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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여의도 불꽃축제가 한창이던 때에 배달 음식을 주문한 일이 있었다. 한참이 지난 기분이 들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50분이 흘러있었다. 전화기를 들고는 잠시 고민을 했다. 혹시 실수로 주문이 누락되진 않았는지 확인만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독촉 전화로 여길 것이 분명했으니까.

결국 한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음식을 손에 든 청년은 잔뜩 주눅이 든 채로 죄송하다며 머리부터 조아렸다. 그리고는 내 눈치를 살폈다. 벌써 한 소리 들을 각오가 돼있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청년에게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많이 바쁜가 봐요'라고 말을 건넸다. 청년은 그제서야 굳었던 표정을 풀며 불꽃축제로 차가 너무 많이 막혔다고 하소연했다. 나는 다시 다 이해한다는 듯한 너그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는 청년의 표정은 밝았고, 그날 따라 음식도 더 맛있었다.

1시간 넘게 배달 음식을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 

그날 내가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도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있었던 건 남보다 인내심이 많거나 너그러워서가 아니다. 이른바 '30분 배달 보증제'를 폐지하자는 운동을 접하고서 그 뜻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2년 전 피자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청년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일을 계기로 시작되었던 운동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내 독촉 전화가 누군가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 뒤로 배달 음식을 주문할 때면 이런 말을 하고 싶어진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 안전하게 와주세요'라고.

그 운동 덕에 '30분 배달 보증제'는 사라졌다. 처음 제도가 도입된 지 무려 20년만의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다 끝났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30분이라는 데드라인이 지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정한 '30분 배달 보증제'를 막을 수는 있지만, 배달원에게 눈을 흘기는 소비자들까지 처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배달 청년들은 지금도 어디선가 목숨을 건 질주를 하고서도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지 모른다.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당신에게> (강인규 지음)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당신에게> (강인규 지음)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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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세상에는 법과 제도, 또는 정치 권력의 변화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꿔야 할까. 여기 그 물음에 답을 해줄 책이 있다.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당신에게>(강인규 지음, 오마이북).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 변화는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대선이나 총선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하루에도 개개인이 수백 번씩 반복하는 일상의 선택에 달려있다. 예컨대 험한 도로를 달려 고층아파트 거실까지 음식을 날라주는 배달원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든지, 생존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이 무엇 때문에 고통 받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한두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거짓말이 오히려 세상을 바꿀 수 없게 만든다고 꼬집으면서, "사회는 개인의 집합체이기에 한두 명의 개인이 바뀌면 그 사회는 그 몫만큼 바뀌게 된다"고 말한다. 결국,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당신부터 변해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순진한 생각으로 읽힐지 모르지만, 저자의 말대로 조금 다른 '선택'이 가져다준 작은 변화를 경험해본 이라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사람은 이윤의 동물일까? 손님은 왕일까? 

이 책은 그 동안 우리가 늘 맞닥뜨리면서도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았거나, 혹은 애써 피해왔던 주제들에 대해 묻는다. 굵직하게는 권력, 공동체, 교육, 문화, 민주주의, 의식 등 6가지 주제들로 구분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가 우리들이 매일 같이 겪는 일상의 '선택'을 둘러싼 질문들이다.

가령, '사람은 정말 이윤의 동물일까'하는 질문이 그렇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질문이자, 우리가 매순간 내리는 일상의 '선택'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사람은 이윤의 동물'이라는 주장이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탐욕을 합리화하기 위해 유포한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우리 삶을 움직이는 동기가 돈만이 아니라 자비, 사랑, 명예, 그리고 무엇보다 양심"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자신이 어렵게 개발한 소아마비 백신의 특허출원을 거부했던 조너스 소크 박사의 사례를 든다.

조너스 소크 박사가 백신을 개발한 때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소아마비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던 무렵이었다. 특허신청만 했다면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소크 박사는 "당신 같으면 햇볕을 가지고 특허신청을 하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부와 안락한 삶을 버리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윤의 동물로 사는 사람이 더 많지 않느냐고 따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변하면 되니까. 당신이 변하면 꼭 그만큼 세상도 변하니까. 이 책은 그저 당신의 생각이 궁금할 따름이다.

유명 백화점에서 서비스 교육을 진행하는 모습.
 유명 백화점에서 서비스 교육을 진행하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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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손님은 정말 왕이어야 마땅할까'하는 질문을 살펴보자. 역시 일상의 선택과 맞닿은 질문이다. 우리가 매일같이 곳곳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서비스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기분 맞추기'에 초점을 둔 서비스는 경쟁이 심해지면서 직원에게 '비굴함'을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고, 여기에 익숙해진 고객들은 웬만한 친절로는 성이 차지 않게 된다. 이렇게 잘못 길들여진 고객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분이 조금만 상해도 '피의 보복'을 요구하며 난리를 치고, 이들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는 직원의 생사를 가른다."

혹시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는가. 하지만 이러한 그릇된 인식이 낳는 피해는 단순히 서비스 노동자들에게서 끝나지 않고, 우리 사회 전체로 퍼진다. "한 사람이 불행해지면, 공동체는 그 몫만큼 불행한 사회가 된다"는 것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이유다. 게다가 국가인권위 설문조사에서 60%의 소비자들이 '매장 직원의 지나친 인사가 불편하다'고 답했다고 하니, 결국 소비자에게도 서비스 노동자에게도, 또 업주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문화인 셈이다. 이정도면 답은 분명하다. 손님은 결코 왕이어선 안 된다.

'네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위해

책의 질문은 계속된다. 이른바 'OO녀', 또는 '김여사'라는 말로 여성들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문화에 대한 생각을 묻기도 하고, 통칭 '지방대'로 불리는 수도권 밖 대학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돌아보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나이 어린 '아이돌' 가수들이 이끌고 있는 한류 열풍을 보면서 혹시 불편한 생각을 가져본 적은 없는지, 또 외국과 달리 한국의 거리에서는 장애인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에 의문을 가져본 적 없는지도 묻는다. 모두가 우리의 '선택'을 결정짓는 질문들이다.

저자가 답을 이끌어내는 논리는 탄탄하다. 단순히 도덕을 잣대로 우리를 꾸짖거나 타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과거의 '걸그룹'들은 무대 위에서 스텝을 밟는 대신 섬유먼지 날리는 평화시장에서 재봉틀을 밟았다. 걸그룹은 날씬한 몸을 보여주기 위해 저열량 식단을 강요받지만, 직공은 생산효율을 위해 '저수분 식단'을 강요받았다. 국이나 물 등 수분을 많이 섭취하면 화장실에 자주 가는 '낭비'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소녀시대.
 소녀시대.
ⓒ SM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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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열풍을 이끄는 아이돌 가수들에게서 한때 산업역군으로 칭송받던 평화시장 여공들을 떠올린 저자의 통찰은 매섭다. 나아가 "이렇게 해서 우리는 모두 젊은이들의 희생과 착취에 공모하게 되고, 가해자와 피해자는 부둥켜안고 함께 열광한다"는 대목은 뼈아프다. 결국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모른 척했던 그 모든 일들이 우리 사회를 망가뜨려 왔다'고, "'우리의 꿈' 대신 '내 꿈'만을 좇은 결과를 목격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우리 사회를 바꿀 힘이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타인을 위해 존재"하며, "사람은 다른 이의 미소와 안녕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존재"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잃어버렸던 그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다면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것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네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다. 그래야만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 행복한 '우리' 속에서만 '나'도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책은 이렇게 맺고 있다. 대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오늘,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어느 후보의 캐치프레이즈가 그닥 와닿지 않는다면 저자가 말한 '네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글귀를 새겨보는 건 어떨까.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당신'에게 권한다.

덧붙이는 글 |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부제 -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당신에게)(강인규 씀, 오마이북, 2012.11.12, 14000원)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당신에게

강인규 지음, 오마이북(2012)


태그:#강인규, #망가뜨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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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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