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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 30분, 드디어 아내와 나는 남미의 잉카제국 페루에 첫발을 내딛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스페인 마드리드를 거쳐 대서양을 날아 온, 실로 기나 긴 비행이었다. 500여 년 전 모험가들은 목숨을 담보로 하고 하늘의 별을 나침반 삼아 범선을 타고 험한 파도를 가르며 긴 항해 끝에 대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왔었다.

당신은 그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목숨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사랑, 성공, 혁명, 일, 시험, 탐험… 세상에 공짜란 없다. 목숨을 걸고 이루고자 하는 일에 미쳐야만 원하는 목표를 조금이라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세상살이의 이치다. 당시 아내와 나는 세계 일주 여행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난치병으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었던 아내는 앉아서 죽느니 차라리 가다가 죽더라도 좋으니 평생소원이던 세계일주 여행이나 하겠다고 했다.

나는 아내와 단 둘이서 배낭을 메고 론니플래닛 가이드북 하나를 손에 들고,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아내의 마지막 소원을 좇아 세계일주 여행길에 나섰다.
 나는 아내와 단 둘이서 배낭을 메고 론니플래닛 가이드북 하나를 손에 들고,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아내의 마지막 소원을 좇아 세계일주 여행길에 나섰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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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단 둘이서 배낭 하나 떨렁 걸머지고 떠난 우리들의 여행은 어쩌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떠났던 항해보다 더 무모하고 위험할지도 모른다. 콜럼버스는 함께하는 선원들과 후원자가 있었지만, 내게는 난치병 아내와 <론리플래닛> 여행 가이드북 한권이 달랑 손에 들려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가이드 북 한권으로 북유럽-러시아-동유럽-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잉카제국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지나 티티카카 호수-우유니 소금사막-이과아수 폭포-파타고니아-이스터 섬 등 길고 험한 여정이 남아 있었다.

페루 차베스 국제공항 대합실을 나서자 호객꾼들이 우르르 물려들었다. 리마의 치안은 지구상에서 최악이다. 배낭여행자는 도시에 도착한 첫날을 조심해야 한다. 낯선 땅에서 무거운 배낭을 등에 맨 이방인은 도둑이나 호객꾼들의 타깃이 되기 때문이다. 그날 따라 몇 개월째 한국음식을 먹지 못한 아내가 김치가 죽도록 먹고 싶다고 해서 인터넷을 뒤져 찾은 한국인 민박집으로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페루 리마의 택시는 미터기가 없고, 아무 택시나 영업을 한다. 리마에서는 'TEXI'라고 캡이 달린 택시를 타야 그나마 조금 안전하다. (사진은 리마 아르마스 광장으로 오는 택시들)
 페루 리마의 택시는 미터기가 없고, 아무 택시나 영업을 한다. 리마에서는 'TEXI'라고 캡이 달린 택시를 타야 그나마 조금 안전하다. (사진은 리마 아르마스 광장으로 오는 택시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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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지붕에 캡이 달린 택시를 타고 '미라플로레스'로 가자고 하세요. 요금은 10달러 이내일 겁니다. 우리 집 번지수를 택시 운전사에게 알려주면 바로 집 앞에 내려줄 거예요."

'캡과 전화번호가 적힌 택시를 잡아라?' 리마의 택시는 미터기가 없고, 엄청나게 바가지를 씌운다고 했다. 민박집 주인이 전화로 알려준 대로 우리는 호객꾼들을 물리치고 캡이 달린 택시를 잡으러 갔다. 그러나 수십 명의 호객꾼들이 어찌나 달라붙던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거리에 서 있는 정복 경찰을 찾아가 '미라플로레스' 민박집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보여주며 캡이 달린 택시를 하나 잡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경찰은 내 얼굴과 메모지를 번갈아 보더니 캡이 달린 택시를 한 대 불러 세웠다. 그리고 운전사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텐 달러"라고 말했다. "텐 달러? 오케이." 어쩌겠는가? 경찰이 흥정한 가격이니 믿고 따를 수밖에.

아내와 내가 세계일주시 메고 갔던 큰 배낭과 작은 배낭. 아내는 약과 주사바늘이 가득 든 분홍색 작은 여행배낭(왼쪽)을 페루 리마의 레스토랑 한 가운데서 대낮에 도난을 당했다.
 아내와 내가 세계일주시 메고 갔던 큰 배낭과 작은 배낭. 아내는 약과 주사바늘이 가득 든 분홍색 작은 여행배낭(왼쪽)을 페루 리마의 레스토랑 한 가운데서 대낮에 도난을 당했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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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배낭을 트렁크에 싣고 택시를 탔다. 운전사에게 민박집 주소를 건네주니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엑셀을 밟았다. 그렇게 한 20분쯤을 갔을까? 운전사가 주유소에 멈추고 기름을 넣고 나더니 말했다.

"원 퍼슨 텐 달라, 투 퍼슨 투엔티 달라. (1인당 10달러이므로 두 명이니 20달러를 내라)"

이런, 이 자가 기어코 사고를 치려고 하네. 마침 주유소에는 공중전화가 바로 앞 벽에 있었다. 이럴 땐 나도 임기대책이 필요하지. 나는 택시 문을 열어놓고 아내를 차 안에 둔 채 다이얼을 돌려 수화기에 대고 몇 마디 하는 척 하고는 택시로 돌아와 운전사에게 말했다.

"지금 경찰에 신고를 하고 오는 중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경찰이 온다고 했다."
"왓? 오케이, 미스터. 텐 달러 오케이."

"은행 앞에서 강도가 덮치길래 곰처럼 버텼죠"

페루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미라가 있는 리마 대성당
 페루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미라가 있는 리마 대성당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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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신고를 했다는 말에 녀석은 다소 겁을 먹었는지 얼굴색이 변하며 엑셀을 밟았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밤늦게 민박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10달러를 운전사에 건네주니 그는 황급히 사라져 버렸다. 오랜만에 김치에 김치찌개, 상추에 된장을 발라 쌀밥을 한 움큼씩 싸 먹으며 민박집 주인에게 택시운전사 사건을 말했다.

"천만다행입니다. 그런데 연세도 있으신 분이 이렇게 둘이서 배낭여행을 다니다니 참 대단하십니다. 그러나 리마에서는 각별히 도둑을 조심을 해야 합니다. 레스토랑 안에서도 배낭끈을 다리에 감아 앞에 두거나 줄 달린 열쇠를 의자에 채워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네, 그럴만한 사연이 있어서요. 그런데 배낭에 열쇠를 채우라고요? 원,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요? 이거, 겁이 나서 어디 여행이나 하겠소?"
"이곳에 살고 있는 저도 몇 개월 전에 은행에서 돈을 찾아오다가 택시강도를 만나 죽을 뻔 했답니다."
"오, 저런! 그래 어떻게 하셨나요?"
"처음에는 겁이 더럭 났어요. 하지만 상당히 거액을 찾아오는 중이라서 빼앗기면 큰 타격을 입게 되어서 죽을 각오를 하고 용기를 냈지요."
"죽을 각오로 용기를?"
"네, 눈 질끈 감고 그냥 곰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마냥 버텼어요."
"그들이 가만 두던가요?'
"몇 시간째 꿈쩍 앉고 버티고 있었더니 그들도 질렸는지 그냥 보내주더라고요. 마치 곰 사냥에 지친 자들처럼 말입니다. 허허허."
"큰일 날 뻔했군요."
"거액을 찾아가는 고객이 있으면 은행직원이 택시강도와 내통을 해서 그런 수법으로 돈을 털어간다고들 해요. 문제는 경찰에 신고를 해도 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모두가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한 통속이랍니다."
"허허,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네, 강도나 도둑이 경찰에게 뇌물을 상납하는 거죠."

정말 몸집이 곰처럼 큰 민박집 주인의 이야기는 마치 무용담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날 은행에서 그는 2만 달러의 거금을 찾아오다가 큰 봉변을 당할 뻔했다고 했다. 하여간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며, 김치에 쌀밥을 배불리 먹은 우리는 그날 밤 한국 민박집에서 푹 잤다.

대낮에 레스토랑 한가운데서 도둑을 맞다니...

페루 대통령궁에서 열린 코스타리카 대통령 환영 사열식. 우리는 이곳에서 세계일주를 하고 있다는 한국인 신혼부부 L씨 부부를 만났다.
 페루 대통령궁에서 열린 코스타리카 대통령 환영 사열식. 우리는 이곳에서 세계일주를 하고 있다는 한국인 신혼부부 L씨 부부를 만났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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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우리는 리마의 대중교통 수단인 콜렉티보 택시를 타고 아르마스 광장에서 내렸다. 우리는 남미의 정복자 피사로의 미라가 안치되어 있는 대성당을 돌아보고 밖으로 나왔다. 대통령궁 앞에서는 군악대에 맞추어 사열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남미의 도시에는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정부청사, 대성당, 박물관이 모두 함께 모여 있다. 마침 그날은 코스타리카 대통령이 리마를 방문하여 환영식을 한다고 했다.

리마의 대성당 내부
 리마의 대성당 내부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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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미라가 안치된 리마 대성당 내에 있는 피사로의 무덤
 페루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미라가 안치된 리마 대성당 내에 있는 피사로의 무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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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곳에서 우연히 한 쌍의 젊은 한국인 L씨 부부를 만났다. 오지에서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는 것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처럼 반갑다. 오랜 여행으로 우리는 한국말에 배가 고픈 사람들이었다. 특히 영어가 나보다 더 짧은 아내가 더 그랬다. 그들은 리마에 도착한 지 3일째라고 했다. 한국에서 여행사에 근무했다는 L씨 부부의 안내로 우리는 아르마스 광장을 돌아다았다.

"제가 이 근처에 싸고 맛있는 페루 전통 레스토랑을 알고 있는데요. 함께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 음식점이 있다니, 배도 출출한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우리는 L씨 부부를 따라 아르마스 광장 뒷골목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꽤 큰 레스토랑이었다. 우리는 레스토랑 한 가운데 서로 마주 앉아 음식을시켜 놓고 그간의 여행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민박집 주인의 말이 생각이 나서 나는 내 배낭끈을 오른쪽 다리에 감고 양다리 사이에 놓아두었다. 그런데 아내는 우리가 앉아있는 같은 테이블 빈 의자에 배낭을 내려놓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나처럼 배낭끈을 다리에 걸고 앞으로 내려놓아요."
"설마, 대낮에 레스토랑 한 가운데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약도 꺼내 먹어야 하고… 걱정 마세요. 내가 잘 보고 있을테니."

잃어버린 안경을 맞추고 아내의 배낭를 샀던 리마의 차이나타운
 잃어버린 안경을 맞추고 아내의 배낭를 샀던 리마의 차이나타운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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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는 배낭에서 인슐린도 꺼내야 하고, 약도 꺼내 먹어야 하니 옆에 놓아두겠다고 했다. L씨 부부는 신혼여행으로 1년간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반년을 보내고 며칠 전에 리마에 도착했다고 했다. 허니문으로 세계 일주를 하다니, 참 대단한 친구들이었다. 우리보다 30년을 먼저 앞서가는 용기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음식은 값도 싸고 맛이 있었다. 우리는 싸고 맛있는 페루 전통음식을 먹으며 여행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L씨 부부는 리마에서 며칠을 더 보내고 아마존으로 떠난다고 했다. 우리는 마추픽추를 가기 위해 쿠스코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음식을 거의 다 먹고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그 때 아내가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어머, 내 배낭!"
"뭐? 배낭?"
"네, 배낭이 없어졌어요!"

바로 옆에 둔 배낭에서 약을 꺼내 먹으려고 하는데 배낭이 없어진 것이다. 대낮에 레스토랑 한 가운데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다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레스토랑 주인에게 배낭이 없어졌다고 했더니 그는 속수무책인 듯한 제스처를 보여줄 뿐이었다. 아마 처음부터 우리를 노린 도둑이 뒷좌석에 앉아 있다가 우리가 잠깐 방심을 한 사이에 배낭을 의자 밑으로 끌어내려 훔쳐 가버린 모양이었다.

아내의 작은 배낭은 여행을 하는 동안 복용할 약과 인슐린, 주사바늘로 가득 차 있었다. 거기에다 아내의 신용카드와 직불카드, 안경도 들어 있다고 했다. 카드는 항상 몸에 휴대를  하라고 그렇게 일러두었건만 방심을 하다니. 그나마 여권은 복대에 차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내의 약이 제일 큰 문제였다. 사람은 위기가 다가올수록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나는 우선 한국으로 국제전화를 하여 카드 도난 신고를 먼저 했다. 그 다음으로는 경찰서에 도난 신고를 하기로 했다. 혹시나 도둑을 잡으면 약과 인슐린, 주사기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하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걸어 보기로 했던 것. 만약에 약을 구하지 못하면 여행을 중단하고 우리는 귀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권·지갑 몽땅 털려 빈털털이 된 폴란드 신혼부부

L씨 부부는 자기들이 가자고 했던 레스토랑에서 도난을 당하자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리는 L씨 부부랑 함께 리마의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에 도착하여 도난경위 등 조서를 받고 신고가 거의 끝나갈 무렵, 30대로 보이는 유럽인 부부가 얼굴이 파래가지고 들어왔다.

그의 부인은 거의 초주검이 다 된 몰골이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심각한 일을 당한 모양이었다. 조서를 받다가 그들은 대사관에 전화를 할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형사는 턱으로 공중전화를 가리키며 그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다.

"우리는 도둑에게 여권과 지갑을 몽땅 다 털려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요. 경찰서 전화를 좀 사용할 수는 없나요?"

그러나 조서를 받고 있던 형사는 그럴 수 없다는 듯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정말로 동전 한 푼도 없는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나는 잔돈을 꺼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동전을 받아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끝내고 나더니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이거, 정말 감사 합니다."
"뭘요. 저희들도 당신과 같은 처지랍니다. 우린 아내의 배낭을 레스토랑에서 도난을 당했어요."
"아, 네 말도 마십시오. 이런 황당한 일을 당하다니 내 평생에 처음있는 일입니다."

그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평생 가고 싶었던  마추픽추 관광을 하기 위해 신혼여행을 페루로 왔다고 했다. 며칠 전에 리마에서 비행기를 타고 쿠스코에 도착을 했는데, 그의 아내가 고산 증세가 심각하여 토하고 전혀 음식을 먹지 못하는 바람에 다시 리마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다음날 바르샤바로 가는 비행기를 탈 예정이라고 했다.

쿠스코(해발 3600m)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자 그의 아내가 겨우 진정이 되어 켄터키프라이치킨에서 정심을 먹다가 잠시 방심을 하는 사이에 여권과 항공권, 돈이 든 가방을 몽땅 도난 맞는 변을 당했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들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가장 중요한 여권과 항공권, 돈까지 몽땅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들의 사연을 듣고보자 우리는 상대적으로 다소 위안이 되었다. 다시 조서를 받기 시작하는 폴란드 부부와 헤어져 우리는 리마의 관광경찰과 함께 현장 검증을 위해 도난을 당한 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리마의 도둑은 바람처럼 빠르다?

30대로 보이는 리마의 관광경찰 마르틴은 생각보다 친절했다. 그와 함께 배낭을 도난 당한 레스토랑으로 가서 형식적인 현장 검사를 했다. 사실 그 도둑도 배낭을 열어보고 황당했을 것이다. 배낭에는 약과 주사바늘로만 가득 차 있었으니 그에게는 모두가 쓸모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마 수 백개의 인슐린용 주사바늘을 보고 마약을 찾지나 않았을까?

"마르틴, 이거 너무 불안해서 당신네 나라를 여행할 수 있겠소?"
"우리도 골칫거리요. 워낙 가난한 나라이다 보니 도둑이 너무 많아 관광객이 스스로 조심을 하는 수밖에 없답니다."
"아내의 약과 인슐린, 주사바늘도 구하고, 안경도 맞춰야 하는데 마르틴이 좀 도와주시오. 약을 구하지 못하면 우린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답니다."
"물론이지요. 기꺼이 도와드리지요."

차이나타운 안경점에서 아내가 새로 산 배낭을 메고 안경을 맞추고 있다.
 차이나타운 안경점에서 아내가 새로 산 배낭을 메고 안경을 맞추고 있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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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관광경찰 마르틴의 안내로 이틀 동안이나 병원, 약국을  찾아다니며 아내의 약을 구했다. 물론 L씨 부부도 관광을 제처 놓고 함께 동행을 했다. 우리는 가까스로 필요한 약을 구할 수가 있었다.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안경점에 가서 안경도 마치고 작은 배낭도 하나 샀다.

"마르틴 너무 고맙소. 당신 덕분에 여행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대신 오늘 저녁을 내가 한턱 쏠 테니 함께 저녁식사나 합시다."
"오케이, 기꺼이. 미스터 초이,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네요. 하하."
"그렇소. 마르틴 덕분에 우린 다시 여행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소. 고맙소!"

이틀 동안 우리와 함께 동행을 하며 약을 구하고 안경과 가방을 사는 데 도움을 주었던 리마의 친절한 관광경찰 마르틴(리마 차이나타운)
 이틀 동안 우리와 함께 동행을 하며 약을 구하고 안경과 가방을 사는 데 도움을 주었던 리마의 친절한 관광경찰 마르틴(리마 차이나타운)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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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차이나타운에서 마르틴과 기념촬영도 하고 유쾌하게 웃으며 마르틴이 잘 안다는 중국음식점으로 가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비록 백주의 대낮에, 그것도 레스토랑 한 가운데서 배낭을 도난당하는 황당한 일을 당했지만, 마르틴의 따뜻한 도움이 크게 위로가 되었다.

"마르틴, 여기 중국음식점은 안전한가요?"
"하하, 이 세상에 안전지대는 없어요. 각자가 조심을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지요."
"페루의 경찰이 옆에 있는데도?"
"녀석들은 경찰도 귀신같이 속인답니다. 리마의 도둑들은 정말 바람처럼 빠르거든요."
"리마의 도둑은 바람처럼 빠르다고요?"
"네, 바람처럼."

리마에서 황당한 일을 당하고 도착한 잉카제국의 잃어버린 공중 도시 마추팍추
 리마에서 황당한 일을 당하고 도착한 잉카제국의 잃어버린 공중 도시 마추팍추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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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정말 리마의 도둑은 바람처럼 빠른 것 같았다.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 아내 옆에 놓아둔 배낭을 감쪽같이 훔쳐가다니… 아내는 모두가 도둑처럼 보이는 리마를 빨리 떠나자고 재촉했다. 마르틴의 도움으로 이틀 동안 약과 주사바늘을 구한 우리는 쿠스코 행 버스표를 샀다.

리마 관광을 포기하고 우리는 다음날 아침 버스를 타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무려 30시간이 걸리는 쿠스코로 가는 길을 택했다. 아내는 비행기를 타고 갔다가 고산병에 걸려 다시 되돌아온 폴란드 부부가 영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육로를 통해 가며 고산증세에 적응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것이 아내의 의견이었다. 나는 아내의 의견을 좇았다. 

지나간 일은 빨리 잊어야 한다. 그래야 더 큰 세상으로 여행을 떠날 수가 있다. 아내와 나는 우여곡절 끝에 세계일주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난치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했던 아내는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정상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여행은 이처럼 때때로 막다른 골목을 큰 길로 인도해 주며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

덧붙이는 글 | '나의 황당 해외여행기'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남미여행, #리마의 도둑, #페루여행, #마추픽추, #잉카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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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여행, 작은 나눔, 영혼이 따뜻한 이야기 등 살맛나는 기사를 발굴해서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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