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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후 열린 '블루스 인 남산' 콘서트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자신이 고문받으며 쓴 시 <하나부터 다시 세자>를 읊었다.
 24일 오후 열린 '블루스 인 남산' 콘서트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자신이 고문받으며 쓴 시 <하나부터 다시 세자>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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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짙게 깔린 남산 자락에 감미로운 노래가 울려 퍼졌다. 기타와 하모니카, 가수들의 노래소리가 쌀쌀한 가을밤을 따뜻하게 데웠다. 하지만 노래가 울려 퍼진 남산은 군사독재시절,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고문 받았던 곳이다. 이제 고통의 비명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한적한 데이트 코스가 됐다.

24일 어둠이 낮게 깔린 오후, 서울 중구 예장동 옛 국가안전기획부 별관 터에서 '블루스 인 남산' 콘서트가 열렸다. 국가 폭력에 의해 고문당한 이들의 외침·비명을 블루스 곡으로 가득채웠다. 이 공연은 인권재단 '사람'이 아픈 기억을 딛고 남산을 평화와 인권이 살아 숨 쉬는 숲으로 만들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이미 지난 5월 30일에도 '인권·평화의 숲 콘서트'를 연 바 있다.

최광기 토크컨설팅 대표의 사회로 문을 연 콘서트는 가수 김대중씨의 공연으로 흥을 돋우었다. 김씨가 <씨없는 수박>, <불효자는 놉니다>, <300에 30>의 노래를 부르자 참가자들로부터 앙코르 요청을 받았다. 이에 김씨는 다시 노래로 들으며 깊은 가을 밤을 맞았다. 100여 명의 청중들은 가수 강허달림, 강산애씨의 공연에도 박수와 환호성으로 앙코르를 외쳤다.



백발의 노인에게 증오를 남긴 남산 자락을 인권·평화의 숲으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콘서트 이야기 손님으로 나왔다. 백 소장은 자신이 이곳에서 고문을 받으며 썼던 시, <진술거부>와 <하나부터 다시 세자>를 읊었다. 뼈가 타는 냄새가 나는 고통 속에서 백 소장은 시를 통해 그 순간을 회상했다.

"지금 나의 싸움은 그저 바보처럼 세는 거다/ 악독한 살인마 네놈들의/ 죄상을 토막토막/ 질근질근 이를 갈며/ 이 밤을 끝간데까지/ 세고 또 세는 거다"

백 소장은 "여기 이 건물은 보자마자 이 늙은이가 증오의 불길이 타오른다"며 "1970년대, 여기로 끌려 와서 거듭되는 매질에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백 소장이 말한 건물은 지금은 서울 유스호스텔로 옛 안기부 본관이 있던 건물을 말한다. 안기부는 1961년 설치되어 숱한 인권침해를 자행한 국가폭력기구였다. 아직도 당시 사용했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현재 서울시가 이 건물들의 소유주로 서울시 산하기관의 부지로 사용되고 있다.

24일, 서울 남산 옛 안기부 별관 터에서 열린 '블루스 인 남산' 콘서트에서 100여명의 청중들은 가수들의 공연에 앙코르로 화답했다.
 24일, 서울 남산 옛 안기부 별관 터에서 열린 '블루스 인 남산' 콘서트에서 100여명의 청중들은 가수들의 공연에 앙코르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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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안기부터에서 인혁당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수지 김 사건 등 30년 이상 고문과 조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인권재단 '사람'은 이같은 역사를 잊지 않도록 기념관과 박물관, 시민 민주주의 학습장을 만들자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재단은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2041명의 시민 서명을 제출한 바 있다. 

백 소장은 "유신잔재를 우리 민중의 힘으로 청산해서 이 아름다운 남산 자락을 몽땅 접수하자"며 "유신의 부활이 우려되지만 민중이 힘을 합쳐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기자"고 말했다.

유신의 흔적 폭파했던 이곳... "올해, 유신 잔재 부수자"

이어서 영화 <남영동 1985>의 정지영 감독과 박래군 재단 '사람' 상임이사의 토크가 이어졌다. 11월 22일 개봉예정인 <남영동 1985>는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던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영화는 김 고문이 온몸으로 고통을 겪어냈던 가슴 아픈 시대의 폭력을 담았다.

정지영 감독은 "고문 영화를 찍는 내내 아팠다"고 말했다. 작업이 끝나고 나서도 한 달 간 힘들었단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고문' 장면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문의 기운이 그 흔적이 남은 것이다. 그의 말에 박래군 상임이사가 덧붙였다.

"우리가 모인 이 자리가 유신독재의 중앙정보부가 시작된 곳이에요. 1961년 6월 10일 날 박정희 군대가 막사 두 개를 갔다 놓고 시작했죠.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바뀌면서 이곳을 다 폭파하고 시멘트 바닥만 남았어요. 올해 대선에서도 유신의 잔재, 다 부숴야겠죠?"

가수 강산에씨가 24일 열린 '블루스 인 남산' 콘서트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가수 강산에씨가 24일 열린 '블루스 인 남산' 콘서트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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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최광기 대표는 "감독이 영화를 통해 진실을 고백하는 세상, 소설가가 소설을 통해 소설보다 끔직한 현실을 고발하는 세상, 정신과 의사가 해고노동자를 치유하는 세상"이라며 "2012년 12월, 여러분의 힘으로 역사의 진실로 소외된 삶을 보살피고, 평화와 생명을 되찾는 데에 함께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선희(33, 서울 도봉)씨는 "노래와 시, 토크로 가을 밤의 분위기를 만끽했다"면서도 "백기완 선생의 호통과 박래군 이사의 설명에 남산을 새롭게 바라보게 됐다"고 말했다. 차영훈(38, 서울 중구)씨는 "매일 출근길에 지나치는 이 남산이 고문의 현장인지 몰랐다. 내일 아침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지날 것 같다"며 "이 곳이 민주주의를 기억하고 엄혹한 유신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후 7시에 시작한 콘서트는 가을 밤이 깊어가는 오후 9시 반에 마무리됐다.


태그:#인권재단 사람, #남산 안기부터, #백기완 선생, #남영동 1985, #정지영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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