갔다. 그대로 따라 그린 게 아니라 움직임을 참고하는 정도에서 인물의 성격에 맞게 디자인한 캐릭터를 새로 그려 넣었다."

- 투자 개념으로 <26년>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고 하던데.
"제작비는 받았다. 다만 전체 제작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일단 실비 수준으로 받고, 나머지는 손익분기점을 넘긴 후에 러닝 개런티를 받기로 했다. 딸아이가 대학교 3학년인데, 내년 등록금 1000만원을 빼서 따로 투자도 했다. 그래서 엔딩 크레디트에는 중요투자자 '지은이아빠'로 올라가 있다. 어차피 딸을 위해 써야 했던 돈이니까. 안 되면 휴학할 수밖에. 딸 등록금을 투자할 만큼, 내겐 <26년>이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는 얘기다." 

26년 오성윤 마당을 나온 암탉 오돌또기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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