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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이신 "고려태사윤공신달지묘"묘비
 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이신 "고려태사윤공신달지묘"묘비
ⓒ 윤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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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할아버지 추향제 동영상 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이신 “고 려태사 윤 공 신달 (高麗太師尹公莘達)”할아버지 추향제를 모시는 실황을 동영상에 담아 기사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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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파평윤씨 태위공파 남양공손 (집성촌)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마산리 종친회장직을 맡은 지 어언 6년여 되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파평윤씨 시조인 '고려태사 윤 공 신달 (高麗太師尹公莘達)' 할아버지 묘역을 한 번도 참배하지 못해 늘 마음 속에 조상님과 우리 문중 종친 여러분과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에게 면목이 서질 않았다. 그것은 바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생업 관계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마침 이번에 시간을 낼 수 있어 그동안 맘먹었던 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 '고려태사 윤 공 신달' 추향제에 참석기로 했다.

'시조 묘역' 참배는 너무 당연한 이치

파평윤씨 시조이신 "고려태사윤공신달" 할아버지 묘 전경
 파평윤씨 시조이신 "고려태사윤공신달" 할아버지 묘 전경
ⓒ 윤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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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일대 국도변 곳곳에 파평윤씨 시조 "고려태사윤공신달" 묘역을 가르치는 거대 입석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어 현장을 찾아가는데 아주 편안하다.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일대 국도변 곳곳에 파평윤씨 시조 "고려태사윤공신달" 묘역을 가르치는 거대 입석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어 현장을 찾아가는데 아주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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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에 의하면 타 문중 종친회에선 전세 버스를 대절해 많은 종친과 함께 시조 할아버지 묘역에 참배를 다녀왔다는데….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리 문중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올해는 먼저 내가 참석해 시조 할아버지 묘역 참배를 드리고 내년쯤 단체 참배를 해볼까하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문제는 경기도 파주와 내가 사는 인천에서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에 있는 '고려태사 윤 공 신달' 시조 할아버지 묘역 참배를 위하여 생각처럼 녹녹치 않았다. 왜냐면 내가 고희 나이다보니 단거리 운전이라면 몰라도 무려 왕복 800여 킬로를 운전하고 다녀오는 일이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조카에게 연락해서 '시조 할아버지 추향제'에 한번 참가하자고 의견을 물으니, 선뜻 대답했다.

"아저씨 알았습니다. 제가 운전하고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13일 오후 5시 반 4명이 승용차 편으로 인천에서 포항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날 이 장날이라더니' 하필이면 칠흑같이 어둠을 뚫고 달려가는 고속도로 구간에 비까지 내려 포항까지 400여 킬로 거리를 달려가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열심히 달렸건만 밤 10시가 되어 포항시 안강면에 있는 모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었다. 이튿날 (14일)에 인근 해장국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서둘러 다시 반시간여 달려,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태사공' 묘 전에 도착하니 오전 8시다.

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 "고려태사윤공신달"의 추향제를 모시기 위하여 이날 제관으로 임명된 (집례, 초헌, 아헌, 종헌 관)의 뒤를 이어 팔도에서 모인 파평윤씨 후순들이 뒤를 따라 제단을 향하고 있다.
 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 "고려태사윤공신달"의 추향제를 모시기 위하여 이날 제관으로 임명된 (집례, 초헌, 아헌, 종헌 관)의 뒤를 이어 팔도에서 모인 파평윤씨 후순들이 뒤를 따라 제단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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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례의 진행에 따라 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이신 "고려태사윤공신달" 할아버지에 대한 추향제가 진행되고 있다.
 집례의 진행에 따라 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이신 "고려태사윤공신달" 할아버지에 대한 추향제가 진행되고 있다.
ⓒ 윤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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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 먹으면 더 어려운 일도 실천할 수 있어

'고려태사 윤 공 신달' 추향제(秋香祭) 시간 즈음이 되면, 전국에서 참석한 종친 차량 행렬로 교통 대 혼잡이 예상돼 "태사공" 할아버지 신도 비 주변에 주차하고 묘역까지 걸었다.  이곳 포항시와 기계면 일대에선 '고려태사 윤 공 신달' 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 묘역을 상당히 높이 추앙(抽仰)해 모시는 듯한 분위기다.

거리 곳곳에 '고려태사 윤 공 신달' 묘역 위치를 알리는 거대 대리석 입석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난생처음 '고려태사 윤 공 신달' 시조 할아버지 묘역을 찾는 후손의 어깨가 절로 으쓱해지며 우리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이신 '고려태사 윤 공 신달' 할아버님의 위업이 대단하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숙여진다.

태사공 할아버지 묘역 입구 도로 양편에는 하늘을 찌를듯한 아름드리 노송들이 빽빽이 들어서 마치 왕릉 분위기와 흡사하다. 또, 홍살문을 지나 봉강재(鳳岡齋)에 들어서니 전형적인 우리나라 기와집 고택이 여러 채로 나뉘어 한 채를 이뤄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 봉강재 재실마다 어제저녁 각처에서 온 파평윤씨 후손들이 하룻밤 유숙하고, 아침 식사하는 모습을 보았다.

일대 풍치를 살피니 내가 '풍수지리' 문외한인데도 한 눈에 이곳 '고려태사 윤 공 신달' 할아버지 묘역이 명당자리란 사실을 알며 역시 하는 마음이 든다.

이날 파평윤씨 시조 "고려태사윤공신달" 할아버지 추향제에 참석하신 후손들이 제례 순서에 따라 참배를 올리고 계신 모습인데 하단엔 약 천여명의 종친들이 부복해 절을 올리고 있다.
 이날 파평윤씨 시조 "고려태사윤공신달" 할아버지 추향제에 참석하신 후손들이 제례 순서에 따라 참배를 올리고 계신 모습인데 하단엔 약 천여명의 종친들이 부복해 절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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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윤공신달" 시조 할아버지 묘역에 후손들이 제례를 올릴 수 없어 묘역 하단 넓은 잔디밭에 후손들이 제례를 모시고 있는 모습이다.
 "태사윤공신달" 시조 할아버지 묘역에 후손들이 제례를 올릴 수 없어 묘역 하단 넓은 잔디밭에 후손들이 제례를 모시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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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할아버지 묘역에 참배해서 할 일을 다 한듯해

오전 11시가 되자 드디어 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이신 '고려태사 윤 공 신달' 추향제 봉행을 위해 봉강재가 진행되엇다. 태사공 묘역까지 200여 미터 넘는 오름길에 이날 제관에 임명받은 (집례, 초헌, 아헌, 종헌 관) 뒤를 따라 늘어선 파평윤씨 후손 인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 섰다. 이미 먼저 올라와 제단 아래 부복하신 파평윤씨 후손의 수가 어림 참아 약 천여 명은 될 것 같다.

이날 '고려태사 윤 공 신달' 시조 할아버지의 추향제(秋香祭)는 먼저 산신(山神祭)제에 이어 집례의 진행 절차에 따라 (초헌관, 아헌 관, 종헌 관)이 강신례, 참신례, 독 축, 참헌례를 끝으로 '고려태사 윤 공 신달' 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의 추향제를 모두 마쳤다.

봉강재에서 점심을 먹은 후 '봉강재 정기총회'가 열렸지만, 나는 귀가길 여정 중에 포항을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난생처음 찾은 포항이라 내친김에 우리나라 지도의 토끼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호미곶' 관광을 하고, 이곳의 명물인 '물회와 과메기'에 일행들과 점심 겸 소주도 한 잔하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시조할아버지 묘역에서 내려다 본 "봉강재와 위에 봉강묘"가 한눈에 보이고 봉강묘 입구에는 전국팔도 파평윤씨 각 종친회에서 세운 종친회비가 수백개도 넘게 세워있다.
 시조할아버지 묘역에서 내려다 본 "봉강재와 위에 봉강묘"가 한눈에 보이고 봉강묘 입구에는 전국팔도 파평윤씨 각 종친회에서 세운 종친회비가 수백개도 넘게 세워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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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이신 “고 려태사 윤 공 신달 (高麗太師尹公莘達)”할아버지 추향제를 모시고 우리나라 지도 토끼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설치된 호미곳 관광을 하였다.
 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이신 “고 려태사 윤 공 신달 (高麗太師尹公莘達)”할아버지 추향제를 모시고 우리나라 지도 토끼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설치된 호미곳 관광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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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태사공 휘신달 약사 (始祖太師 公 諱 莘達 略史)


우리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신라(新羅)의 천 년 사직(千年社稷)이 붕괴(崩壞)하고 후삼국(後三國)의 혼란기(混亂期)를 거쳐 이 나라가 재통일(再統一)되는 역사적(歷史的)인 일대 번역기에 탄강(誕降)하시어 마침내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신 위인(偉人)이시다.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인 신라(新羅) 경명왕(景明王) 2년(918)에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등 동료(同僚)들과 협력(協力)하여 궁예(弓裔)를 무찌르고 왕건(王建)을 국왕(國王)으로 추대(推戴)하여 백성(百姓)의 호응(呼應)을 얻으니 이로써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고려왕조(高麗王朝)가 수립되었던 것이다.

그 공훈으로 (王建) 태조(太祖)로부터 "태사공(太師公)께서는 2등 공신(二等功臣)으로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의 공호(功號)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라는 관작(官爵)을 받으셨다. 태사(太師)라는 관작(官爵)은 태부(太傳) 퇴보(太保)와 더불어 3공(三公)의 예후(禮遇)를 받는 직위(職位)였다.

공(公)의 휘(諱)는 신달(莘達)이요 일휘(一諱)는 협심이시며 시호(諡號)는 소양(昭襄)이시다. 신라(新羅)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893) 계축(癸丑) 음력(陰曆) 8월15일 파주(坡州) 파평산(坡平山) 아래 용연(龍淵)에서 탄강(誕降)하시었다.

공(公)께서 파평산(坡平山)과 용연(龍淵) 부근에서 성장하심에 따라 범상치 않은 풍모를 지니시게 되고 재기(才器)가 뛰어나시어 날로 영특한 자품(姿品)을 갖추시게 되었다. 공(公)께서는 자라나시면서 학문(學問)을 익히시고 또 파평산(坡平山)에 올라가 무술(武術)을 연마하신 후 성년(成年)이 되시면서 어느 재상댁(宰相宅)에 문객(門客)으로 계시게 되었다.

그 때 가뭄이 극심하여 곡식이 타게 되었는데 나라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국왕(國王)으로부터 그 재상(宰相)에게 제문(祭文)을 지으라는 왕명(王命)이 내려졌다. 그 재상(宰相)이 자택(自宅)에 돌아와서 제문(祭文)을 지으려 하였으나 머리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에 태사공(太師公)께서 『이렇게 지으시면 어떠하리까?』

하시면서 의군신지유죄감수재앙(宜君臣之有罪甘受災殃) 해초목지무지등몽초열(奚草木之無知等蒙焦熱)이라고 써서 재상(宰相)에게 제시하시자 재상(宰相)은 그 글귀를 보고 과연 명문(名文)이라고 칭찬하시면서 제문(祭文)을 지어 국왕(國王)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 글 뜻은 『임금과 신하가 죄가 있다면 마땅히 재앙을 달게 받겠지만 어찌 무지한 초목까지 타 마르게 하나이까』라는 내용이었다.

태사공(太師公)께서는 그 재상(宰相)의 추천으로 여러 관직(官職)에 오르시었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자세한 문헌(文獻)은 없다. 그후 태사공(太師公)의 묘소(墓所)가 실전되었다가 여러 百年이 지나서 찾았는데 그 지방민(地方民)들로부터 그곳은 윤능골(尹陵谷)이라고 전해 온다는 말을 들은 것이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라(新羅) 유민(遺民)들이 태사공(太師公)의 덕치(德治)에 감동되어 마치 왕과 같이 섬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서거하실 때까지 동경(東京)에 머무시어 30년 동안이나 신라(新羅) 유민(遺民)을 선치(善治)하여 완전하게 고려에 충성스러운 백성(百姓)으로 감화시켰기 때문에 공(公)이 서거하신지 10년 후인 성종(成宗) 2년에 대도독부(大都督府)는 폐지되고 각 군은 그 고을 수령(守令)에게 맡기고 경주(慶州) 일개군(一個郡) 만 다스리는 동경유수(東京留守)를 두도록 직제를 개정하였던 것이다. 중략 <파평윤씨 홈페이지 참조>



태그:#파평윤씨, #시조, #고려태사공, #윤신달, #포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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