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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린다는 건 모양만을 담아내는 게 아닐 겁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모양만을 담아내는 게 아닐 겁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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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사진이 보편화 되면서 지나친 수정, 소위 '과도한 뽀샵처리'가 문제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얼굴의 잡티 제거는 기본이고, 성형수술이라도 한 양 눈 크기와 코 모양이 달라지고, 얼굴 형체까지 변형시켜 놓아 사진 속 인물과 실물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 일쑤입니다.  

디지털사진에만 수정이 있는 건 아닙니다. 흑백사진이 주를 이루던 과거에도 사진은 종종 수정되었습니다. 수정한 필름을 뒤에서 불빛을 비추는 수정판 위에 놀려 놓고 뾰족하게 깎은 4B 정도의 연필로 덧칠하는 방식으로 필름의 음영을 조절해 잡티를 제거하거나 인상을 좀 더 부드럽게 하는 정도의 수정은 그때도 있었습니다.

방법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진에 대한 수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수정은 사진에만 있었던 게 아닌 모양입니다. 사진이 나오기 전, 세밀한 붓질로 사람의 얼굴을 그리던 초상화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수정하거나 보완하는 '봉심'이라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왕의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들 이야기

<왕의 화가들> 표지
 <왕의 화가들> 표지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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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혜·황정연·윤진영·강만기가 쓰고, 돌베개가 펴낸 <왕의 화가들>에서 그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의 화가들>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의 왕실문화 총서 발행 사업 중 왕실의 미술분야에 대한 연구 결과의 일환으로 출판된 책입니다.

국가기관의 연구결과물인 만큼 내용, 구성, 사진의 질 등이 체계적이며 구체적입니다. 기록과 고증을 기반으로 한 구성이기에 허툰 표현 하나 없는 역사적 사실들이 일반 독자의 눈높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왕들의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들과 관련한 자료들을 결집한 기록이기에 읽으면서 즐길 수 있는 회화적 역사서라 생각됩니다.

<왕의 화가들>은 왕들의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왕의 화가들은 어떻게 선발하고, 어떤 훈련(교육)과정을 거치며, 그들의 신분과 생활 여건은 어땠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초상화를 그려나가는 과정과 화원들의 임무와 역할 등 왕들의 초상화와 왕가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의례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낸 화가들의 면모를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상화에서 엄밀하고 핍진해야 함을 강조한 "털끝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다"(一毫不似 便是他人)라는 말은 주로 '도사'에 적용되지만, '모사'에도 예외일 수 없는 원칙이었다. - <왕의 화가들> 133쪽

일반적으로 완성본 어진을 봉심하는 자리에서 미흡한 부분이 발견되면, 화면 위에 붓을 대는 가필(加筆)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735년(영조 11) 9월 10일에 영희전 제2실 세조어진의 모사가 완성되자 완성본에 대한 봉심이 있었다. 영조는 봉심의 자리에 이치와 장득만을 참석시켰고, 몇 가지 지적 사항을 말했다.

먼저 용안의 눈동자인 흑정(黑精)과 눈썹 끝이 너무 옅은 점, 오른쪽 뺨에 티가 있는 점, 얼굴에 회색기가 많은 점, 용안의 턱 아래가 옅은 점 등을 지적했다. 이치가 눈이 어두워 자세히 살필 수가 없자 장득만이 일부를 가채(加彩)하여 보완하였다. 영조는 어진의 가필을 조력한 장득만을 수종화사에서 동참화사로 승급시켰다. 영조의 완벽을 향한 치밀하고 집요한 성정을 읽을 수 있다. - <왕의 화가들> 149쪽

디지털사진에서 '뽀샵' 처리라 할 수 있는 봉심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일례입니다. 봉심은 초본과 정본이 완성된 뒤에 주로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왕의 화가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도 그릴 수 있어야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자 덕목은 실무적 능력, 즉 눈에 보이는 사실을 실체에 가깝게 그려내는 능력만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격, 인품, 분위기까지 담아낼 수 있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화가들에게 있어 최고의 광영은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이지만 화가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왕의 초상화를 그렸던 것도 아닙니다. 화가 중에서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그릴 화가를 선정해내는 과정은 누가 그린 것인지를 알 수 없도록 이름을 가리는 '블라인드 채점'을 할 만큼 냉정하고 공정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여느 유산들과는 달리 조선시대 왕들의 초상화는 전해지는 수가 유난히 적은데 그 이유도 알게 되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 나 않는 궁중회화의 뒷모습도 석양에 비춘 산 그림자처럼 보게 됩니다. 사진기술이 도입되는 과정이자 새롭게 시작되는 카메라의 역사도 얼핏이나마 읽을 수 있습니다.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털끝 하나는 물론 왕들의 인품까지도 그려내야 할 정도로 엄밀했습니다.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털끝 하나는 물론 왕들의 인품까지도 그려내야 할 정도로 엄밀했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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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는 그의 그림에 의사(意思)가 있음을 높이 들었고, 나이는 아주 많지 않으며 귀가 어둡지만 도화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였다. 박동보의 특징으로 언급된 '의사(意思)'는 무엇일까? 추상화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인 개상 인물의 정신적인 분위기를 포착해냄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자 하는 인물의 내면세계가 사실적인 외형 묘사에 함께 스며들어 보는 사람이 대상 인물의 정신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왕의 화가들> 146쪽

왕의 화가들만큼이나 엄밀하고 핍진해 보이는 결과물

어느 결과물이라고해서 그냥 얻어지는 게 있으랴마는 이런 결과물, 흩어진 흔적을 찾아 맞추고, 가려진 기록을 일일이 확인하고 검증해 가며 발굴해낸 결과물이라면 그냥 책이라고 하기 보다는 역사의 부분을 깊고도 세밀하게 조명하고 있는 투시경 같은 역사서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왕의 화가들>을 읽고 나면 궁중회화뿐만이 아니라 민화에 그려진 이런저런 문양, 해와 달, 구름과 물, 파도와 산, 바위와 괴석에 실린 의미는 물론 봉황이나 거북이, 사슴과 학 같은 동물, 모란이나 복숭아, 소나무나 매화 같은 식물에 담긴 의미까지도 오롯하게 새길 수 있으니 보다 차원 높게 고화를 감상할 수 있는 안목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왕의 화가들이 털끝 하나는 물론 왕들의 인품까지도 그려내야 할 정도로 엄밀하고, 바닥이 들어날 만큼 핍진해야 했다면 <왕의 화가들>을 지은 연구진, 박정혜·황정연·윤진영·강만기가 조선시대 왕가의 면면을 화폭으로 담아낸 화가들을 들여다보는 마음과 기록 역시 왕의 화가들에 못지않게 엄밀하고 핍진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덧붙이는 글 | <왕의 화가들>┃지은이 박정혜·황정연·윤진영·강만기┃펴낸곳 주식회사 돌베개┃2012.10.31┃값 3만원



왕의 화가들 - 조선시대 궁중회화 3

박정혜 외 지음, 돌베개(2012)


태그:#왕의 화가들, #돌베개, #황정연, #윤진영, #강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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