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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와 복지가 화두입니다. 그렇다면 2010년 지방선거를 달궜던 무상급식 의제는 어떻게 됐을까요? '좌빨 정책'이라 공격받던 친환경 무상급식은 학교와 지역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을까요? <오마이뉴스>는 무상급식으로 달라진 사회 풍경을 독자 여러분들에게 전합니다. 작은 밥상 하나가 바꿔놓은 세상을 보면서 더 나은 사회를 꿈꿨으면 합니다. [편집자말]
'푸드 표현 교실'에서 한 학생이 야채로 미래의 배우자를 표현했다.
 '푸드 표현 교실'에서 한 학생이 야채로 미래의 배우자를 표현했다.
ⓒ 고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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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8년생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11년간 급식을 먹고 자랐다. 안타깝게도 나는 지독한 '편식쟁이'였다. 늘 당번 아이들이 급식을 치울 때까지 남아서 꾸역꾸역 남은 반찬을 삼키는 아이가 바로 나였다.

콩비지찌개가 나오면 영락없이 굶었다. 도시락을 싸 다니던 초등학교 1학년 때가 무척 그리웠다. 비빔밥과 같은 특식이 나올 때를 제외하면, 학교 급식은 나에게 '끼니' 그 이상이 아니었다. 졸업과 동시에 급식을 먹지 않은 게 그렇게 행복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학교 급식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다. 학교와 교육청, 지방자치단체, 영양 교사들의 노력으로 "급식이 '집밥'보다 맛있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늘었다.

무상급식을 시행하며 '친환경'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은 과거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 학교에서도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식재료를 이용한 표현'을 통해 인성과 식습관을 개선하는 '푸드 테라피(Food Therapy)', 우리 전통음식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가는 '전통식문화 요리교실', '알레르기 교육'과 '제거식'까지. 급식은 끼니를 넘어 교육과 문화를 만나 더 맛있어졌다.

학교에서 푸드 테라피까지

"음식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야!"

어릴 때부터 늘 들어왔던 이야기다. 하지만 음식으로 장난(?)을 치는 게 치료가 되는 학교가 있다. 바로 '푸드 테라피(Food Therapy)'를 시행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여자중학교다.

많은 이들에게 음식은 단지 '먹는 것' '생명 유지' '먹는 즐거움'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푸드 테라피에서는 조금 다르다. 식재료를 직접 만지고, 그것으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교감하면서 식재료와 친해지는 것이다. 그럼 이런 활동을 왜 하는 걸까?

서울사대부여중 '푸드 표현 교실'을 시행하는 이영희 영양교사는 "그런 활동이 식습관 개선에 큰 도움이 되고, 나아가 심리적·정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보탬이 된다"고 말했다.

'푸드 표현 교실'에서 한 학생이 야채로 미래의 배우자 모습을 표현했다. 당근으로 만든 마이크가 인상적이다.
 '푸드 표현 교실'에서 한 학생이 야채로 미래의 배우자 모습을 표현했다. 당근으로 만든 마이크가 인상적이다.
ⓒ 고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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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 표현 교실' 활동에는 채소, 곡물 등 모든 식재료가 사용된다. '밀가루로 가족 모습 표현하기' '라면 벽화' '잼으로 식빵에 얼굴 만들기' '뻥튀기 부시기로 분노 표출하기' 등 다양하다. 이 중 기자의 눈길을 끈 것은 '야채로 미래 배우자 표현하기'였다.

"미래에 가수 남편을 만나고 싶다"는 한 학생은 열무, 파, 파프리카 등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었다. 이 학생은 당근으로 마이크까지 표현하는 섬세함을 발휘했다. 또 한 학생은 쌀로 벌써 세상을 떠난 남자친구를 표현했다. 식재료라는 친근한 소재로 아이들은 마음 깊이 숨겨둔 것들을 자연스레 표현했다.

푸드 테라피에서 식재료는 표현 도구로만 그치지 않는다. 작품을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소개한 후, 아이들은 자신이 사용했던 식재료를 이용해 김밥을 만들었다. 평소 먹지 않았던 당근, 시금치 요리도 자신이 만들면 애착이 가기 마련이다. 게다가 요리 전에 배우자 형상을 만들며 야채들과 '친해지기'까지 했으니, 이제는 못 먹을 이유가 없다.

"지금까지는 (당근 등 야채로 만든 음식은) 절대 안 먹었는데, 먹어보니 맛있어요. 집에 가서 엄마한테 또 해달라고 할 거예요!"

'푸드 표현 교실' 이후에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다. 푸드 테라피가 심리치료와 식습관 개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이영희 영양교사는 실제로 '푸드 표현 교실'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낸 적도 많다고 했다. 

"작년에 다른 사람과 말을 한마디도 안 하는 아이가 있었어요.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극도로 신경질을 내는 바람에, 아무도 그 아이에게 말을 걸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푸드 표현 교실을 하다보니까 아이가 눈에 띄게 달라졌어요. 사람이랑 접촉하는 것도 싫어하던 아이가 먼저 저에게 '선생님 이것 보세요!'라며 말을 걸기 시작했어요."

서울사대부설여자중학교의 텃밭 모습.
 서울사대부설여자중학교의 텃밭 모습.
ⓒ 고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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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재배한 텃밭 작물이 밥상으로

서울사대부여중의 또다른 자랑은 바로 학생들이 직접 가꾼 텃밭이다. 학교에 '텃밭 만들기' 동아리도 있을 정도다. 아이들은 동아리 활동 시간마다 모여 가지, 배추, 무 등을 심었다. 그리고 텃밭에서 재배한 작물로 '가지피클'과 '고추장아찌'를 만들어 급식에서 먹기도 했다. 진정한 친환경 급식인 셈이다. 이번달 15일에는 배추와 무를 이용해 겉절이 만들기도 할 예정이다.

"학교 폭력과 관련된 아이들도 텃밭 만들기 동아리에서 활동해요. 텃밭 가꾸기에 인성교육 효과가 있는 거 같아요."

이영희 영양교사는 이렇게 말하며 "실제로 아이들이 많이 온순해졌다"고 밝혔다. 

서울사대부설여자중학교 '텃밭 만들기'반.
 서울사대부설여자중학교 '텃밭 만들기'반.
ⓒ 고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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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초등학생들이 참여해 '고추장 담그기'를 한다고 해 서울 도봉구 가인초등학교를 찾았다. 가인초등학교는 '전통식문화 계승학교'로 지정돼 있다. 전통식문화 계승학교는 서울시를 통해 매 학기 200만 원의 보조금을 받는다. 이 보조금을 통해 가인초등학교는 매주 4학년 학생 20명을 대상으로 '전통식문화 요리교실'을 운영한다. 안기홍 교장은 전통식문화 요리교실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TV 프로그램 중에도 '먹거리' '요리'에 관한 게 많아졌어요. 자연스레 요리에 관심있는 아이들도 늘었죠. 요리에 대한 관심을 우리 전통음식에 대한 관심으로 유도하려는 차원에서 시작한 사업이에요."

서울 가인초등학교 학생들이 고추장담그기에 열중하고 있다.
 서울 가인초등학교 학생들이 고추장담그기에 열중하고 있다.
ⓒ 고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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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담그는 법을 진지하게 적는 가인초등학교 학생의 모습.
 고추장 담그는 법을 진지하게 적는 가인초등학교 학생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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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현장에서 만난 학생 6명 중 4명의 꿈은 요리사였다. 주로 의사, 간호사가 꿈이었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과 분위기가 달랐다. 지금까지 요리교실에서 송편 만들기, 김장 담그기, 잡채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오는 11일엔 가래떡 만들기를 한다. '빼빼로 데이'로 알려져 있는 11월 11일이 농업인의 날인 만큼 '가래떡 데이'로 정했다는 게 안기홍 교장의 말이다.

고추장 담그기에 나선 아이들도 많이 즐거워했다.

"예전에도 요리교실은 있었는데 주로 쿠키나 케이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잡채를 만들고 궁중떡볶이를 만들어요. 나도 맛있어서 좋지만, 집에 가져가면 할머니가 좋아하셔서 더 기뻐요."

최주희(11) 학생의 이야기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고추장을 서로 더 많이 가져가겠다며 경쟁을 했다.

학부모들은 자녀가 만든 고추장만 좋아하는 게 아니다. 친환경 무상급식에 대한 관심과 선호도도 크게 높아졌다. 가인초등학교 윤은경 영양교사의 말을 들어보자.

"처음에는 무상이니까 급식 질이 저하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그런데 학부모님들이 직접 오셔서 모니터링 하시면 반응이 달라져요. 한 번은 학교에서 곤드레나물밥을 한 적이 있는데, 학부모들이 '이런 건 집에서도 못 먹는다'라며 좋아하시더라고요."

물론 영양교사로서 아쉬움과 욕심이 없는 건 아니다.

"예산 문제만 해결된다면 친환경 식자재 이외에도, 시설 투자도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우리 학교는 서울시의 투자를 받아 오븐기를 설치했어요. 오븐기가 생기니 튀긴 음식 대신에 할 수 있는 음식 종류가 훨씬 다양해졌어요. 그만큼 건강한 식단을 짜기도 쉬워졌지요. 영양교사로서 훗날 오븐기 없는 학교로 배정받을까봐 걱정될 정도예요."

가인초등학교 아이들이 고추장을 담그고 있다.
 가인초등학교 아이들이 고추장을 담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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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만든 고추장을 시식하고 있다.
 자신들이 만든 고추장을 시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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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와 학부모 만족만 커진 게 아니다. 학생들도 "급식이 집밥보다 나을 때가 많다"고 했다. 고추장 담그기에 참여했던 황아영 학생은 "오늘은 '김치밥'이라는 신메뉴가 나왔는데 (아이들이 많이 먹어) 밥이 부족해 급식실까지 다녀왔다"며 "집에선 밥에 반찬 하나가 다일 때가 많은데 학교에선 새로운 음식도 많이 나오고 집에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다"고 자랑했다.

알레르기도 이제 학교가 관리

예전에는 개인 문제로 치부되었던 알레르기를 직접 관리하는 학교도 있다. 서울 미동초등학교는 '알레르기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 학교 박인숙 영양교사는 "알레르기 때문에 음식 못 먹는 학생을 다른 아이들이 놀리는 경우가 있다"며 "이런 아이들에게는 알레르기가 큰 스트레스"라고 지적했다.

미동초등학교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알레르기 교육을 실시했다. 미동초등학교 전체 학생 750명중 6명이 특정 식품에 알레르기가 있다. 전체 학생수에 비하면 소수다. 그럼에도 학교가 교육에 나선 건 친구의 고통과 불편에 공감하는 능력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식재료는 땅콩, 계란, 메밀 등 다양하다. 박인숙 영양교사는 학생 6명을 상대로 개별상담도 실시했다. 이어 앞으로 시범적으로 '제거식'을 시행할 계획이다. '제거식'은 해당 음식에서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식재료를 빼고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조리원들과 협의가 필요하고, 예산과 시간이 많이 들지만 식품 알레르기를 가진 소수 학생을 위한 배려 차원이다.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는 식품군에 번호를 매겨 식단표에 기입하도록 되어있다.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는 식품군에 번호를 매겨 식단표에 기입하도록 되어있다.
ⓒ 고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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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동초등학교를 방문한 뒤 개인적인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급식으로 나온 부침개를 먹고 구토한 친구가 있었다. 메밀 알레르기 탓이다. 그 후로 친구는 급식을 먹기 전 늘 음식에 입술을 대보곤 했다. 혹시 또 구토를 하거나 호흡곤란을 겪을까봐서다.

그 후로 몇년이 흘렀다. 이제는 학교 식단표에서부터 음식 내 알레르기 유발 식재료가 있는지 표기하도록 되어있다. 내가 학교 다니던 때와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학교에 있을 때 '푸드 테라피'나 전통식문화 요리교실이 있었다면 나의 편식은 조금 개선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학교가 알레르기에 관심이 가졌다면 친구의 급식생활도 조금은 편안하지 않았을까? 문득, 지금의 초등학생이 부러워진다. 당시 나와 친구는 급식비를 꼬박 내고도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 

위의 사례가 보여주듯, 무상급식과 학교급식은 진화중이다. 물론 친환경 무상급식이 완벽한 정책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부족한 점이 있게 진화하는 거라고 보는 게 옳다.

서울시에서는 올해 공립초등학교(49만5000명)와 중학교 1학년(10만3000명) 전체를 대상으로 친환경 무상급식이 시행되고 있다. 친환경 무상급식 예산은 총 2844억 원(2012년 3월부터 12월까지)이며 서울시(30%)와 서울시교육청(50%), 자치구(20%)가 함께 부담한다. 서울시교육청은 2014년까지 중학생 전원으로 친환경 무상급식 범위를 확대할 예정이다.

무상급식 시행 여부를 놓고 논란이 한창이던 2,3년 전에는 "학교가 무료급식소냐"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제 그런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변화하는 '급식의 풍경'을 계속 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고재연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단 3기 '오마이 프리덤'에서 활동합니다.



태그:#친환경 무상급식, #푸드테라피, #전통식문화, #알레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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