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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일제가 자행한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던 해이다. 국경일인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거족적으로 행사를 기념하자고 한글 관련 단체들이 정부에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킨 해이기도 하다. 조선어학회는 일제시기부터 한글날 행사를 주최하여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이 언어독립투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서, 급기야 1942년 10월부터 모두 33인을 검거하여 탄압하였다. 그 가운데 이윤재와 한징은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까지 하였다. 최현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은 해방 뒤에야 석방되었다.

국어학계와 관련 학술단체에서는 많은 행사를 치러 언어독립투쟁을 전개한 애국선열의 정신을 계승하기로 다짐하였다. 현재까지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탄압을 받은 인사 가운데 23인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해방 이후 북한 정권에 참여한 인사 몇 분이 포상 받지 못한 상태에 있다. 아울러 생계의 곤란 등 여러 사유로 아직까지 후손이 선열의 업적을 제대로 국가보훈처에 신고하지 않아 몇 분의 인사가 누락된 상태에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권승욱 선생의 경우도 지금까지 우리 정부가 예우를 해드리지 못하였다. 이에 필자가 그의 공훈을 여기에 알리니, 정부 관련 부처에서 적절한 조처를 하여 주기를 바란다.

 권승욱(1917-1974)
 권승욱(1917-1974)
ⓒ 한글학회
권승욱은 1917년 7월 10일 전북 정읍군 칠보면 시산리 757번지에서 태어났다. 1930년 4월 7일에 고창고보에 입학하였다. 고창고보 학적부에 의하면 학생시절의 주소는 전북 고창군 고창면 읍내리 73번지였다. 유도선수와 야구의 포수, 축구 콜키퍼 등 만능 운동선수로도 이름을 날렸다. 1935년 3월 4일에 고창고보를 졸업하였다. 고창고보 스승인 정인승으로부터 조선어사전의 편찬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받고, 22세가 되던 1938년 6월에 조선어학회에 참여하였다.

조선어사전 편찬원이 되어 그도 이극로, 정인승, 이중화, 한징, 권덕규, 정태진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들은 16만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를 모아 뜻풀이를 완성하여, 1942년 봄에는 사전의 원고 일부를 출판사에 넘겨 조판하게 하였다.

일제는 우리말 어휘가 풀이된 조선어사전의 편찬을 막고자 급기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그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1942년 10월 1일에 일제 경찰에 피검되어 함경도 함흥경찰서와 홍원경찰서와 함흥감옥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다음은 그가 일제 경찰에 당한 고문의 실상이다.

"여러 날을 굶주리어 파리하여졌다. 형사는 나를 끌어가며 "바른 대로 말 안하면 죽인다"고 얼러댄다. 그러나 아무 감각이 없이 돌과 같이 그저 끌려갈 뿐이다. 취조실에 들어섰다. 형사 7,8인이 죽 늘어앉았다. 마치 백정과 같이 살기를 띠고 '어학회의 목적이 무엇이냐?' 그러고 '이극로랑 한 이야기를 말하라'하고 밑도 끝도 없는 말로 묻는다. 나는 '학술연구기관이다' 그러고 '학술문제 외에는 한 말이 별로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요 녀석 무엇이 어째'하고 뺨을 후려갈긴다. 눈에는 불이 번쩍, 정신이 아찔하다. 그런 식으로 물으니 그와 같이 대답할 뿐이다. 그 밖의 것은 모른다고, 없다고 시종 부인하거나 함구를 하였다. 여러 사람이 잡히어 왔으니 잘못하다가는 걸리기 쉬우니,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않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발로 채이고, 사매를 맞고, 궁글림을 당하고 메어침을 당하고 하니 분하고 억울하고 견디기 어려워 죽여 달라고 소리를 치며 울었다. 그러니 '이 녀석 말 잘했다. 죽여 주마'한다. 그러고는 나체로 벌거숭이를 만들고는 옆방으로 끌고 간다. 끌리어 가보니 수도가 있고 그 밑에는 큰 물통이 놓여있고 석되들이 주전자가 서너개 있으며 수술대 같은 긴 나무로 된 의자 같은 틀이 가로놓여 있었다. 싸늘하고 무시무시하다. 틀에다가 뉘어 놓고는 두 다리의 발목을 틀에 동여매고 팔은 뒤로 젖히어 팔목을 동여매어 꼼짝 못하게 하여 놓는다. 나는 '기절할 때까지'를 입속으로 외웠다. 예수나 석가와 같이 태연하였다. 다만 물 따르는 소리밖에 아니 들린다. 한 놈은 발에 올라타고, 한 놈은 머리를 움켜쥐어 꼼짝 못하게 하고는 한 놈은 주전자를 들어 염불하듯이 '물을 먹으면 저승에 가고, 저승에 못 가면 폐병이 걸린다'하면서 가슴에다 폭포수와 같이 붓기를 시작한다.

온 몸이 싸늘하여 지는데 입과 코에다가 떨어뜨린다. 그러니 숨 쉬는 바람에 물을 아니 마실 수 없다. 폐로 물이 들어가게 되니 숨이 막히고 위로 삼키어 넘기게 된다. 숨이 막히는 바람에 물을 벌컥 넘기며 고통에 못 이기어 '아!'하고 외마디의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친다. 그러면 머리카락이 한줌씩 빠지며 고개만이 자유롭게 되는 틈에 숨을 얻어 쉰다. 이러기를 거듭하는데 참으로 죽을 지경이다. 고통에 견디지 못하여 죽을 작정을 하고 숨을 아니 쉰다. 그러나 산목숨이니 숨을 아니 쉴 수가 있으리오.

'기절을 할 때까지' 어느 때나 기절하나? 고통은 더 심하고 정신은 점점 맑아진다. 이렇게 하여 서너 주전자를 먹는 중에 위를 중심삼아 온 심줄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상태에 이르더니 위가 불룩하여지며 분수처럼 입으로 토한다. 토하고 나니 그치었다. 정신이 아찔하고 개 떨리듯 떨리며 고추 설 기력이 없다. 나중에 생각하여 기절할 때까지가 아니라 토할 때까지가 원칙인 듯싶다. 기질이 약한 사람은 기절하고 강한 사람은 토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고경(苦境)을 여러 날을 두고 겪은 뒤, 우리 3인은 함흥에서 10월 23일에 홍원경찰서로 옮기어 끌려갔다."

- 권승욱, <조선어학회 수난의 회고> <민성>34(1949, 4))

1943년 9월 18일에 기소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출옥 뒤, 전남 광주에서 쉬고 있었는데, 서민호가 그를 벌교에 있는 송명학교 교사로 취직시켜주었다. 학교가 폐교된 뒤, 금융조합에 취직하였다. 해방 뒤 벌교에서 열린 국어강습회에 강사로 강연을 하였다.

1945년 9월 초 서울로 올라가 조선어학회가 추진 중이던 <조선말큰사전> 편찬 사업에 편찬 위원으로 다시 참여하였다. <조선말 큰사전>의 1권에서 6권이 나올 때까지 전부 참여하였다. 1949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탄압받은 인사들로 조직된 십일회에 회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1949년 6월 12일에 첫 모임을 갖고 사진을 찍은 십일회 회원들의 모습 앞줄 왼쪽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이중화, 장지영, 김양수, 신윤국.
가운데 줄 왼쪽부터 김선기 백낙준, 장현식, 이병기, 정열모, 방종현, 김법린, 권승욱, 이강래.
뒷줄 왼쪽부터 민영욱, 임혁규, 정인승, 정태진, 이석린(총 22명 촬영)
▲ 1949년 6월 12일에 첫 모임을 갖고 사진을 찍은 십일회 회원들의 모습 앞줄 왼쪽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이중화, 장지영, 김양수, 신윤국. 가운데 줄 왼쪽부터 김선기 백낙준, 장현식, 이병기, 정열모, 방종현, 김법린, 권승욱, 이강래. 뒷줄 왼쪽부터 민영욱, 임혁규, 정인승, 정태진, 이석린(총 22명 촬영)
ⓒ 한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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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글학회 이사, 수도여자사범대학 강사, 배재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 1974년에 서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승욱의 자제로 권오운, 권상주, 권시내, 권한솔, 권범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족의 동의와 도움이 있어야 권승욱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신청할 수 있다. 권승욱의 자제나 친족들이 이 글을 보면 한글학회(전화:02-738-2236)로 연락하여 필자를 찾아주기 바란다. 우리나라를 강탈하여 우리말과 글을 박탈한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 권승욱에 대해 이제라도 정부는 제대로 평가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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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