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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육영수가 처음 만난 것은 한국전쟁 와중이었다. 1950년 8월, 당시 중령이었던 박정희의 나이 서른 넷. 스물 여섯 육영수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정희를 택한다. 중공군이 평양을 점령한 지 일주일 뒤, 1950년 12월 12일 두 사람은 대구 계산동 천주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문재인의 부모가 '흥남 철수' 피난 대열에 몸을 실었던 것도 그 때였다. 그들은 "어디 가나 하얀 눈 천지"였던 고향 흥남을 떠나 "온통 초록빛인" 경남 거제도에서 '칼바람' 같은 삶과 마주한다.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노무 일을 했고, 어머니는 계란 행상을 다녔다.

박근혜와 문재인, 한국전쟁 와중에 태어났다. 모두 '겨울아이'였다. 1952년 2월 2일 박근혜가 대구에서 태어났다. 1953년 1월 24일 문재인이 거제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들의 성장기는 사뭇 달랐다. 문재인 아버지가 하던 양말 장사는 망했고, 박근혜 아버지가 벌인 쿠데타는 성공했다.

토마토 간식과 도시락 뚜껑의 강냉이죽

문재인 대선 후보의 중학교 졸업 사진. 한 누리꾼은 이 사진을 보고 "헌 신발이 인상적"이란 소감을 댓글로 남겼다.
 문재인 대선 후보의 중학교 졸업 사진. 한 누리꾼은 이 사진을 보고 "헌 신발이 인상적"이란 소감을 댓글로 남겼다.
ⓒ moonjae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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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9월 17일은 목요일이었다. 문재인은 부산 영도에서 남항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기상 관측 후 최대 태풍이라는 '사라호'가 문재인의 집을 덮쳤다. 지붕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하필 아버지가 장사를 떠나 집에 없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1961년 5월 15일은 월요일이었다. 그 날 밤 박근혜 아버지도 집에 없었다. 박근혜는 서울 신당동에서 장충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아내에게 권총을 건네 받은 박정희가 집을 나설 때, 박근혜는 안방에서 책상 앞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라디오에서는 '쿠데타 성공' 방송이 흘러나온다.

박근혜는 공부를 잘했다. 어머니의 보살핌도 컸다. 밤늦게 커피 대신 토마토를 내주고 야채를 갈아줬다고 한다. 1964년 2월 8일 <경향신문>에 서울 시내 전기 중학교 합격자 명단이 실린다. "진학을 축하합니다", 박근혜는 성심여중 합격자 60명 중 네 번째로 자신의 이름을 올린다.

문재인도 공부를 잘했다. 담임 선생님이 성적이 좋다며 과외수업을 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문재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과외는커녕 당장 기성회비가 밀려 다른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쫓겨가는 형편이었다. 문재인은 친구에게 빌린 도시락 뚜껑에 급식으로 나온 강냉이죽을 받아먹는 아이였다.

'고딩' 박근혜 일본에서 샴페인... 문재인 학교에 육영수 '등장'

서강대학교 개교 10주년 행사 때 전자공학과 친구들과 함께 가장행렬에 참여한 박근혜 대선 후보
 서강대학교 개교 10주년 행사 때 전자공학과 친구들과 함께 가장행렬에 참여한 박근혜 대선 후보
ⓒ 2007 박근혜 후보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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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6월 21일, '고딩' 박근혜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었다. 당시 성심여고 3학년 '큰영애' 주변에는 당시 주일대사, 석유공사 사장, 청와대 제2경제 담당수석비서관 등이 배석했다. '유니버스 코리아'라는 유조선 진수식이었다. 유조선을 발주한 곳은 미국 걸프 회사였다.

그 때 국내에서는 3선 개헌 반대 데모가 전국으로 퍼지고 있었다. 역시 '고딩'이었던 문재인(경남고등학교 2학년)도 시위 대열에 동참했다. 전교생이 3선 개헌 반대를 외치며 교문 밖 진출을 시도했지만, 그 무렵 도입된 페퍼포그 차의 '폭죽 놀이'에 막혔다고 한다. 그 해 겨울, 3선 개헌에 반대하는 김지하 등의 '현실동인 제1선언'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총칼로 정권을 찬탈한 무리의 야욕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1972년 10월 17일, 이른바 10월 유신이 선포된다. 공교롭게도 박근혜는 이번에도 해외에 있었다. 스페인 엘페롤이었다. 역시 유조선 진수식이었으며, 발주사 또한 미국 걸프사로 1969년과 같았다. 훗날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선 자금 4백만 달러를 헌납한 것으로 밝혀진 바로 그 회사였다.

한편 당시 경희대에 다니고 있었던 문재인은 수업을 잘 듣지 않았다. 법대생인 그에게 10월 유신은 더더욱 황당한 일이었다고 한다. 앞서 그 해 5월 박근혜의 어머니가 경희대에 방문한다. 대학생들과의 간담회, 그 자리에서 육영수는 "학생들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요즘도 금지 당한 신문이 내게 오고 있는데 왜 숨어서 불온한 생각을 하고 신문을 만드는 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 때, 문재인은 간담회에 참석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 말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재인과 박근혜, 그들의 1975년 6월

1975년 2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당시 궁정동 투표소에서 아버지 박정희와 함께 참석한 박근혜 대선후보
 1975년 2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당시 궁정동 투표소에서 아버지 박정희와 함께 참석한 박근혜 대선후보
ⓒ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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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날이 임박해 다시 프랑스로 떠나던 날...(중략)...시간이 촉박해 말도 더 하지 못하고 급하게 층계를 뛰어내려 오는데 어머니도 저를 따라 뒤에서 뛰어오고 있었습니다. 차를 타고 떠나는 저를 향해 어머니는 오래도록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나무 울타리들이 죽 늘어선 사이에 서서 오래도록 손을 흔들던 어머니. 그것이 제가 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박근혜의 '나의 어머니 육영수' 중)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 그 후 퍼스트레이디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선 박근혜가 동국대 여학생회 간담회에 참석한다. 1975년 6월 19일, 한 학생이 '용감한' 질문을 던진다.

"최근 학원 사태가 사회 불안을 야기했으나, 이것은 정부와 학생간의 시국관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박근혜는 "학생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좁히지 못한 까닭에 때때로 오류를 범할 때가 있다"고 답변한다. '사회 부조리 시정을 외친 지도 10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사회 부조리는 계속되지 않느냐'는 다른 학생의 문제 제기에도 그는 "학생들은 순차적으로 정화해 나갈 생각을 해야지, 감정적으로 이것을 처리하면 곤란하다"고 말한다.

23세의 퍼스트레이디가 동년배 학생들에게 '훈계'를 하고 있던 그 때, 22세 청년 문재인은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돼 있었다. 박근혜의 표현대로라면, 철저히,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좁히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학생'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전, 비상학생총회를 주도한 혐의로 그는 구속과 동시에 제적된다. 그에게 사무치는 어머니의 모습 역시 차안에서 비롯됐다.

"100원짜리 동전 만한 구멍이 숭숭 뚫린 철판이 둘러쳐진 호송차였다. 차 뒤편 구멍으로 밖을 내다봤다. 차가 막 출발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차 뒤를 따라 달려오고 계셨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팔을 휘저으며 '재인아! 재인아!'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중략)...지금까지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혼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장면이다." (문재인의 '운명' 중)

문재인 부대, 도끼 만행사건 당시 '미루나무 작전' 수행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부인 김정숙씨가 11월 27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열린 집중유세에서 연애시절 추억이 담긴 안개꽃을 문 후보에게 선물한 뒤 포옹하고 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부인 김정숙씨가 11월 27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열린 집중유세에서 연애시절 추억이 담긴 안개꽃을 문 후보에게 선물한 뒤 포옹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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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문재인은 강제 징집을 당한다. 그가 배치 받은 부대는 공교롭게도 총칼로 권력을 찬탈한 무리들의 '선봉대'였다. 제1공수 특전여단 3대대, 여단장은 준장 전두환, 대대장은 중령 장세동. 1976년 8.18 도끼 만행 사건 당시 일명 '미루나무 작전'을 수행한 부대도 '문재인의 부대'였다.

그 즈음 박근혜는 충효를 앞세운 국민 정신 개조운동, '새마음운동'에 최태민 목사와 함께 힘을 쏟고 있었다. 1976년 겨울, 박근혜는 TBC 특별기자회견에서 "새마음갖기운동을 생활화하자, 이를 위해 전 국민이 노력하는 것이 국민총화단결의 첩경"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내무반에서 문재인이 지켜봤을지도 모를 광경이었다.

하지만 문재인의 관심사는 '새마음'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박근혜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도 단위 '새마음봉사단' 조직 구축에 성공한 그 즈음, 문재인은 가짜 외출증을 가지고 얼룩무늬 군복에 검은 베레모 차림으로 아내의 졸업 연주회장에 나타난다. 그리고 1978년 2월, 문재인은 제대에 '성공'한다. 정문 앞에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은' 지금의 아내 김정숙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박근혜는 '유신'과 결혼한 듯했다. 1979년 6월, 2차례나 유괴사건을 겪은 정효주양과 어머니를 만난 자리에서 "우리 마음을 바르게 갖자는 새마음운동의 심화와 함께 이 불미스러운 일은 차차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다시 얼마 뒤 새마음봉사단 임원반 수료식에서는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이 생명력을 돌보는 1단계라면, 마음이 새마음으로 변화하여 인간이 비로소 인간다워지는 정신세계의 탄생이 2단계"라고까지 강조한다. 그에게 '새마음'은 '새누리'로 가는 '만능열쇠'였다.

그리고...박근혜는 '경황이 없었다'

지난 2월 21일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서울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을 둘러보고 있다.
 지난 2월 21일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서울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을 둘러보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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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 후보가 10.26 사태 직후 전두환으로부터 받은 6억원은 현재 가치로 최대 300억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이런 거액이 청와대 공금이었다면 박 후보는 '공금 횡령죄' 내지 '장물 취득죄'에 해당한다." (2) "100억∼300억에 달하는 돈을 무상으로 받고도 세금 한 푼 내지 않았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 후보의 말이 아니다. 2007년 7월 이명박 캠프에서 후보 미디어홍보본부장과 수행실장을 각각 맡고 있던 차명진·이성권 전 국회의원의 발언들이다. 아마도 박근혜는 이렇게 오랫동안 '6억원'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지 몰랐을 것이다. 1979년 10·26 사건 직후, 박근혜는 '경황이 없었다'.

문재인도 마찬가지였다. 그 해 초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고 2차 합격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던 그 앞에 '서울의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마음이 들떠서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복학생 대표로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문재인은 사법시험 2차 시험에 응시한다. 그리고 유치장에서 사법시험 합격소식을 듣는다. 1980년 6월 어느 날이었다.

총칼로 권력을 찬탈한 '새 무리'가 전면에 등장하던 때였다. 그들에게 유신 반대 시위 전력이 있는 문재인은 판사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문재인은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김앤장' 등 괜찮은 로펌에서 파격적인 보수와 승용차 제공 등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하려고 했다고 한다.

'무임승차' 박근혜 인터뷰 110분, 대학동창 "부끄럽다"

1977년 육사에 재학중이던 박지만 생도를 박 대통령 가족이 면회하던 날 기념사진. 당시 육사 교장이었던 정승화 장군(오른쪽), 경호실 작전차장보였던 전두환 장군(왼쪽에서 세 번째), 차지철 경호실장(박 대통령 오른쪽) 등이 눈길을 끈다
 1977년 육사에 재학중이던 박지만 생도를 박 대통령 가족이 면회하던 날 기념사진. 당시 육사 교장이었던 정승화 장군(오른쪽), 경호실 작전차장보였던 전두환 장군(왼쪽에서 세 번째), 차지철 경호실장(박 대통령 오른쪽) 등이 눈길을 끈다
ⓒ 1992 <남산의 부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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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재인은 '새 무리'와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인권 변호사로 나섰다. 1987년에는 호헌조치 철폐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부산변호사 시국선언'을 주도했고, '부산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으로 6월 항쟁의 전면에 섰다. 최루탄을 맞아가며 부산 거리를 누볐다. 그동안 박근혜는 침묵했다.

박근혜가 돌아온 것은 6월 항쟁이 '절반의 승리'로 끝난 뒤였다. 1989년 5월 19일, MBC <박경재 시사토론>에서 박근혜는 5.16 쿠데타를 4.19의 뜻을 계승한 혁명이라고 했다. 당시 박근혜는 인터뷰를 한 부분도 삭제하지 말 것을 MBC에 요구했다고 한다. 5.18 민주화운동 9주기 바로 다음날,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평가한 박근혜에게 MBC가 '바친' 시간은 110분이었다. 대학 동창은 분노했다.

"5.16은 군사쿠데타였고 권력에 눈이 어두운 정치군인들이 합법적인 정부를 뒤엎고 만행을 부린 행위였는데도 국민 앞에 사죄는커녕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었다니, 가난을 구제한 지도자라니 하는 망언을 일삼은 박근혜씨의 언동은 참으로 뻔뻔스럽고 오만불손했다. 대학동창생임을 부끄럽게 여긴다. 5.16은 마땅히 단죄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잔당들도 언젠가는 심판대에 올라야 한다." (1989년 5월 24일자 동아일보 독자의 편지, 당시 경북 안동에 살고 있다고 밝힌 권인수씨 글 중)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재인의 싸움도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변호사'가 국회의원이 돼서 그의 곁을 떠난 후에도 시국사건과 노동사건은 여전히 넘쳐났다. '절반의 승리'에 '무임승차'한 박근혜가 '박 대통령·육 여사 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키고 새마음봉사단 후신 '근화 봉사단'을 조직하는 동안, 문재인은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권 시절을 '인권 변호사'로 보냈다.

<타임> 표지의 불편한 진실

한 누리꾼의 미국 <타임>지 'THE STRONGMAN'S DAUGHTER' 표지 제목 번역 논란 패러디
 한 누리꾼의 미국 <타임>지 'THE STRONGMAN'S DAUGHTER' 표지 제목 번역 논란 패러디
ⓒ todayhumo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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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BBC는 이번 대선을 "독재자의 딸과 인권변호사의 대결"로 규정했다. 르몽드, 로이터, AP, AFT 등 세계적인 언론사들 역시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이라 표현했다. 주요 외신들은 이번 대선을 독재자의 딸과 인권 변호사의 대결로 바라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이런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모양새다. 힘있는 언론들은 한사코 '독재자의 딸'이란 표현을 피하고 있다. 심지어 최근 미국 <타임>지의 'THE STRONGMAN'S DAUGHTER'란 표지 제목을 놓고 '강력한 지도자의 딸'이라거나 '실력자의 딸'이라고 표현하는 등 한국형 '아전인수'가 판을 쳤다. (표지 제목을 둘러싼 논란이 나오자 <타임>은 이후 인터넷판 제목을  'dictator's daughter'로 명확히 명기해 놓았다)

그래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우리의 대선은 여전히 '과거'에 묶여 있다. 23년 전 박근혜 후보 대학동창의 글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유감스럽지만, 이것이 우리의 냉정한 현실이다. 잘잘못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위 글은 얼마 전 네 차례 연재됐던 '퍼스트레이디 박근혜' 시리즈에 대한 '기사후기'입니다.



태그:#문재인, #박근혜, #박정희, #새마음운동, #도끼만행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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