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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작가는 토지라는 대작을 집필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분이다. 아마 그 때 그 시절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헌데 나는 읽어보지 않았다. 그래서 시집을 읽기에 앞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대략적인 줄거리를 찾아보았다. 그것이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시집은 특성상 하고 싶은 말을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그러면서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최고의 문장들이다. 작가의 성품,  특징, 사고도 모른 채 시집만 읽는다면 극단적인 결론을 내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세상과의 마지막 헤어짐을 앞두고 오만가지 생각으로 복잡했을 터인데, 늘 그래왔던 것처럼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고 글을 썼다. 나무가 한 번 뿌리내려 제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진정한 작가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한국전쟁, 태평양전쟁, 뼈아픈 가난 속에서도 살아갈 힘을 잃지 않았던 이유는 글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 대목만 봐도 알 수 있다.

책 마지막에는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죽기 직전까지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담겨있다. 희고 매끄러운 피부, 단정하고 정갈한 모습이 천상여자였던 학창 시절, 주름지고 희끗해진 흰 머리카락이 수북한 노년의 모습, 우리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정감가고 푸근하고 따뜻했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글은 화려하지 않지만 깊이 있고 아무렇게나 쓴 것 같지만 삶의 연륜이 묻어난다. 나는 그 동안 몇 번의 글을 쓰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하지 못했다. 적절한 어휘도 떠오르지 않았을 뿐더러, 어떻게 담아야 독자에게 진실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 방향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헌데 그녀는 그 방법을 알았고 그렇게 쓰고 있었다. 그래서 부러웠고 거장이 괜히 거장이 아니구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시집은 네 가지 테마로 나뉘어져 있다. 그 중 가장 가슴 깊이 와 닿았던 부분은 어머니였다. 누구나 그렇듯 어머니는 가장 위대한 이름이자 가장 가슴 저리게 하는 단어이다. 알고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 아는 척, 진실이지만 외면하고, 수많은 사연과 이유와 변명을 가지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

어머니의 사는 법 (일부만 발췌)

어머니는 받아야 할 것은
반드시 받아 냈고
줄 것은 또 어김없이 돌려주었다
물건을 사거나 돈거래 때
셈이 잘못되어 돈이 남으면
일부러 찾아가서 돌려주었다

우리 엄마가 딱 이러하시다. 본인만 모른 채하고 넘어가면 될 일도 혼자 끙끙 앓고 고민하고 걱정하신다. 가슴 깊이 뾰족한 가시가 나타나 하도 쿡쿡 찔러대서 그냥 넘길 수가 없다 하신다.

나같은 경우 사람이나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우체국, 은행 같은 공공기관에서는 잘못 받아도 되돌려 주는 일이 없고, 편의점이나 마트처럼 직원이 알바생인 경우에는 가던 길을 되돌아가서라도 돌려주고 온다. 공무원은 매달 꼬박꼬박 정해진 월급이 나오고 일부는 내가 낸 세금일 테니 이리하나 저리하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다. 허나 알바생은 다르다. 셈이 잘못되어 부족하면 제 월급에서 채워 넣어야 한다. 코 묻은 돈, 벼룩에 간을 빼먹지, 나도 변변치 않지만 그건 못하겠더라.

말소드레기란
말을 옮겨서 분란을 일으킨다는 뜻인데
어머니는 남의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고
호기심도 없었다
밥 먹고 할 일 없는 것들,
내 살기도 바쁜데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그럴 새가 어디 있느냐
여하튼 어머니는 매사에 소극적이며
남에게나 자신에게도
과소평가를 원칙으로 하여
남을 추켜세운다거나
자기 자랑하는 일이 없었다
꿈을 꾸는 사람에게
일이란 돼 봐야 안다는 말로
번번이 찬물을 껴얹었으며
나 역시
어머니의 방식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가 이치에 맞는 얘기이다. 하지만 이제 자라는 새싹에게 멋진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안 그래도 조급하고 염려되고 애간장 타는데 가장 측근인 엄마조차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라 엄포를 주니, 섭섭할 때가 많다.

사람 됨됨이

가난하다고
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
부자라고
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

후함으로 하여
삶이 풍성해지고
인색함으로 하여
삶이 궁색해 보이기도 하는데
생명들은 어쨌거나
서로 나누며 소통하게 돼 있다
그렇게 아니하는 존재는
길가에 굴러 있는
한낱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인색함으로 하여
메마르고 보잘것없는
인생을 더러 보아 왔다
심성이 후하여
넉넉하고 생기에 찬
인생도 더러 보아 왔다

인색함은 검약이 아니다
후함은 낭비가 아니다
인색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낭비하지만
후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준열하게 검약한다

사람 됨됨이에 따라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
후한 사람은 늘 성취감을 맛보지만
인색한 사람은 늘 먹어도 배가 고프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다

모든 일이 흑과 백, 양과 음처럼 극단인 것처럼 보여도, 알고 보면 아주 얇은 종이 한 장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현명함은 누구나 가질 수는 있어도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의식하고 갈고 닦아야 형성되는 성품이다. 

결국 박경리 작가는 돈 많은 부자가 아닌 마음 부자가 되라고 말한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본다.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창창한 나이이지만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사가 아니던가. 언제 어떻게 갈지 모르는 일이니 시작 못지않게 끝도 준비하는 현명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blog.naver.com/lkhsky100424/150151447105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마로니에북스(2008)


태그:#박경리, #버리고 갈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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