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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대선후보 TV토론에서 이정희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상대로 한 '외교 분야' 질문에서 박 후보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인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를 언급한 바 있다. 이를 계기로 박 전 대통령의 또 다른 일본식 이름으로 알려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까지 함께 세인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들이 포털에서 인기검색어 상위순위에 오르자 이에 덩달아 몇몇 신문들은 관련기사를 쏟아냈다. <중앙일보> <동아일보> <뉴데일리> <빅뉴스> 등 주로 보수성향의 신문들이 5일자에서 관련기사를 다뤘는데, 골자는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는 박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이 아니라는 주장이 대부분이다(<중앙일보>는 "박 전 대통령이 '다카키 마사오'에 이어 2차로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보도했다).

문제는 한 역사인물의 정체성과 관련된 사항을 제대로 된 검증도 하지 않은 채 일시적인 화제성 기사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런 기사들은 인터넷이나 SNS 등을 타고 확산되고 있으며, 게다가 불필요한 논란까지 일으키고 있다. 심지어 유명 필자들의 저서에도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는 물론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 역시 박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이라고 버젓이 실려 있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 둘 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창씨개명)으로 불리고 있다. 둘 가운데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는 공문서 등에서 이미 확인돼 별다른 이견이 없다. 반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는 그 진위 여부를 두고 여전히 논란이 일고 있다. 그렇다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는 과연 박정희가 두 번째로 한 창씨개명일까? 그간 나온 각종 언론보도와 창씨개명 관련 연구성과 등을 토대로 그 진실을 파헤쳐보기로 하자.

'다카키 마사오'에 이은 또 하나의 일본식 이름?

 재미언론인 고 문명자씨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표지
 재미언론인 고 문명자씨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표지
ⓒ 월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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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가 언제부터 박 전 대통령의 '두 번째 창씨개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는지부터 살펴보자. 국내에서 그 시발은 재미언론인 고 문명자씨(미국명 줄리 문, 2008년 작고)가 1999년 11월에 펴낸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월간 말)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코리아게이트', '김형욱 전 중정부장의 폐차장 압사 사망설' 등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여럿 담고 있는데, 이는 문씨가 취재과정에서 직접 보고 들은 내용들을 토대로 쓴 것이다.

문씨는 이 책에서 "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기 마사오. 그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고 썼다. 문씨와 교류가 있었던 필자는 이 책 출간기념회에서 사회를 봤으며, 책 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 당시 다니던 신문사에서 연재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필자는 그 책을 정독했지만 이 대목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고 다른 언론들도 마찬가지였다.

문씨의 책 출간 3개월 앞서 그해 8월, 민족문제연구소는 '8월의 친일인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선정, 발표했다. 연구소는 이런 사실과 함께 박정희의 친일행적 내용을 담아 연구소 홈페이지에 공개하면서 "박정희가 42년 일제 괴뢰국인 만주제국의 신경군관학교에 다니면서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으며 졸업식에서는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해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다"고 답사하는 등 친일행적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연합뉴스> 1999. 8. 8. 기사 참조).

그러나 문명자씨 책이나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오카모토 미노루'는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카모토 미노루'가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4년 7월 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출신의 최상천씨가 펴낸 <알몸 박정희>(사람나라)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 책은 수십만 부가 팔린 것으로 알려졌는데, 최씨는 책 뒷부분에 박정희의 '실체'를 언급하면서 '오카모토 미노루'를 다뤘다.

평범한 시골학교 학생에서 '두목 급장'으로, 보통학교 교사에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거쳐 만주군 장교로, 박정희에서 다카키 마사오로, 다카키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오카모토 미노루에서 다시 박정희로, 만주군 중위에서 가짜 광복군 중대장으로, 가짜 광복군 중대장에서 대한민국 육군장교로, 제국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공산당 최고위급 간부가 공산당 진압군 작전장교로, 무기징역 죄수에서 다시 육군 정보장교로, '빨갱이'에서 반공주의자로…."

이후 박정희 관련 글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는 '다카키 마사오'에 이어 또 하나의 창씨개명으로 통용(?)되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일본의 한 군인 인명사전에서 이를 언급하면서였다. 2005년 8월에 출간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2판에서 박 전 대통령의 일본명을 '岡本 実'('実'은 '實'의 약자이자 일본식 표기임)로 표기한 것이 국내에 소개됐다. 이 내용은 그간 나온 '오카모토 미노루' 설에 상당한 근거가 되는 듯 여겨졌다.

관동군 시절 연대장의 성을 따왔다는 주장, 사실일까

 2005년에 출간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2판)에는 박정희의 일본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나와 있다.
 2005년에 출간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2판)에는 박정희의 일본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나와 있다.
ⓒ 도쿄대학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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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로부터 1년 뒤인 2006년 8월 9일자 <세계일보>는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은 왜 두 개였나' 제하의 기사에서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와 함께 박 전 대통령의 해방 전 일본식 이름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특히 "몇몇 재중동포들이 기억하는 '마쯔모도'도 있지만 이는 사실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며 박정희의 또 다른 일본식 이름도 있을 수 있을 개연성을 암시했다.

그러나 이 기사는 그간 나온 것을 토대로 했을 뿐 새로운 소스는 제공하지 않았다. 신문은 두 일본식 이름은 시기와 성격에서 차이가 있다고 전제하고는 '다카키 마사오'의 경우 언론인 조갑제씨의 저서 <박정희-불만과 불운의 세월>(까치, 1992)에 실린 내용을 인용했다. 조씨 책에는 "군관학교에서 한국인 생도들에게 1주일씩 휴가를 주며 '고향에 가서 창씨개명을 해오라'고 시킨 것이다. 퇴교 등 명시적 협박은 없었으나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동기생들은 말한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는 "이 이름(다카키 마사오)엔 원래 박정희 이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목(木)은 박(朴)에서, 정(正)은 정희(正熙)에서 따온 것이라서다. 이처럼 강압적 분위기에서 원래 이름의 흔적을 남기며 창씨개명 하는 게 그 시대엔 흔한 일"이라고 썼다. 맞는 말이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의 '高木'의 '高'는 '고령(高靈) 박씨'에서, '木'은 '박(朴)씨'의 나무 목(木)을 따온 것이다. 또 개명(改名)인 '正雄'의 경우 '正'은 본명 '정희(正熙)'에서, '雄'은 일본식 남자 이름의 어투에서 따온 것이다.

반면 신문은 '오카모토 미노루'를 두고 "우선 조선이름 '박정희'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썼다. 이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신문이 '오카모토 미노루'의 근거로 든 것은 앞에서 언급한 문명자씨의 책과 '일본백과사전'을 들고 있는데 이는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을 지칭한 듯하다.

또 기사 말미에서는 김병태(당시 79세) 건국대 명예교수의 말을 빌어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며 박정희가 그 연대장의 성을 따서 창씨개명을 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세계일보> 기사는 문젯점이 많아 보인다. 첫째,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와 함께 박정희의 또다른 일본식 이름이라고 주장하면서 '몇몇 재중동포들의 기억'을 근거로 든 점이다. '몇몇 재중동포'들은 박정희가 간도특설대 출신이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이는 분명 사실이 아니다. 당시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던 송석하(예비역 육군 소장, 작고), 신현준(전 해병대 사령관, 작고) 등은 "박정희를 본 적 없다"고 필자에게 증언한 바 있다.

두 번째, '오카모토 미노루'의 근거로 이미 출간된 문명자씨 책과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을 든 것도 그렇거니와 김병태 명예교수의 말을 인용한 것도 그렇다. 우선 김 교수의 증언은 기본적인 '팩트'가 사실과 다르다.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견습사관을 거쳐 배속된 곳은 열하성 흥륭현 소재 만주군 보병 8단(團, 연대급)이었다. 단장은 중국인 당제영(唐際榮)이었으며, 그의 계급은 상교(上校), 우리로 치면 대령이었다(당시 보병 8단에는 박정희를 포함해 이주일, 방원철, 신현준 등 한국인 장교가 4명 있었다. 1997년 필자는 방원철, 신현준 두 사람을 인터뷰하였는데, 그때는 이런 것이 화제가 아니어서 물어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카더라' 수준의 주장"... 북한이 퍼뜨린 것이라는 주장도 

 박정희 큰형 박동희가 1945년 3월에 작성해 구미면 사무소에 보고한 박정희 병적기록표. 오른쪽 하단(붉은 네모선)에는 박정희의 창씨명 '高木正雄'이, 왼쪽 하단에는 신고자 박동희의 창씨명 '高木東熙'가 적혀 있다.
 박정희 큰형 박동희가 1945년 3월에 작성해 구미면 사무소에 보고한 박정희 병적기록표. 오른쪽 하단(붉은 네모선)에는 박정희의 창씨명 '高木正雄'이, 왼쪽 하단에는 신고자 박동희의 창씨명 '高木東熙'가 적혀 있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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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에서 자료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값진 글을 하나 접했다. 보수성향의 매체인 <빅뉴스> 5일자에 실린 글이다. 자유기고가 이시완씨가 쓴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는 북한에서 시작된 네거티브>라는 제하의 글이 그것이다. '오카모토 미노루' 관련해 그간 나온 글 가운데 가장 알찬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정치적 지향점은 다르다고 해서 '팩트'마저 흔들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씨는 기사에서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말을 퍼뜨리고 있는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박정희의 창씨개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얘기를 도대체 어디에서 들었느냐"고 묻고는 최상천의 <알몸 박정희>, 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김형욱 회고록> 등을 열거하면서 이들 책들이 "그 어떤 자료도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카더라'라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안티 박정희'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들 '안티 박정희' 대부분이 '오카모토 미노루' 근거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을 들고 있는데, "이 사전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한 '개인출판물'"이라며 신뢰성이 떨어지는 자료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특히 이씨는 "더욱 중요한 점은 이 사전의 초판(1991)에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이 없는데, 2005년 발간된 2판에 갑자기 이 이름이 추가되었다"며 그 배경에 의혹을 제기했다.

그래서 이씨는 이 책을 출판한 도쿄대학 출판부를 통해 저자에게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의 근거를 확인해본 결과 "근거 확인이 안 되니 3판을 출판할 때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을 삭제하겠다"라는 답변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씨의 주장대로라면 사전 저자는 뚜렷한 근거도 없이 박정희의 일본명을 '岡本 實(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썼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을 근거로 든 주장은 이제 종지부를 찍게 될 전망이다. 

그런데 이씨는 이 기사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소개했다. 그는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주장의 뿌리를 추적하면서, 가장 오랜 것을 1985년에 나온 <김형욱 회고록>으로 한동안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보다 더 오래된 기록을 새로 찾아냈는데 놀랍게도 그 출처가 '북한'이라고 했다. 1973년 8월 11일자 북한 <로동신문>에는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부터 박정희 비판글을 쏟아냈는데 그때부터 '오카모토'가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것.

이같은 사실을 토대로 이씨는 "한국에서 1973년 이전에 박정희를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주장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며 "그것은 다시 말하면 한국 사회에 퍼진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설은 북한의 주장을 확인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정적 비판을 위해 퍼뜨렸다는 말이 된다"며 '안티 박정희' 진영에 대해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씨의 지적은 일면 타당한 점이 많다. 그간 나온 '박정희 비판서' 가운데 상당수가 이에 대한 검증작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근거 될 만한 공문서 없어... 2차 창씨개명, 필요했을까

 만주군 소위 임관 직전의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
 만주군 소위 임관 직전의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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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그간 국내 언론보도 등을 통해 '오카모토 미노루'가 어떻게 시작, 확산됐는지, 그리고 그 실체는 어떤 것인지를 살펴봤다. 이제부터는 일제하 '창씨개명'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들을 토대로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제2의 창씨개명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시행(사실상 강요)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였다. 하나는 '내선일체' 구현 차원에서 식민지 백성인 조선인들에게도 천황의 신민(臣民)이 될 자격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창씨제 시행일을 '일본 기원 2600년'인 1940년 2월 11일에 맞췄다.

그러나 그 속셈은 징병제 실시를 앞둔 사전 포석 차원이었다. 장차 조선인들에게도 총을 들려 전선으로 내보내야 할 판인데 군대 안에 '이아무개', '김아무개'가 섞여 있는 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겉으로는 선심을 쓰는 체 하면서도 나름의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창씨개명제가 시행되던 그날 대만에서는 비슷한 '개(改)성명제도'가 시행됐다. 일제관동군의 꼭두각시였던 만주국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예로 <하얼빈시사(市史)연표)에 따르면, 하얼빈시의 경우 1940년 2월 14일부터 조선인 창씨 설정 신청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당시 만주에 살던 조선인들은 고향에 거주하는 가족들과 같은 호적을 사용하고 있어서 조선에서 호적등본을 고칠 경우 따라서 고쳐야만 했다. 즉 만주 현지에서 창씨개명을 해야만 했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1940년 4월) 그 이듬해 학교 당국에서는 그를 포함해 조선인 생도들에게 1주일 휴가를 주면서 고향에 가서 창씨를 해오라고 시켰다. 조선인들은 창씨개명을 할 때 혼자서 자기 마음대로 정하기보다는 문중회의나 집안 어른들이 의견을 모으면 그에 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박정희의 창씨명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박정희는 창씨(朴 → 高木)와 개명(正熙 → 正雄) 둘 다 했다. 그러나 그의 큰형 박동희(朴東熙)는 '高木東熙'로 고쳤으니 개명은 하지 않고 창씨만 한 셈이다).

박정희가 창씨개명을 한 정확한 시점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을 한 사실만은 확인됐다. 혹자는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로 2차 창씨개명을 했다고 주장하나 정확한 시점이나 근거가 될 만한 공문서 같은 것은 제시되지 않았다.

다만 그 시기를 두고는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졸업하고 1942년 봄 일본 육사로 유학을 떠난 후 일본 현지에서 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상식적으로 볼 때 가능성이 매우 낮다. 게다가 증언이나 친목회 회지(會誌) 같은 것 말고는 현재로선 근거자료가 미약한 셈이다.

근거도 필요성도 미약... '사실'로 인정하기 힘들어

일제강점 35년, 전 시기를 통틀어 창씨개명을 두 번 한 사람은 "일본인이 되지 못하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극렬 친일파 이영근(李永根)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와 쌍벽을 이루는 친일파 현영섭의 경우처럼 도중에 사상적 변전(變轉)을 거치지 않고 그는 처음부터 친일노선을 견지했다.

친일단체인 '녹기연맹'의 기관지 <녹기(綠旗)>에 일본 천황제 찬양 글을 잇달아 쓰던 그는 창씨개명이 실시되자 '가와모토 다츠오(河本龍雄)'에 이어 새로 '우에다 다츠오(上田龍男)'로 다시 창씨개명을 했다. 이영근이 두 번씩이나 창씨개명을 한 이유는 자신의 친일성을 과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에 비하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는 훨씬 더 친일성향이 노골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가 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혈서'를 써서 보낸 바 있는데 이는 당시 그의 나이가 많아 입교가 어렵게 되자 입교를 목적으로 일종의 '충성맹세'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해 일본 육사 유학 특전까지 얻은 그가 일본 냄새가 짙은 이름으로 다시 창씨개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오카모토 미노루'가 박정희의 두 번째 창씨개명이라는 주장은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다.

덧붙이는 글 | [참조]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의 추억>(<진실의길> 2012. 12. 6.)
http://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2332&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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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