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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전화기가 필요하다고 하자. 대리점 진열대에서 어떤 제품을 집어 들더라도, 꼭 내려놔야 할 게 있다. '애국심'이다. 잘못하면 물건을 사 주면서 '호구' 신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 기사(아이폰 쓰면 '앱등이', 갤3 쓰면 '애국'?)에서 밝혔듯, 한국의 대표적 제조업체인 삼성전자는 외국인 지분이 60%가 넘고, 휴대폰 해외생산 비율이 80%를 넘어선 다국적 기업이다. 많은 한국 기업과 마찬가지로, 삼성은 공장과 연구소는 물론 본사까지도 언제든 외국으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다. 한국 기업에 우호적인 한 보수언론의 보도를 보자.

"국내외를 막론하고 삼성의 전시장 또는 행사장, 심지어는 일반 대리점에 이르기까지 삼성 안에 한국을 상징하거나 한국의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장식이나 물건은 아예 부착을 하지 않거나, 차후에 알게 되면 즉시 철거한다."

이 <월간조선> 기사에서 한 삼성 고위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성측 인사의 설명은, 삼성은 더이상 한국기업으로 인식 되거나, 한국과 연계되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 회사측의 방침이라는 것이다. '삼성은 본사만 한국에 있다 뿐이지 한국 기업이 아니라는 것이며, 본사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해외로 옮겨 나갈 수 있다. 그러면 삼성은 한국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기업이다.'" 2005년 10월 20일 <월간조선> "국적 포기하는 삼성 - 다국적 기업과 무국적 기업"

국내 소비자를 '봉' 취급하는 한국업체들

이미 2005년에 '삼성은 본사만 한국에 있다 뿐이지 한국 기업이 아니'라고 밝힌 마당이니, 당연히 현재는 그 '무국적' 성향이 훨씬 더 강화되었다. 외국인 주주 비율이 대폭 늘었고, 생산 시설의 해외 이전은 가속화 되었으며, 해외매출 비중도 커졌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의 내수 비율은 계속 줄어, 2011년에는 전체 매출의 16%를 기록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기업이 국내 소비자를 16%만 배려해야 된다는 뜻은 아니다. 업체들은 국내 소비자에게 특별한 빚을 지고 있고,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구멍가게 수준으로 시작한 업체들이 국내 소비자에 힘입어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신종균 삼성전자 IM담당 겸 무선사업부 사장이 지난 9월 26일 서초사옥에 열린 갤럭시노트2 미디어데이에서 S펜을 활용한 새로운 기능들을 소개하고 있다.
 신종균 삼성전자 IM담당 겸 무선사업부 사장이 지난 9월 26일 서초사옥에 열린 갤럭시노트2 미디어데이에서 S펜을 활용한 새로운 기능들을 소개하고 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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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엘지 등 한국 대부분의 제조업체는 한국에서 신제품을 출시한 후, 국내 소비자의 반응을 토대로 제품을 개선해 해외시장에 내놓는다. 소비자들의 높은 교육수준과 까다로운 안목, 적극적인 의견 개진 덕분에 한국 시장은 신제품 개발의 이상적 토양이 되어 주었다. 외국 언론이 한국 시장을 '첨단제품의 시험대'나 '미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타임머신'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한국 특유의 소비성향도 기업 이윤 확대에 큰 역할을 한다. 예컨대 올 6월까지 삼성 갤럭시 노트 전체 판매량 700만 대(공급기준) 가운데 무려 300만 대를 한국 소비자가 구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통 큰 손님'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당장 지난해 나온 갤럭시 노트만 보자. 국내 판매된 제품은 수출용보다 열이 많이 나고, 처리속도가 떨어지고, 전력 소모도 큰 칩을 달고 나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상당 수의 소비자가 구입과 서비스 불편을 감수한 채 해외 구매를 해야 했다. 같은 제품조차 외국보다 비싸게 팔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업체-언론-애국주의의 합작품

올 10월 초 전병헌 의원(민주통합당)은 지식경제부로부터 자료를 제출 받아 '이동통신 3사'의 단말기 출고가 현황을 분석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국내 출고가가 세계 평균가보다 2.5배 이상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전 의원은 이 분석을 토대로 삼성의 '기록적인 영업이익 속에는 국내소비자의 희생이 상당히 반영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국 업체들이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비싸게 내놓으면서도 문제없이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사 주기 때문이다. 외국보다 훨씬 비싸다는 삼성 휴대폰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10월 현재 80%에 이른다.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 강동원 의원(무소속)은 "삼성전자가 정확한 수치를 밝히지 않았지만 9월부터 휴대폰 점유율 80%를 넘긴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소비자들이 바보는 아니다. 형편 없는 물건을 '애국심' 하나만으로 사 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국내 업체 제품이 품질이나 서비스 면에서 경쟁력을 갖춘 경우도 많다. 하지만 한국 소비자들이 이런 사항을 비교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정보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언론은 광고 유치를 위해 국내 대기업 제품 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이통사 대리점은 이윤을 많이 남길 수 있는 국내 업체 제품을 적극 추천한다. 보조금은 궁극적으로 소비자의 부담을 늘리고 업체들이 품질로 경쟁할 수 없도록 만들지만, 당장 새 전화기를 구입하는 고객입장에서는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 된다.

이렇게 해서 업체들이 국내 소비자를 만만히 볼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합리적 정보가 없는 곳에서 소비자가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삼성이 오랫동안 주력 표시장치로 써 온 '아몰레드(AMOLED)' 디스플레이의 장단점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국내 언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정보 제공의 의사도, 능력도 없는 언론

일반 액정화면과 '펜타일' 방식을 적용한 아몰레드 화면을 비교한 모습.
 일반 액정화면과 '펜타일' 방식을 적용한 아몰레드 화면을 비교한 모습.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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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 오서리티>는 아몰레드 디스플레이의 여러 장점을 소개하고 있다. 아몰레드는 얇게 만들 수 있고, 전력소모도 적으며, 화면 명암차가 크고 밝은 장소에서도 선명한 화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기술 자체의 심각한 결함이 있는데, 디스플레이 수명이 짧고 화면에 잔상이 얼룩처럼 남는 현상('번인'현상)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특히 청색 빛이 단기간에 소멸하기 때문에 수명을 늘리기 위해 '비정통적' 색표현 방식에 의존해야 한다. '펜타일(PenTile)'이라 불리는 기술이 그것이다.

<매셔블>은 삼성 갤럭시3의 전반적 사양을 호평하면서도 펜타일 화면을 달고 나온 데 우려를 표했다. 일반 액정화면(LCD)의 경우, 글과 그림을 표시하는 최소단위 '화소(픽셀)' 안에 빨강, 녹색, 파랑 세 가지 색이 들어 있으나, 펜타일 화면의 경우는 녹색과 빨강, 녹색과 파랑 이렇게 두 가지 쌍이 번갈아 들어간다. 액정화면과 달리, 하나의 화소 안에 색표현에 필요한 세 가지 색이 모두 들어있지 않을 뿐 아니라, 각각의 색(하위픽셀)의 크기도 다르다. 이로 인해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색표현이 어려워진다.

아몰레드는 처음 보면 선명한 색 때문에 한눈에 끌리기 쉽지만, 자세히 보면 흰색에 푸른 빛이 돌고, 색이 과장되어 있으며, 특히 빨간 색 계열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과거에는 문자표현의 정밀도가 떨어지는 문제점도 있었으나, 현재는 해상도가 늘어나 맨눈으로는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개선된 상태다. 하지만 부정확한 색표현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아몰레드는 하나의 화소가 완전한 색표현을 하지 못하므로, 필요에 따라 옆의 화소의 색을 '빌려'와야 한다. 이는 전체적으로 해상도와 색표현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 이유로 '슈퍼 아몰레드(1280 x 720)'는 수치상으로는 고해상도지만, 실제로는 '준고해상도'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아몰레드'나 '펜타일'이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제품의 장점과 단점을 정확히 알려 주어야만 용도에 맞게 제대로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언론은 소비자만 골탕 먹이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해당 업체와 관련 산업, 그리고 국가까지 좀먹게 된다. 제대로 된 제품을 선택하게 만들어 줘야, 제대로 된 경쟁이 일어나고,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드는 업체가 성공하고 산업 전체가 발전하는 선순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아몰레드에 집착해 온 주요 이유는 자사가 생산하는 부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삼성처럼 거의 모든 부품을 자체 생산하는 능력은 큰 저력이다. 스마트폰 후발주자였던 삼성이 발빠르게 애플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도 '반도체에서 배까지 다 만드는(from chips to ships)' 한국재벌 특유의 수직수평통합 구조가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저력'이 스스로 발목을 잡는 약점이 될 수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최상의 부품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부품'이기때문에 제품 안에 집어 넣기 쉽기 때문이다.

노동 천시하는 못된 전통이 미래를 파괴한다

제조업이 유발하는 일자리 수. 1000개의 생산직이 4700개가 넘는 다른 직업을 만들어 낸다. 제조업이 사라지면 관리직과 연구직도 함께 사라진다. 한국에서 제조업이 사라지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 없는 이유다.
 제조업이 유발하는 일자리 수. 1000개의 생산직이 4700개가 넘는 다른 직업을 만들어 낸다. 제조업이 사라지면 관리직과 연구직도 함께 사라진다. 한국에서 제조업이 사라지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 없는 이유다.
ⓒ 뉴욕타임스 멀티미디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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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산업이나 금융업 등 서비스업이 유발하는 직업창출효과는 아주 미미하다. 1000개의 의료직은 700개의 다른 직업을 만들어 낼 뿐이다.
 의료산업이나 금융업 등 서비스업이 유발하는 직업창출효과는 아주 미미하다. 1000개의 의료직은 700개의 다른 직업을 만들어 낼 뿐이다.
ⓒ 뉴욕타임스 멀티미디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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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리뷰 하나 제대로 못 쓰는 언론이 산업의 미래를 제시할 수는 없다. 삼성, 엘지, 현대차 등이 공장을 해외로 옮길 때 박수나 치고 있는 언론의 태도를 봐도 알 수 있다.

일자리가 사라지는데도 갈채를 보내는 이 부조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에는 '해외 진출' 자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독특한 민족주의와, 노동을 천시하는 그릇된 전통, 그리고 재벌이 하는 일은 무조건 치켜세우고 보는 한국 언론 특유의 노예근성이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아는가? 제조업은 금융업이나 의료산업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자리를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말이다. <뉴욕타임스> 인터넷판 1월 21일자 분석에 따르면, 1000명의 자동차 생산직은 2410명의 부품 제조업자, 260명의 경영자, 244명의 물류업자, 271명의 기술연구직, 1527명의 기타 일자리를 만들어 낸다. 1000명의 생산직을 만들면 5712명의 일자리가 마련되는 것이다. 반대로 생산직 노동자가 사라지면, 경영자와 연구직도 함께 사라져 버린다.

한국은 의료나 금융 등 '고급' 서비스직종에 대한 편애가 심하지만, 이 서비스업은 직업 창출 효과 면에서 제조업과 비교가 안 된다. 1000명의 의료직은 700명의 추가 일자리를 만들어 낼 뿐이다. 제조시설의 해외 이전에 아무 문제 의식을 발견하지 못하는 언론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한국 기업이 제조업을 축소하고 금융이나 의료 분야를 확대해 가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기사 같은 것 말이다.


태그:#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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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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