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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왕의 꿈>.
 드라마 <대왕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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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7세기 초반 어느 해의 음력 1월 5일 아침, 신라 수도 서라벌의 귀족 저택. 잠자리에서 일어난 이 저택의 아가씨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신기한 꿈을 꾸다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꿈에서 신라인들이 신성시하는 서악이란 산에 올랐다. 거기서 아가씨는 서라벌 시내를 바라보며 오줌을 누었다. 서라벌은 금세 오줌 물에 잠기고 말았다. 

꿈을 꾼 이 아가씨는 김보희. 김유신의 첫째 여동생이자 훗날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처형이 될 사람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꿈은 신라의 국모가 되는 꿈이었다. '대왕의 꿈'이 아니라 '왕후의 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왕의 처가 아니라 처형이 되고 말았다.

고대 이래로 동아시아에서는 산악숭배가 특히 강력했다. 산이 하늘과 인간을 매개한다는 샤머니즘적 혹은 무속적 관념 때문이었다. 신이 산을 통해 인간세계에 강림한다고 생각했기에 산을 신성시했던 것이다. 산신 할아버지를 숭배하는 관념도 거기서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고대국가들은 다섯 개의 주요 산인 오악에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의 오악 중 하나가 바로 서악이었다. <삼국사기> '제사' 편에서는 계룡산이 서악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백제가 멸망된 뒤의 일이었다. 김보희가 꿈을 꿀 때만 해도 신라의 서악은 오늘날의 경주시 효현동에 있는 선도산이었다.

이처럼 신성한 산에 올라 서라벌을 '암모니아 바다'로 만드는 꿈을 꾸었으므로, 잠자리에서 일어난 김보희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을 것이라고 추론이 가능하다.

서라벌을 '암모니아 바다'로 만든 꿈 

언제부터 생긴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침에 꿈 이야기를 하면 복이 나간다고 한다. 재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삼국유사> 김춘추 편에 따르면, 이날 아침 김보희는 동생 문희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이야기를 하는 보희나 이야기를 듣는 문희나, 그 꿈을 대단하게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두 자매는 뭔가 대단한 행운을 가져다줄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행운의 가치에 대해서는 두 자매는 판단을 달리했다. 보희는 그 가치를 비단치마 정도로 이해했고, 문희는 비단치마보다 높은 정도로 이해했다. 문희가 비단치마를 주고 꿈을 사겠다고 하자 보희가 얼른 동의한 것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감정평가사처럼 '꿈 평가사'가 있었다면, 김문희는 아주 우수한 '꿈 평가사'가 됐을 지도 모르겠다. 열흘 뒤인 1월 15일, 김유신은 왕족인 김춘추와 축구를 하다가 일부러 춘추의 옷끈이 떨어지도록 만든 뒤, 그것을 핑계 삼아 여동생이 그 옷을 꿰매주도록 했다. 미래에 왕이 될지도 모르는 김춘추를 여동생과 연결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김유신은 처음에는 큰 동생인 보희를 소개해주려 했다. 하지만, 보희는 거절했다. 김춘추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보희는 그런 식으로 남자를 만나는 게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는 문희에게 넘어갔고, 문희는 훗날 왕후가 되었다.

참고로, <삼국유사> 이전에 나온 서적에는 그때 마침 김보희가 몸이 안 좋아서 김춘추를 만날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삼국유사>에 적혀 있다.

두 자매가 꿈을 매매한 일은 결과적으로 왕후 자리를 매매한 일이 되고 말았다. 왕후 자리가 비단 치마 값에 팔렸으니, 그 어떤 백화점이나 마트에서도 이런 바겐세일을 시행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김문희가 그저 장난삼아 꿈을 매입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는 그 꿈이 왕후가 되는 꿈이라고까지는 판단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 꿈이 비단치마 이상의 값어치가 될 것이라고는 평가했다.

다시 말해, 김문희는 언니의 꿈을 상당히 현실적으로 이해했다. 꿈에 대한 고대인들의 태도를 보면, 문희가 꿈에 대해 현실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 당시로서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역사를 기록한 <서경>의 '열명' 편에 따르면, 은나라 제23대 군주인 무정은 하늘신(상제)이 자기에게 훌륭한 인재를 내려주는 꿈을 꾸었다. 그는 그 인재를 찾아낼 목적으로, 꿈에서 본 인재의 얼굴 생김새를 전국에 널리 공표했다.

<서경> 해설서인 <서경집전>에서는 무정이 몽타주를 전국에 배포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찾아낸 인물이 부열이란 이름을 가진 인재였다. 전설은 무정을 보좌하는 훌륭한 재상이 되었다. 

어쩌면, 무정은 꿈 이야기가 있기 전부터 부열을 알았을 수도 있다. 무명의 인재를 단번에 재상으로 기용하는 데 대한 정치적 반발을 무마하고자, 그런 쇼를 벌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꿈에서 본 인재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공권력을 동원했다는 점이다.

'꿈은 현실과 정반대'라는 상식이 통하는 현대 국가의 통치자 같았으면, 자신의 꿈을 명분으로 공권력을 동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정과 그의 백성들은 그 같은 공권력 동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꿈에 대해 꽤 현실적인 의미를 부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단 주고 꿈을 산 문희... 꿈을 통치에 이용한 왕들 

예복을 입은 신라 귀족 여성(상상도). 왕비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왕비의 모습은 아니다. 사진 출처는 <한국생활사 박물관>.
 예복을 입은 신라 귀족 여성(상상도). 왕비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왕비의 모습은 아니다. 사진 출처는 <한국생활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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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한 사례는 성서에서도 나타난다. 성경 다니엘서 2장에는 세계강국 바빌론의 왕인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이 이스라엘 포로인 다니엘의 도움을 빌려 꿈을 해석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니엘은 그 꿈이 미래의 세계정세에 관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꿈을 통해 세계정세를 예측하는 것은 오늘날 같으면 미친 짓이겠지만, 고대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도 해외원정을 갈 때는 반드시 일급 해몽가를 대동했다. 믿음직한 해몽가가 없으면 그는 전쟁을 개시하지 않았다.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세운 것을 보면, 그가 꿈의 의미를 전쟁에 잘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전쟁에 관한 정보가 가장 많이 내장된 곳은 사령관의 머릿속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는 정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꿈이 그런 정보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령관의 꿈을 통해 주요 정보를 정리하고 전쟁의 판도를 예측하는 것은 어찌 보면 상당히 과학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입문>에서 "고대인들은 꿈에 대해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고 실제적인 이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리스 알렉산더나 바빌론 느부갓네살이나 은나라 무정 등이 꿈을 활용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문희가 비싼 값에 언니의 꿈을 산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꿈을 신성시하는 경향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서양에서는 17·18세기 과학의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동양에서는 불과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경향이 힘을 발휘했다.

조선시대의 위인전이나 인물 평전에서는 주인공에 관한 태몽이 매우 중시되었다. 왕들의 일생을 담은 왕조실록을 봐도 마찬가지다. 옛날 사람들이 태몽을 중시한 것은 태어날 아기의 운명에 관한 주요 정보가 부모의 꿈을 통해 제공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백여 년 전은 물론이고 지금도 여전히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옛날 사람들이 생각조차 못한 일들을 과학을 통해 이루어냈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옛날 사람들보다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방면에서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이 제대로 이해조차 못하는 꿈의 의미를 옛날 사람들이 잘 활용한 것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옛날 사람들이 훨씬 더 위대했다고 말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이해하고 뭐든지 분석적으로 생각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분석보다는 통합의 방법을 통해 사물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꿈의 의미도 훨씬 더 잘 파악했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옛날 사람들을 닮기 위해 한번쯤 노력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남의 꿈을 사서 퍼스트레이디가 된 김문희. 2012년 4사분기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문희를 꼭 닮고 싶어 할 만한 여성들은 대통령선거를 앞둔 예비후보자의 부인들이 아닐까? 만약 '문희 같은 능력을 갖춘 예비 퍼스트레이디'가 있다면, 그는 고급 의상을 들고 유력 후보자의 부인들을 찾아다니며 꿈 이야기를 들으려 할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모든 유력 후보에게 배우자가 있었다면, '문희 같은 능력을 갖춘 예비 퍼스트레이디'란 표현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예비 퍼스트레이디뿐만 아니라 예비 '퍼스트 젠틀맨'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여성인 문희의 꿈을 소재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예비 퍼스트레이디에 관한 이야기로 끝맺음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태그:#대왕의 꿈, #김문희, #김보희, #김춘추, #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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