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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탑, 우리가 흔히 보는 그런 탑이 아니다. 탑 안으로 들어가면 전시관이 있는 벽돌조 건축물이다.
 대안탑, 우리가 흔히 보는 그런 탑이 아니다. 탑 안으로 들어가면 전시관이 있는 벽돌조 건축물이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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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5일,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도착한 곳이 중국 서안이다. 일행은 우선 대안탑을 둘러보고 다음 날 화청지와 병마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24일 명나라 시대에 조성된 성벽을 둘러보았다. 시안은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 때부터 무려 1천 년 이상 중국 왕조의 수도였던 곳으로 말 그대로 천년 고도이다. 당나라 때에는 장안이라 불리던 곳이다. 이곳에는 볼거리가 많다.

내가 개인적으로 보고 싶었던 곳은 위 네 곳 이외에도 기독교의 동방전래를 말해 주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있는 비림과 당나라 최고의 승려였던 현장법사의 수제자였던 신라승 원측의 사리탑이 있는 흥교사, 중국 최초이자 마지막 여제였던 측천무후가 잠든 건능 등이었지만 여행사의 일정상 네 곳에 국한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안에서의 첫 목적지는 대안탑이다. 대안탑은 당나라 고종의 어머니 문덕황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자은사에 세워진 67미터의 4각 7층탑이다. 현장법사가 서역에서 가져온 불교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서기 652년 세워졌으며 양식은 인도(후일 인도 이슬람식)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인도풍 탑은 당나라 시절에 널리 유행한 듯하다.

인도 델리에 있는 쿠투부 미나렛, 12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이것을 보면 인도 이슬람 양식의 탑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 델리에 있는 쿠투부 미나렛, 12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이것을 보면 인도 이슬람 양식의 탑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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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는 벽돌로 지어졌고, 내부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어서 걸어 올라갈 수 있다. 각 층에는 두보를 비롯한 당나라의 대표적 시인들이 쓴 문장을 볼 수 있다.

국보16호 안동 신세동 7층전탑, 전체적인 모습이 대안탑의 축소판이다.
 국보16호 안동 신세동 7층전탑, 전체적인 모습이 대안탑의 축소판이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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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을 보고 있노라면 안동 신세동에 가면 볼 수 있는 국보 16호 일명 신세동 7층 전탑이 생각난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인데 그 모습이 대안탑을 빼닮았다. 통일신라시대 당시 당나라와의 활발한 문화교류의 산물임이 분명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탑이 국보다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관리가 한 마디로 엉망이다.

이미 조선시대 때 불교 배척으로 인해 수난을 당했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 탑의 문화재적 가치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 의해 더욱 퇴색되어 간다. 인근에 놓인 중앙선 철도에서 기차가 지날 때마다 탑신이 흔들린다. 과연 이 탑이 금세기를 버틸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천 년 이상을 우리 민족과 함께 숨 쉬어 온 소중한 문화재에 대해 최소한의 예우를 생각할 때이다.

화청지에서 양귀비를 만나다

화청지 내에 있는 양귀비 상, 양귀비와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으로 이곳은 언제나 인산인해다.
 화청지 내에 있는 양귀비 상, 양귀비와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으로 이곳은 언제나 인산인해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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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청지는 진시황릉이 있는 여산 북쪽에 있는 당나라 시절 온천 휴양지를 말한다. 이곳은 바로 당현종과 그의 애첩 양귀비의 사랑이 꽃핀 곳이다. 구룡탕 앞에는 양귀비가 반라의 모습으로 우리를 반긴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양귀비와 사진 찍기를 즐거움으로 안다.

화청지 이곳저곳을 돌아보니 당나라 시인 백거이(백낙천)의 장한가가 곳곳에 쓰여 있다. 장한가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백거이가 애절한 시로 표현한 것이다. 백거이는 분명 이곳에 와서 시를 썼을 것이다.

그 언젠가부터 사랑을 속삭일 때 사용하는 단어 두 개가 있다. 바로 비익조(比翼鳥), 연리지(連理枝)라는 말이다. 비익조는 날개 하나씩만 가진 암수의 새가 하나가 되었을 때 날 수 있는 새를 말하고, 연리지는 뿌리는 둘이나 몸이 하나가 된 나무를 말함이니, 바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사랑의 연인을 일컫는다. 이 두 단어가 나오는 시가 바로 장한가요, 그 주인공이 바로 당현종과 양귀비다. 그리고 이들이 노닌 곳이 화청지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연이 깃든 화청지 장생전 앞에 선 필자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연이 깃든 화청지 장생전 앞에 선 필자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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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청지의 장생전 앞을 찾아가 장생전이 나오는 장한가 맨 마지막 구절을 읽어 보았다. 평소에 읽을 때는 그 애절한 곡조가 가슴에 와 닿는 줄 몰랐지만 실제로 장생전 앞에 서서 이 부분을 읽어 보니 로미오와 줄리엣은 참으로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7월 7일 장생전에
夜半無人私語時 (야반무인사어시) 인적 없는 깊은 밤 속삭이던 말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고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이 슬픈 사랑의 한 끊일 때가 없으리

화청지를 설명하면서 하나 놓칠 수 없는 것은 이곳이 중국 현대사에서 잊힐 수 없는 역사적 현장이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가 시안사태라 불리는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곳이다.

1936년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개석은 당시 동북군 사령관이었던 장학량에 의해 납치된 다음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로 인해서 당시 국민당 정권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을 하게 되었고, 그 후 두 세력은 대일본전쟁을 공동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화청지는 장학량이 장개석을 납치하여 감금한 곳이다.

진시황릉을 보지 않고 중국을 말할 수 없다

병마용박물관 제1호갱, 병정들이 마치 살아 있는 듯 도열해 있다.
 병마용박물관 제1호갱, 병정들이 마치 살아 있는 듯 도열해 있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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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박물관은 바로 진시황이 죽은 다음 죽은 영혼을 지키기 위해 진시황릉과 함께 만들어진 지하궁전의 일부이다. 1980년대 이후 서구인들이 중국을 관광하는 경우 필수 코스가 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프랑스 대통령을 지낸 시라크는 병마용은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말하였고, 피라미드를 보지 못한 이가 이집트를 갔다고 할 수 없듯이 병마용박물관을 보지 못한 이는 중국을 가본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원래 진시황릉은 동서 485미터, 동서 515미터, 높이 76미터의 구릉형 묘인데, <사기>에 의하면 이 묘를 만들기 위해 진시황은 즉위 초부터 공사를 시작한다. 중국 통일 이후에는 70만 명이나 되는 인부를 동원하여 만든 대형 토목공사였다고 하니 중국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큰 것은 억수로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다 중화사상의 발로가 아닐까. 더욱 능의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으로 발사되었다고 하니 현대인으로서는 상상이 안 가는 건축물이다.

이곳 병마용 갱은 1970년대 초 한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현재 1호갱, 2호갱, 3호갱이 공개되어 있고, 추가적인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1호갱은 동서 230미터, 남북 62미터의 거대한 갱으로 6천여 개의 병마용과 100개의 전차, 그리고 400개의 기마상이 전시되어 있다. 2호갱은 1호갱보다 규모는 작은데 약 1300여 개의 병마용과 89개의 전차가 출토되었다. 3호갱은 1호갱이나 2호갱보다 규모는 훨씬 작은데 1, 2호갱의 지휘본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병마용박물관에 소장된 실제 사람 크기의 토용
 병마용박물관에 소장된 실제 사람 크기의 토용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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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 이곳저곳을 살펴보면 기원전 진시황 시절의 예술과 과학적 수준을 한눈에 읽어 볼 수 있다. 장군과 병사가 다르며 그 많은 병사도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손톱과 머릿결까지 세밀히 표현하여 지하궁전에 넣은 것을 보면 과연 이것을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인지 의심이 날 정도이다. 과연 권력이란 무서운 것이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권력이었으니 말이다.

진시황의 권력은 지금으로서는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바로 신이었으며 그것은 마치 이집트의 파라오와 같은 것이었다. 모래알같이 많은 인간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황제의 특별한 위엄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제와 관계있는 모든 것은 보통 인간의 상상을 초월해야만 했다. 그것이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불리는 이 역사적 유적을 가능케 했으리라.

명대성벽에서 서안을 바라보다

서안 시내에 있는 명대 성벽
 서안 시내에 있는 명대 성벽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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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성벽, 이것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성벽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다고 평가되는 성벽이다. 당나라 시절의 장안성이 아닌 명나라에 의해 새롭게 축성된 서안성벽이다. 당나라 시절의 장안은 이보다 훨씬 큰 성이었다고 한다. 둘레가 30킬로미터 이상이었고 성내에는 1백만의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명대에 축성된 현재의 성은 높이 12미터, 둘레 14킬로미터의 성이다. 성벽 위는 12미터 이상의 길이 있어 관광객들이 걷거나 자전거로 혹은 전기 자동차로 서안의 도심을 관광할 수 있다. 이 성벽 4면에는 4개의 큰 문이 있는데, 이 중에서 남문은 당대에는 황제의 문이라 하였고, 서문은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었다.

재미있는 일화는 당대에 딱 한 사람 황제가 아닌 사람이 남문을 들어 왔다고 한다. 바로 현장법사다. 그는 서역방문을 마치고 천신만고 끝에 부처님 사리와 불경 수백 질을 짊어지고 장안에 들어선다(서기 645년). 장안을 떠난 지 17년만의 일이었다. 당시 황제(당태종)는 현장법사를 바로 남문 밖에서 맞이하였고 법사와 함께 남문을 들어섰다고 한다.

나는 귀국일인 7월 24일 오전, 비를 맞으며 성벽 길을 걸었다. 시간이 없어 성벽 전체를 걸어 보지 못했지만 지척에 있는 서안성의 랜드마크인 종루를 바라보면서 1400여 년 전 수많은 백성들의 환영 속에 황제와 함께 장안성에 들어오는 현장법사를 그려보았다.


태그:#세계문명기행, #실크로드, #서안, #양귀비, #진시황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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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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